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복음서 3장 1-35절 >
<1절-6절 :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시다>
1절..<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이 일이 언제 어디에서 있었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느 안식일에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있었던 일일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안식일이 되어' 라는 말은 원문에 없습니다.) '다시' 라는 말은 앞의 1장 21절의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말에 연결됩니다. 다른 안식일에 또다시 회당에 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침 회당에 한 장애자가 와 있었습니다.'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전승에 의하면, 원래 직업이 목수(또는 미장이)였는데 병이나 또는 무슨 사고로 손이 마비되었고, 그래서 노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계유지를 할 수 없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확실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손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 찾아왔을 수도 있지만, 다음 2절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바리사이들이 일부러 데리고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앞의 2장 23절-28절에 기록된 안식일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여기서 '사람들'은 바리사이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인데도 그 장애자를 고쳐 주시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지켜보고 있었다.' 라는 말은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구약 율법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탈출 31,14).
그래서 고발하려고 한다는 말은 곧 죽이려고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라고 해도 죽을 위험이 있는 긴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장애자의 상태는 생명과는 상관이 없고,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날 고쳐 주어도 될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에게 그 사람을 고쳐 줄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점입니다.
3절-4절..(3)<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4)<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생각을 꿰뚫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신 것은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즉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바리사이들의 속셈에 정면으로(적극적으로) 맞서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그 장애자가 사람들 가운데에 서면서 모든 사람의 관심이 예수님과 그 장애자에게 집중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노동인가, 아닌가? 가 무척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생명이 위독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안식일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바리사이들도 당연히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좋은 일(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악한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라는 질문은 문제가 다릅니다. 물론 바리사이들도 안식일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일이라고 해도 급하지 않다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질문은 착한 일을 하는 것과 목숨을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이고, 착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악한 일이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안식일을 지키는 기준을 바꾸신 것입니다.
어떤 일이 노동에 해당되는가, 아닌가? 가 안식일을 지키는 기준이 아니라, 그 일이 착한 일인가, 아닌가? 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기 위해 안식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거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리사이들은 반박할 수가 없어서 침묵을 지킵니다. '입을 열지 않았다.' 라는 말은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기준을 착한 일인가, 아닌가로 바꾸셨는데, '그러면 안식일이 아닌 날에는 악한 일을 해도 된다는 것인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안식일이든 아니든 악한 일을 해도 되는 날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착한 일을 해야 하고, 특히 안식일(주일)에는 더욱더 착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해도 된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입니다.) 그리고 바리사이들처럼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면 안 된다는 율법에 매여서 착한 일마저도 하지 않는 것은 곧 악한 일이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엄한 가르침입니다.
5절..<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승복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이 굳어 있어서 율법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노여워하시기도 하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기도 합니다.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셨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라는 말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서 거짓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서 슬픔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와 슬픔을 느끼신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의 근거를 하느님의 율법에 두면서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권위 있는 한마디 말씀으로 장애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당신의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주십니다. 이 기적은 안식일일지라도 좋은 일(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당신의 가르침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신 일입니다. 그 장애자는 '손을 뻗어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다시' 손이 성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다른 기적 이야기와는 달리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장애자 자신의 반응마저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르코가 기적보다도 안식일 논쟁에 더 집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6절..<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고집을 꺾지 않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처럼 회개란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죄인들이 회개는커녕 오히려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합니다. 그래서 결국 더욱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예수님도 바리사이들을 회개시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 아무리 뛰어난 강사를 초빙해서 특강을 한들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열려 있고, 스스로 회개를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짧은 한마디 말을 듣고도 크게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아르스의 비안네 성인은 원래 강론을 잘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켰습니다. 성인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강론, 그리고 이미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청중의 마음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이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는 방법을 모의했다고 되어 있는데, '헤로데 당원들'이란 헤로데 왕실의 추종자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제국과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상류층 사람들이었고, 로마정부와 충돌을 일으키는 일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이유는 달랐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 바리사이파라는 종교집단과 헤로데 당이라는 정치집단이 쉽게 동맹세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7절-12절 :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들다>
