<마르코 복음서 1장 1절- 45절>
1.저자..마르코복음은 전통적으로 마르코가 집필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의 제자이며 통역이었고, 바오로의 협조자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가르친 것을 충실하게 기록했고 그것이 곧 마르코복음서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마르코가 정말 마르코복음의 저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2.대상..마르코복음은 이방인계 신자들을 대상으로 집필된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그대로 적을 경우에는 항상 그리스어로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3.연대..마르코복음은 서기 70년경에 로마에서 집필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서기 70년은 이스라엘 독립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의 성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해입니다. 마르코복음에 기록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으로 본다면 집필 연대는 70년 이전이 되고, 멸망을 보고나서 그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집필 연대는 70년 이후가 됩니다. 학자들 사이에 두 가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 있고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전쟁 직전이나 초기에 복음서가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1절-8절 : 세례자 요한의 설교>
1절..<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구절은 마르코복음 전체의 내용을 요약한 구절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이고 사실상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시다.' 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은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인데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으로 임금, 또는 대사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당시에 임금이나 대사제를 임명할 때 기름을 부었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원래는 장차 유대 민족을 해방하고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상적인 임금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예수님에게 적용되면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라는 뜻이 되었습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원래는 '기쁜 소식, 승리의 소식'이라는 뜻의 단어였는데, 여기서는 '구원의 기쁜 소식, 하느님 나라에 관한 소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활동과 생애 전체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나 가르침 등도 복음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도 복음이고, 예수님 자신이 곧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작'이라는 말은 다음 2절에서부터 기록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즉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2절..<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라고 되어 있지만 2절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이 아니라 말라키서 3장 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3절은 이사야서를 인용한 것입니다.) '보라' 라는 말은 장엄하게 선언할 때의 관용어입니다.'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파견하시기 전에 먼저 선구자를 보내서 메시아가 일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길을 닦는다는 말은 미리 준비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사람들을 회개시킨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말라키서 3장 23절을 보면,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야훼의 선구자로, 또는 메시아의 선구자로 엘리야 예언자가 먼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세례자 요한이 바로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3절..<"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3절은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원래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해방되어 유다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앞장을 서시고, 한 일꾼이 그분의 앞길을 고르게 닦고 준비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이 구절을 세례자 요한에게 적용했고, 요한복음 1장 23절을 보면 세례자 요한 자신이 자기에게 적용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의 길'이라는 말은 원래는 바빌론의 노예생활에서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주님의 길이라는 뜻이었는데 여기서는 죄의 종살이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의 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 길을 곧게 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회개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회개를 선포했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4절..<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공동번역 성서는 직접화법으로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새번역 성경의 번역처럼 간접화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의 활동 가운데 세례를 베푼 것이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를 세례자라고 부릅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때는 서기 27년경 가을로 추정됩니다. 활동 장소는 예리코 부근 요르단 강 골짜기로 생각됩니다. (요한복음 1장 28절에는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 3장 23절에는 '살림에 가까운 애논'으로 되어 있습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들을 사람도 없는 광야에서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광야'는 상징적인 말로 생각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라는 말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회개' 라는 말에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세례는 회개의 표시로서의 예식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도록 마음을 준비하는 예식입니다.
5절..<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라는 말만 보면 모든 백성이 요한에게 간 것 같지만 실제로 그랬던 것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입니다.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긴 했지만, 루카복음 7장 30절을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요즘에도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신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자신은 뚜렷하게 죄를 지은 일이 없으니 회개할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사순절과 대림절 때에 회개하자고 하는 말들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겠습니까? 그래서 사순절과 대림절이 특별한 의미 없이 지나가면서 반복되고 부활절과 성탄절도 특별한 기쁨도 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선포한 대로 회개를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아야 하고, 용서를 받으려면 참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고백은 회개의 표시입니다.