7절-8절..(7)<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태오복음 12장 15절을 보면, 앞의 6절에 언급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음모, 즉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를 예수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신 것은 피신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아마도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호수'는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자유스럽게 가르치기 위해서 회당에서 벗어나 열린 공간으로 가신 것으로도 보입니다. 아무래도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은 여러 가지로 제약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앞의 1장 45절의 경우에서처럼 예수님이 조용히 지내시려고 한적한 곳으로 가신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처음부터 조용히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병을 고치고 싶은 희망, 또는 호기심 등으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사람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따라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글자 그대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의 활동 중심 지역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은 대부분 갈릴래아 지역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갈릴래아를 기준으로 '유다, 예루살렘, 이두매아'는 남쪽 지역입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정치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요르단 건너편'은 갈릴래아의 동쪽 지역입니다. '티로, 시돈'은 갈릴래아 북쪽 지역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언급된 지명들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음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많은 인기를 끌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앞의 1장 5절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든 사람들은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 주민들'이라고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는 더 많은 지역, 더 먼 지역도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관한 소문을 전해 듣고, 라는 뜻입니다. '큰 무리'가 몰려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 장정만도 오천 명(6,44)이라고 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아마도 수천 명의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을 것이고 이방인이면서도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9절..<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예수님이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은 군중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 더 잘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일보다는 병을 고치는 일에 더 관심을 갖고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서로 밀쳐 댔음을 나타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배를 일종의 설교대로 준비하게 하시고, 배에 옮겨 타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10절..<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은 예수님께서 배를 준비하도록 시킨 이유를 설명한 구절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들은 기적의 힘이 예수님 내부에 있다고 믿었을 것이고, 어쩌면 예수님을 기적 그 자체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예수님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정도의 믿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6장 56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5장 28절-29절에도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12년 동안 하혈증으로 고생하던 여자의 이야기인데,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은 없고, 그저 기적의 권능에 대한 믿음, 또는 기대감만 있었을 뿐인데도 사람들의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의 자비심에 의한 것입니다.
6장 5절-6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더라도 병자들은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다른 기적을 행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기적은 믿음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은 우선 당장에 그들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옷이나 몸을 만진다고 자동적으로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의해 병이 나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옷이나 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만일에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믿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생활 하는 모습에도 그런 점이 있습니다. 기적의 메달, 스카풀라, 자동차에 부착된 십자고상, 성모상, 묵주 등, 진정한 믿음이 없는데도 그 물건 자체에 무슨 기적의 힘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면, 그게 바로 미신이고 우상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물은 우리 믿음의 보조 수단일 뿐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분별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에 매달리려는 우리의 믿음,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셨던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처지를 딱하게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믿는 초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11절..<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병자들과 함께 마귀 들린 사람들도 몰려들었습니다. (마귀들이 몰려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귀들(더러운 영들, 악령들)은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더러운 영들(악령들, 마귀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예수님에게 굴복한다는 표시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니 나를 해치지 말라." 정도의 뜻입니다.
악령들은 1장 24절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표현했었는데, 여기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더욱 정확한 호칭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대로 예수님을 나타내는 정확한 호칭이지만, 그러나 악령들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삼위일체의 신비를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악령들은 그냥 막연하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12절..<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에는 마귀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부르는 것이 예수님의 활동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그런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바리사이들을 비롯해서 많은 유대인들에게 오해나 증오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호칭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지만, 마귀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호칭은 믿음으로 고백해야 할 호칭입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그렇게 신앙고백을 하게 되고(마태 16,16), 예수님 자신이 대사제 앞에서 스스로 선언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22,70). 지금 이 대목에서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도 없고, 악령들을 쫓아내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악령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은 악령들을 쫓아내셨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악령들을 쫓아내심으로써 악령 들린 사람들을 구하셨고, 당연히 병자들도 고쳐 주셨을 것입니다.
<13절-19절 :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를 하라고 설교하셨지만, 이제는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후계자를 뽑고,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하십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12지파, 즉 새로운 이스라엘의 새 백성을 상징합니다.
13절..<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여기서 말하는 '산'이 어느 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진복팔단 등의 산상설교를 하셨던 그 산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신 것은 예수님의 자유로운 선택이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라는 말은 제자들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단순히 공간적으로 예수님 옆에 가까이 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4절..<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여기서 '열둘'은 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이 열두 명의 제자들은 부활 전까지는 그냥 '제자들'이었고,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서 파견하신 뒤부터 '사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 열두 명이 뽑힐 때가 아니라 부활 후의 일입니다.