여기서는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요한은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의 손을 잡고 강에 들어가 머리 위에 물을 부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 익숙했기 때문에 이 세례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례는 죄를 씻어내는 예식이 아니라 먼저 회개한 다음에 삶이 변화되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의 예식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으로 새 생명을 주는 성사이고,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회개의 예식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회개하지 않았는데도 요한의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죄가 씻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통회를 하지 않았는데도 고해실에 들어가서 고해성사 양식대로 성사를 보았다고 해서 죄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해성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통회'입니다. 참으로 통회를 하게 되면 고백은 저절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들이 고백하기를 어려워하는 것은 통회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통회 없는 형식적인 고백은 글자 그대로 '형식'일 뿐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판공성사는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에게도 힘든 일이지만, 성사를 주어야 하는 사제들에게도 힘든 일입니다.)
6절..<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낙타 털 옷, 가죽 띠, 메뚜기, 들꿀'은 세례자 요한의 가난함과 금욕과 고행을 나타냅니다. 낙타 털옷과 허리에 두른 가죽 띠는 엘리야와 비슷한 모습으로서 가난함을 나타냅니다. 메뚜기와 들꿀은 사막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으로서 그런 것들을 먹고 살았다는 것은 그의 금욕과 고행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였음을 나타냅니다.
(요즘에는 낙타 모피가 최상품의 아주 사치스러운 옷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들꿀도 요즘에는 값비싼 물품일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과 지금의 우리 사이에는 2천 년의간격이 있습니다. 언어, 제도, 생활양식, 기후 등등 수많은 요소들이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진리의 말씀, 즉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7절..<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라는 말은 요한이 회개만 선포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 관해서도 선포했음을 나타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말은 '나보다 더 힘 있는 분, 나보다 더 강한 분'이라는 뜻이고, 이 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훌륭한 분'이라고 번역했는데 별로 좋은 번역이 아닙니다.) 요한은 이 말로써 사람들이 자기를 메시아로 오해하는 것을 막아버립니다. '그분이 내 뒤에 오신다.' 라는 말은,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며 메시아의 길을 마련하기 위한 선구자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라는 말은 메시아와 비교할 때 자기는 그분의 노예만도 못하다는 뜻으로 그만큼 자기 자신을 낮춘 표현입니다. 원래 신발 끈을 푸는 것은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메시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정치적인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즉 사람들은 아직 메시아를 정치적인 뜻으로만 생각하고 있고, 참된 메시아의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8절..<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요한은 자기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차이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요한의 세례는 물로만 주는 세례, 즉 회개를 하고나서 죄를 씻어내기 위한 세례일 뿐이지만 예수님의 세례는 죄와 벌을 모두 사해주고 인간을 구원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라는 것입니다. 이 말도 요한 자신은 예수님의 선구자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메시아 시대의 특징입니다. 불은 영혼의 깨끗함을 상징합니다. ('불'은 마르코복음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마태오복음 3장 11절, 루카복음 3장 16절에는 '불'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9절-11절 : 세례를 받으시다>
9절..<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그 무렵'은 서기 28년경,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던 해의 과월절에 앞선 어느 달로 짐작합니다.예수님께서 요한을 만난 곳은 요르단 강가 베타니아의 남쪽입니다. 갈릴래아 지역에 있는 '나자렛'은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지낸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나자렛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나자렛이라는 마을은 구약시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곳 주민들도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 고행, 세례가 모두 필요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으로서, 인류의 죄의 보속자로서,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통해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게 됩니다(요한 1,32-33).
10절..<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내려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하느님의 공식 선언, 또는 하느님의 공적인 인증으로 해석됩니다. '물에서 올라오신'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이 갈라지며' 라는 말은 원래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말은, 지금의 성령의 내려옴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라는 말은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내려오시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내려오심'이라는 상황이, 또는 그 장면이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과 같았다는 뜻입니다. (비둘기가 내려앉는 것처럼 성령께서 내려오셨다는 것.)