12사도를 뽑은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1) 예수님의 사명을 계승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배우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도록. 2) 스승의 지도를 받으면서 지금부터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라는 말은 사도들의 첫 번째 특권을 나타낸 말입니다. 사도들은 제자로서, 또 동료로서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의 비밀까지도 전해 들었고, 그들만을 위한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라는 말은 사도들의 주요 임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을 다시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고, 예수님에 관해서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그들이 해야 할 '복음 선포'입니다.
15절..<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12사도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말씀을 전하고,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6,7).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도들의 '권한'은 곧 그들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승리를 위해 일하게 되는 사도들의 임무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라는 말은 그런 권한과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 사도들을 뽑았다는 뜻입니다.
16절..<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라는 말은 사도들의 부르심과 명단을 연결하기 위해 14절에서 한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여기서 '열둘'이라는 말은 열두 제자를 가리킵니다. ('열둘'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이 맨 처음에 언급되는 것은 그가 사도단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름은 항상 사도들 명단의 맨 앞에 기록됩니다.
'시몬'은 원래의 이름이고, '베드로'는 '반석, 바위'라는 뜻인데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붙여주신 이름입니다. 즉 그에게 맡긴 역할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붙여주신 이름은 '케파'입니다. '케파'는 아람어로 '바위'라는 뜻이고, 그 말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페트라'입니다. 그런데 '페트라'가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그것을 남성 명사인 '페트로스'로 바꾸었습니다. 한국에서는 '페트로스'를 '베드로' 라고 읽고 있습니다.
17절..<'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예수님께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다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들의 성격이나 기질 때문에 그런 별명을 붙여 주셨을 것입니다.
루카복음 9장 54절에서 어떤 사마리아 마을을 불살라버리자고 말한 것이 야고보와 요한의 불같은 성격을 잘 나타냅니다. 그들은 그런 기질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열성적인 선교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그런 '뜨거움'이 필요합니다.
18절..<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안드레아' 라는 이름은 '사내답다.' 라는 뜻입니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이며, 요한복음에서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서 소개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요한 1,42).'필립보' 라는 이름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안드레아와 함께 '벳사이다' 출신이고,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간 사람입니다(요한 1,43-45). 안드레아와 필립보는 아마도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등장하고, 요한복음 12장 20절에서도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합니다.
'바르톨로메오'는 '타르마이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데려온 나타나엘이 바르톨로메오일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앞의 2장 14절에 나왔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곧 마태오입니다. '토마'는 '쌍둥이' 라는 뜻입니다. 그는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되는 다른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이고 예루살렘의 첫 주교인 야고보로 추정합니다. (마태오의 아버지 알패오와 야고보의 아버지 알패오는 다른 사람입니다.)
'타대오'는 '도량이 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유다라고도 불립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제자가 베드로 외에 한 명 더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열혈당원 시몬'입니다. '열혈당'은 서기 6년에 결성되어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력투쟁을 했습니다. 로마제국 입장에서 보면 테러단체이고,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의열단이나 독립군 정도가 될 것입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그 당의 당원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할 것은 없습니다. 서양 사람들의 이름에 뜻이 들어있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나 오늘날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특징이나 성격 같은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이름의 뜻을 아는 것이 우리가 기억하기에도 편할 것 같습니다. 사실 몇몇 사도들 외에 대부분의 사도들은 세부적인 신상정보나 행적들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절..<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배반자 유다는 항상 명단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이라는 말은 그의 배반을 가리키는 말로 고정된 표현입니다. '이스카리옷'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되는데, '가리옷 사람'이라는 뜻 외에도 '자객, 거짓말쟁이, 넘겨 준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그래서 ‘그의 고향은 '가리옷'이었다.’ 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가리옷 사람 유다' 라고 번역했는데, 원문에는 '유다 이스카리옷'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유다가 사도단에 포함될 수 있었는지,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이고, 수수께끼입니다. 예수님이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알고도 뽑으셨는지, 모르고 뽑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12사도 모두 소박한 평민 출신이고, 바리사이들의 멸시를 받던 계급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 베드로와 요한을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표현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유다를 제외한 열한 사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랑, 믿음, 그리고 순교에까지 이르는 열정을 보면 그들이 사도로 뽑힌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몇 사도들의 활동도 기록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기록은 바오로 사도의 활동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2사도가 예수님 승천 후 어디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12개의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니고, 사도단이 지속된 것도 아닙니다. 또 지금의 우리들에게 열둘이라는 숫자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단의 역할과 기능이 주교단으로 계승되고 그 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는 몇몇 제자들에게 임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로서의 사도단에게 임무를 주셨습니다. 제각기 따로 활동했더라도 그들은 분명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을 믿는 개인이 우연히 모여서 함께 섞인 '집단'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한 몸'입니다.)