마르코복음에는 이 사건을 예수님만 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르코가 예수님께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세례자 요한도 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요한 1,34). 옆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뭔가를 보고 들었겠지만, 그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11절..<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세례 때와 거룩한 변모 때(마르코 9,7), 그리고 수난 직전(요한 12,28)입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에는 '외아들'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사명을 맡기려고 특별히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이며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일하고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은 시편 2편 7절과 비슷한 말인데, 시편 2편 7절은 새로 즉위한 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신성을 직접 증명하시는 말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곧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증명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12절-13절 :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12절..<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그 뒤에'는 '세례를 받은 뒤에'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안내로, 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광야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억지로, 강제적으로 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광야'는 예루살렘과 사해 사이에 있는, 예리코에서 가까운 사막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3절..<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성경에는 40년, 40일 등의 숫자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주로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인데, 동시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은총의 시간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탄'은 악령들의 두목의 이름입니다.
마태오복음 4장 1절-11절과 루카복음 4장 1절-13절에는 사십 일 동안의 단식 후에 사탄이 와서 세 가지 유혹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유혹의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사십 일 동안 줄곧 유혹을 받으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르코는 유혹의 내용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생략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항상 사탄을 이기셨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으로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라는 말은 사람들과의 사귐이 끊어진 고독한 생활, 또 그곳이 황량한 장소였음을 나타냅니다. 또 들짐승들과 함께 지낸 것은 종말의 평화를 상징하기도 합니다(이사 11,6-8).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라는 말은, 사탄이 사십 일 동안 줄곧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천사들도 사십 일 동안 계속 예수님의 시중을 들었다는 뜻입니다. 마태오복음 4장 11절에는 천사들이 사십 일 동안 계속 시중을 든 것이 아니라 사십 일 동안의 단식 후에 시중을 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즉 본질적인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들이 시중을 드는 내용은 시편 91편 11절, 열왕기 상권 19장 7절 등에도 나오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천사들이 '보살펴주는' 것에 가깝고, 여기서는 천사들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에 더 가까운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직무가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시중을 들었다.' 라는 말은 원래는 음식을 접대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는 예수님이 사십 일 동안 단식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태 4,2 ; 루카 4,2). 그래서 여기서도 천사들이 사십 일 동안 예수님께 음식을 드린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섬겼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은 늘 유혹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유혹을 받긴 하셨지만,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기도로 물리칠 수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9,29)."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끊임없이 이런저런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14절-15절 :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14절..<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13절과 14절 사이에는 몇 달의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요한복음1장-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체포해서 감옥에 가두었다가 살해한 일은 뒤의 6장 17절-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뒤에 비로소 공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은 주로 유대 지역 요르단 강변에서 활동했는데, 예수님은 주로 갈릴래아 지역의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바리사이파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고, 아주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도 바리사이파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여기서 '하느님의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하느님의 이름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계획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이어지는 15절이 그 기쁜 소식의 내용이 됩니다.
15절..<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때가 차서'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온 세상은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만드시고 다스리는 세상이었지만, 그것은 은밀하고 잠정적인 통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오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는 나라가 시작되었고, 그 나라는 종말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해야 믿음을 올바르게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 없는 믿음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방향을 잃은, 미신적인, 광신적인 신앙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이비 종교 신도들의 믿음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복음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고, 하느님과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일까? 라는 의문은 우리에게 좋은 묵상 소재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나라의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옛날 조선시대 박해 때, 백정 출신의 한 순교자가 했다는 말이 하나의 해답이 될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에게는 두 개의 천국이 있는데, 하나는 죽어서 갈 천국이고 또 하나는 나를 형제로 받아준 교회 공동체이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다시 우리에게 숙제를 안겨주는 말이 될 것입니다.)
<16절-20절 :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다>
16절..<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어부들을 보시고 그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35절-42절에 의하면, 처음에 부르심을 받은 어부 네 사람은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만났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즉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아닙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길이 21Km, 가장 넓은 폭이 12Km 정도 되는 호수입니다. (원문에는 '갈릴래아 바다'로 되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겐네사렛 호수'(루카 5,1), 또는 '티베리아스 호수'(요한 6,1)라고도 불렸습니다. 당시 이 호수에는 고기가 많아서 많은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했습니다.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이라는 말은 당시 어부들이 투망, 즉 던지는 그물로 고기를 잡는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처음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인데, 원문에서는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아는 원래 벳사이다가 고향이었는데(요한 1,44), 아마도 고기잡이를 위해서 카파르나움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17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나를 따라오너라.' 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내 뒤로 오라.', 또는 '내 뒤를 따라라.'입니다. 이 말은 당시에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걷게 되면 제자가 스승의 몇 발짝 뒤에서 따라가던 관습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내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부르심은 요청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라는 말은, 지금까지는 먹고살기 위해서 물고기를 낚는 어부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라는 말은 원래 '인간 사냥꾼'처럼 나쁜 뜻으로 쓰이던 말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정반대의 뜻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물은 죽음, 세속을 뜻하고, '사람을 낚는 일'은 '구원, 생명을 주는 일'을 뜻합니다.