<20절-30절 : 예수님과 베엘제불>
20절..<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이 이야기는 앞의 열두 사도 선발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라는 말은 아마도 7절의 호숫가에서 카파르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1,29)으로 다시 가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또다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앞의 10절에서처럼 병을 고쳐 주기를 간청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일행(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습니다.
21절..<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예수님의 친척들'은 뒤의 31절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는 같은 고향 사람들을 뜻할 수도 있고, 글자 그대로 친척들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소문'은 예수님의 여러 활동과 기적에 관한 소문 전부를 가리킵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소식'이라고 번역했는데, '소문'이 적절한 번역입니다.)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나섰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라는 말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말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이 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가 미쳤다고 말하는 것을."입니다. 즉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들은 것뿐입니다. 그들 자신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미쳤다는 말은 정신병에 걸렸다는 뜻과 어떤 한 가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뜻과 어떤 신비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는 말입니다.친척들이 어떤 소문을 들었든지 간에 지금 이 구절은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22절..<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한편 율법학자들은 다른 종류의 모함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활동을 조사하거나 염탐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최고의회가 파견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라는 말은 '예수는 마귀 들렸다.' 라는 뜻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마귀 두목의 이름으로 '사탄'이나 '베엘제불'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베엘제불'은 열왕기 하권 1장 2절의 '에크론의 신 바알즈붑'에서 온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는 말은 간단히 말해서 '예수는 마귀의 하수인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는 등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이 혹시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려고 모함을 하고 있습니다.
23절..<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라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에게 오라고 명령하셨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라'와 '가정'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이(마귀가) 예수님을 통해 다른 사탄을(마귀를) 쫓아낸다면 그것은 그들에게는 자살행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은 명백히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24절-26절..(24)<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나라든 가정이든 간에 갈라서면(분열되면) 힘이 약해지고, 결국 망하게 됩니다. 사탄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거슬러서 이 세상을 지배하려고 애를 쓰는 사탄이 스스로 내분을 일으켜 끝장이 나는(망하는) 일을 할 리가 없습니다.
27절..<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사탄을 이길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이가 사탄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쳐부수기 위해 오신 분이고, 또 그런 권능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마귀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굴복했고, 쫓겨났거나 달아났습니다. 여기서 '힘센 자'는 사탄이고, 사탄을 묶어 놓을 정도로 사탄보다 더 힘센 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묶어 놓고 사탄의 집에서 재물을 터는 분입니다. 여기서 사탄에게서 빼앗는 재물은 예수님께서 질병이나 마귀에게서 해방시킨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런 권능이 있기 때문에(사탄보다 더 힘이 센 분이기 때문에) 사탄을 섬길 필요가 없습니다.
28절-30절..(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라는 말은 당신 말씀의 진실성을 엄숙하게 강조하고 선언한다는 뜻의 관용어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활동을 모욕하는 이들(율법학자들)에게 엄중하게 경고를 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라는 말은 스스로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말을 뜻합니다. (공동번역 성서는 '어떤 욕설'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자체를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악마를 쫓아내신 것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마귀의 힘을 빌려서 하는 일이라고 모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성령)께서 하신 일을 악령이 하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 즉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그런 사람을 용서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하느님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천국이라고 하면서 자기 발로 스스로 걸어서 지옥으로 가는 사람을 천국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사람을 버리시기 전에 그 자신이 스스로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라는 말과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라는 말은 사실상 같은 뜻의 말인데, 뜻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이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30절은 이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서 앞의 22절을 표현만 조금 바꾸어서 반복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죄인이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 자비, 용서를 믿고 받아들여서 회개해야 합니다. 루카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용서는 그전에 이미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작은아들이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계속 기다리기는 하겠지만 작은아들을 억지로 집에 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고 잔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억지로 끌고 오는 것은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기 전부터 우리를 용서하셨고, 언제든지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용서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거저 주시는 용서를 스스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31절-35절 : 예수님의 참가족>
31절..<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31절은 앞의 21절에 연결됩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을 때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형제들'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마태오복음 13장 55절을 보면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라는 예수님의 형제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형제들만 언급하고 있는데, 뒤의 32절을 보면 누이들도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친형제나 사촌형제나 모두 그냥 형제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형제들을 사촌형제로 해석합니다.