18절..<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여기서 '곧바로' 라는 말은 그들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그물을 버리고' 라는 말은 직업을 버렸다는 뜻이고, 자기들의 인생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따랐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두 사람의 마음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직업과 가정과 세상의 즐거움 등을 모두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그들의 결단과 그렇게 하도록 만든 예수님의 인격과 매력과 부르심입니다.
19절..<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즉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신 곳 근처에서 다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들도 어부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동업자였습니다(루카 5,10). 야보고가 형이고 요한이 동생인 것은 확실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20절..<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여기서 '곧바로' 라는 말에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자 그들도 역시 가족과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여기서는 시몬과 안드레아를 부르실 때와는 달리 아버지와 삯꾼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별로 중요한 뜻이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즉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의 부르심과 따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절-42절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이 네 사람의 부르심과 응답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오랜 준비 기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소, 즉 부르심은 예수님이 전권을 가지고 행하는 일입니다. 세속에서는 학생이 스승을 선택하지만, 스승이신 예수님은 직접 제자를 선택하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릅니다.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 응답, 결단, 포기'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21절-28절 :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21절..<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그들'은 첫 번째로 부르신 네 명의 제자들과 예수님입니다. 카파르나움은 호수 북쪽에 있던 마을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마을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느 마을에나 회당이 있었고, 사람들은 회당에 모여서 기도와 공부를 했습니다. 즉 회당은 그 마을의 신앙생활과 종교교육의 중심이었습니다. 안식일 예식은 기도와 찬미, 성경 구절 낭독과 해설로 이루어졌습니다. 공동체 구성원 중 누구라도 적합한 사람이면 성경을 읽고 설교를 하도록 요청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구절을 읽고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나자렛에서 가르치신 내용(루카 4,16-22)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22절..<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당시 율법학자들은 성경연구의 전문가였지만, 옛날의 유명한 랍비들의 가르침을 인용하고 해설하는 방식으로 가르쳤고, 자기들이 배운 것을 되풀이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리고 말장난 같은, 틀에 박힌 논리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권위로 가르치셨고, 성경의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랐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23절..<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악령 들린 사람을 고친 일 또한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낸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영'이라는 말은 '윤리적으로 더러운 악령'이라는 뜻입니다. 악령은 자기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도록 했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더러운 영' 으로 자주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라는 말은 악령 들린 사람이 아니라 악령 자신이 소리를 질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본 악령의 공포, 분노 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24절..<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악령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 능력이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말은 당시에 출신지와 이름을 함께 나타내는 일반적인 호칭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이 '나지르 인'(판관 13,7)이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나지르 인'이라는 말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을 풀이한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어떻든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악령을 쫓아내는 권한이 있는 거룩하신 분(대사제)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저희' 라는 복수 일인칭은 악령들의 수가 많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을 멸망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라는 말은 '나는 당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보다 힘이 더 강하다.' 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저는'이라고 단수 일인칭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여러 악령의 대표자로서 말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단수입니다. 악령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기 방어이고 분노의 표현입니다. 사실 악령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패배의 공포와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예수님은 한마디의 권위 있는 명령으로 악령을 쫓아냅니다. 이 명령은 조금도 말대답을 허용하지 않고,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즉시 따라야 할 명령입니다. 여기서 '조용히 하여라.' 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신분을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믿음으로 고백해야 할 내용이고, 특히 악령에게는 예수님의 신분을 발설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악령에게 침묵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는 명령은 지금까지 사로잡고 있던 그 사람을 풀어주고 떠나가라는 명령입니다.
26절..<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더러운 영, 즉 악령은 마지막 반항의 표시로 이제까지 자신이 머물렀던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고 떠나갑니다.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았다는 것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통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라는 말은 악령이 마치 죽음의 외침처럼, 또는 억울하다는 것처럼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도망쳤다는 뜻입니다.
27절..<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예수님의 명령 한마디에 악령이 쫓겨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두려움과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한 번 놀랐고, 악령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다시 놀라게 된 사람들은 과연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분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게 됩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라는 말은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라는 말은 악령을 쫓아낸 일을 하나의 가르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앞의 15절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로'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그 하느님 나라를 당신의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다시 가르치시고 그 나라의 위력을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어떻든 사람들은 악령을 쫓아내신 일 자체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라는 말은, 악령이 떠나간 것은 예수님의 명령에 악령들이 복종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증언하는 말입니다. '서로 물어보았다.' 라는 말은 '서로 수군거렸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자기들이 직접 목격한 일에 대해 놀라고 경탄하고 있지만, 악령이 말한 내용을 귀 기울여 듣지는않았습니다. 즉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만 놀라고 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8절..<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사람들의 놀라움은 소문이 되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널리 퍼지게 됩니다.악령 들렸다가 치유된 사람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마르코는 다른 세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예수님이 악령까지 지배하는 위대하신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9절-31절 :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29절..<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갔다.>--'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라는 말은 앞의 21절의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악령 들린사람에게서 악령을 쫓아내신 후에 회당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아마도 시몬이 예수님과 야고보와 요한을 식사에 초대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은 글자 그대로 그들의 집일 수도 있고, 시몬의 처가집일 수도 있습니다. 시몬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그가 홀아비였다고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 코린토 1서 9장 5절에 케파(시몬 베드로)의 아내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30절..<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시몬의 장모가 얼마나 오랫동안 앓고 있었는지, 시몬이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아마도 시몬의 장모는 갑작스러운 발작 같은 병으로 누워 있었고, 시몬은 그 사실을 모르는 채로 예수님을 초대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몬은 당황했는지 아무 말이 없고, 집에 와 있던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상황을(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곧바로' 라는 말이 참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의 습관인 것 같습니다.)
31절..<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예수님은 부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병을 치료합니다. 여기서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의 원문은 '열이 그녀를 버리고 떠나갔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신 것처럼 열을 쫓아낸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열을 일종의 악령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있었습니다.) 부인이 바로 일어나서 사람들의 시중을 들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치유가 완전한 기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시중을 들었다.' 라는 말은 음식을 접대했다는 뜻입니다.
<32절-34절 :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32절-33절..(32)<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앞의 28절에서 악령을 쫓아낸 일의 소문이 널리 퍼졌다고 했는데,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도 금방 소문이 퍼졌을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라는 말은 이제 안식일이 끝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안식일이 끝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 놓고 예수님께 병자 치유를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식일 동안에는 병의 치료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듣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병자와 마귀 들린 사람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치유의 기대감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문 앞'은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 문 앞입니다.
34절..<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예수님은 몰려든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심으로써마귀 들린 사람들도 고쳐 주십니다. 이것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예수님의 모습이고,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은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발설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아직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고, 메시아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고 있는 마귀들의 입을 막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당부하셨다.' 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허락하지 않으셨다.'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35절-39절 :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
35절..<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즉 모두들 잠들어 있는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홀로 일어나 외딴곳에서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활동은 나눌 수 없는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기도하셨고,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도와주시는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주 기도하셨고, 기도 속에서 아버지와 일치되어서 일하셨습니다.