복음서나 다른 어느 기록에도 예수님의 친형제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암시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일부 종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고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부인하고 있지만 가톨릭교회는 예수님 외에 다른 아들이나 딸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고, 성모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믿고 있습니다.
'밖에 서서' 라는 말이 집 밖에 서 있다는 뜻인지, 모여 있는 사람들의 밖에 서 있다는 뜻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지, 들어가기 싫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만나고 싶어서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을 부릅니다.
32절-33절..(32)<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앞의 20절에서 말한 것처럼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서 예수님 둘레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다고전합니다. 여기서 새번역 성경은 '스승님'이라고 번역하고, 공동번역 성서는 '선생님'이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는 그냥 '당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33절의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은 우리말 번역으로는 마치 '그들이 왜 내 어머니이며 형제들이란 말이냐?' 라고 반문하며 따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라, 이 일을 계기로 하나의 가르침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과연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 보자.' 라는 정도의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34절..<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이 구절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르면서 복음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당신에게는 육신의 친척보다 영적으로 맺어진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5절..<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심해서 듣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 누이, 어머니, 즉 예수님의 참 가족입니다. 그 영적 가족의 가장은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가족이라는 인연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다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을 초월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가족이나 친척들이 예수님의 일을 간섭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사명을 위해 새로운 가정을 만들었고, 거기에 당신 자신을 바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가족처럼 사랑을 주고받게 되고, 영적 인연으로 맺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가정이 육적인 가정과 대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출가'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직자, 수도자가 된다고 해서 가정을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더 큰 사랑, 더 큰 가정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라는 십계명은 성직자, 수도자에게도 당연히 해당되는 계명입니다.
신적인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과 반대쪽에 있거나, 어느 한쪽을 버려야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두 가지는 차원이 다른 것일 뿐, 대립하거나 갈등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누갈다 순교자는 친정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에서, '하느님을 향한 효도를 다하는 것이 곧 부모에게도 효도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부간의 사랑에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천주교의 성직자, 수도자의 독신제도는 따로 논할 일이고, 하여간에 우리가 공경하고 있는 많은 성인, 성녀들 중 상당수가 결혼해서 성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과 가정생활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것이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또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에 종교가 다른 가정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만일에 지금이 종교박해 시대라면 당연히 믿음을 선택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에 지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너무 고지식하게 신앙을 고집하다가 가정을 파탄시키는 것을 과연 예수님께서 원하실까? 물론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적인 인연 때문에 믿음을 버리는 것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박해시대 때에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 앞에서의 일입니다.
먼저 가정의 평화를 이루고 그 다음 단계에서 가족들을 감화, 성화시키는 노력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가정 때문에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되지만, 믿음 때문에 가정을 잃는 것도 잘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정과 믿음을 모두 지키는 지혜, 융통성,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라고 해도 그 열성에 차이가 있는 경우, 예를 들어서 아내가 너무 성당 일에만 매여서 가정을 소홀히 하는 것을 남편들이 싫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선 남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성가정이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이루기 어려운 일입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걸음이 빠른 사람이 걸음이 느린 사람에게 맞춰주는 것이 순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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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회개와 효도"
어머님 돌아가신 뒤 제일 괴로운 것은 생전에 불효했던 기억만 자꾸 떠오르는 일이었습니다. '주자십회'라는 글 중에 '부모사후회'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좀 더 효도를 할 걸 하고 끊임없이 뉘우치지만, 정말 뒤늦은 후회일 뿐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이치입니다. 아무도 '나는 하느님 뜻에 맞게 잘 살았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처럼 나중에 저 세상에 가서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효도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 최선을 다해서 할 일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할 일입니다. 연옥 영혼은 보속은 할 수 있지만 회개의 기회는 이미 놓친 상태입니다. 어쩌면 인간이란 '후회하는 동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뒤늦은 후회는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는 지금, 아직 늦지 않았을 때, 자신의 삶을 고치고, 그래서 새로운 기회를 얻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효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기다리고 계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곧 하느님께 드리는 효도가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