36절-37절..(36)<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여기서 '시몬과 그 일행'은 제자들입니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이 다시 시몬의 집에 모여들었을 것이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제자들이나 모여든 사람들이나 아직은 참된 믿음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병의 치유나 기적만을 갈망하는 초보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여기서 '스승님'으로 번역된 말은 원문에는 그냥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38절..<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예수님의 첫 번째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였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증명하는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따라서 기적이 예수님의 첫 번째 사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적을 행하는 분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라는 말은 카파르나움을 떠나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는 뜻입니다. 여기서 '찾아가자.' 라는 말은 제자들에게 함께 가자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르라고 촉구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라는 말은 당신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 선포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떠나온 것이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파견을 받고 왔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에는 복음 선포는 곧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사명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39절..<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아직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의 적대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여기서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는 것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이 증명되었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병자들도 모두 고쳐 주셨는데(마태 4,23)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런 이야기는 생략하고 어떤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신 일만 기록했습니다.
<40절-45절 : 나병 환자를 고치시다>
40절..<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병은 하느님의 벌로 간주되었고, 나병 환자는 부정한 자로 선언되고 격리되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인간 사회에서 배척되었고,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 하나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도움을 청합니다.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그의 행동이나 말은 그가 얼마나 절박한 상태에 있는지, 얼마나 간절히 치유를 원하고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마지막 믿음과 희망을 걸고, 용기를 내어 찾아와서 간청을 합니다.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은 이미 예수님의 능력은 믿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의향이 어떨지? 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 라는 말은 나병을 치료해서 그 병의 불결함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스승님'으로 번역된 말은 원문에서는 그냥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스승님'이라는 번역은 별로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41절..<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가엾은 마음(측은한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연민과 자비는 지금의 나병 환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처지를 향한 것입니다.예수님은 나병 환자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한 율법을 무시하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간단한 동작과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한 말씀으로 나병을 고쳐 주십니다. 여기서 '손을 대시는' 동작은 병을 고치는 예수님의 능력의 표현이고,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권한의 표현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라는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내가 원하니 깨끗해져라!' 입니다. 즉 예수님의 권한과 의지로 나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내가 원하니' 라는 말을 '그렇게 해 주겠다.' 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42절..<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구약성경에도 나병을 치료하는 이야기가 더러 나오는데, 시일이 오래 걸리거나, 여러 가지 예식과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말씀, 한 동작으로 간단하게 나병을고쳐 주십니다. 나병 환자는 즉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43절-44절..(43)<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율법에는 나병이 낫게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물을 바쳐야 하고, 병이 나은 것을 사제에게 확인받도록 되어 있습니다(레위 14,2-32). 그렇게 공적으로 인정을 받아야만 격리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명령한'이라는 말은 '율법에 정해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율법대로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고, 예물을 바치라고 지시하시면서, '누구에게든(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시고, 동시에 '그들에게' 증명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그들'은 사제들이 아니고, 일반 사람들입니다. 즉 나병이 나았다는 것을 사제에게서 확인받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되,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가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바라셨지만, 아직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적 이야기만 퍼지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단단히(엄하게)' 이르십니다.
45절..<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나병에서 해방된 그 사람은 당연히 율법대로 성전에 가서 예물을 바치고 병이 나았음을 확인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의 지시를 어기고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널리 알리고 퍼뜨립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준 분의 지시를 어긴 것은 분명 불순종이고, 잘했다고 할 수 없지만, 누구라도 그런 체험을 하게 되면, 즉 그야말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 같은 그런 기쁨과 감사를 느끼게 되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시골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되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서 일단 '바깥 외딴곳'으로 물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외딴곳에 머무르신' 것은, 아마도 기적에 관한 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갈릴래아 지역을 돌아다니셨는데 사람들은 복음 선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병의 치료만 원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예수님은 외딴곳에 오래 머물러 계실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서 계속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대조적인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제까지 인간 사회에서 배척되고 격리되었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의 명성을 퍼뜨리는 '선포자'가 되었다는 것과, 예수님이 외딴곳으로 물러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내고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4,22)." 하여간에 이 이야기는 앞의 34절과 마찬가지로 온갖 고통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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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1)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병에 대해 권한과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신앙은 그저 정신적, 영적인 것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그저 마음에 위로나 주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천당 갈 희망이나 품게 해주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일입니다.
기적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고, 우리는 현세의 삶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합니다.
2)복음을 전한다는 것
예수님을 만난 기쁨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그런 큰 기쁨입니다. 복음전파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기쁨의 흘러넘침'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만났는지, 만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그것부터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