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 요한, 그 사랑의 노래 그림으로

2010. 10. 26. 오전 8:5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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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가고 있는 목동들아
언덕 넘어 저쪽 양 우리로,
혹시라도 보았거들랑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을,
말해다오, 나는 앓고, 아프고, 죽어간다고.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은 <영가>와 <어둔밤>, <사랑의 산 불꽃>을 묵상하며 그린 사랑의 노래를 담은 <서소언 성화 초대전>이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의 평화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 10월 20일부터 시작돼 11월 2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현재 경기도 용인에서 그림 작업을 하고 있는 원로화가 서소언(스테파노, 70세)의 그림이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영가'는 "하느님만을 따르는 인간의 영혼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행복에 이르는 길을 묘사한 것"이다. 

   
▲ 서소언 스테파노
서소언 작가는 "사제들조차 이해하기 버거워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을 그림으로 옮겨서 누구나 쉽게 그분을 접하고, 따라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 전시회를 열었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걸 잠재우고 떠나라고 하는데, "현실을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등지고 살수 없어서" 마음을 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책을 처음엔 의무감에서 읽기 시작했다는 서소언 작가는, 방효익 신부(수원교구 분당요한본당 주임 겸 수원가톨릭대 교수)로부터 권유를 받아 책을 읽으면서, "왜 이걸 읽어야 하지?" 갑갑해 하였으나, 세번째 읽고 나서야 "하느님이 무슨 뜻이 있어 나를 선택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저 '사랑'이 아니면 요한의 말대로 살 수 없는데, 이 사랑의 노래를 쉽게 마음으로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여긴 것이다. 

이번 전시회 작품뿐 아니라 서소언 작가의 그림에는 유난히 '양'(羊)이 많이 등장하는데, 20대에 가톨릭신자가 아니었는데도 처음 작품을 할 때부터 양을 그려왔으니, 인연이 깊다는 것이다. 그는 1980년대에 보증을 잘못 서서 파산하고 어려움에 직면했는데, 그 덕분에 가톨릭신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이후로 시골인 용인에서 풀이나 뽑으며 소일하고 지내다가, '사람 낚는 어부'를 묵상하고, '받은 1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혼이 난 소작인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다시 할 일을 찾았다.

당시 서소언 작가는 5년 동안 성경필사를 하면서 묵상에 돌입했으며,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붓"을 들고 마음을 정화하면서 12사도 등을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그리고, 이게 인연이 되어 '십자가의 성 요한'을 그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미지를 통해 성 요한을 알리고 싶은 갈망이 솟구쳐 나온 것이다. 그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결국 내 마음 안에 계신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며, 이 길을 밝혀진 십자가의 성 요한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하는 9개월 동안 그는 다락방에 갇혀 은둔하며 생활했다. 눈에서 실핏줄이 터지기 일쑤였고 작업을 하면서 네 번이나 혼절했다고 한다. 매일같이 새벽 2시에 일어나 성경필사를 하고 기도를 하고 그림을 그리기를 반복해서 완성한 작품이 모두 50여 점이다. 이 작품들은 어렵게만 여겨지던 십자가의 성 요한을 편안하게 이끌어내고 있다. 

서소언 작가는 향후 복음서를 묵상하면서 그림을 이어나갈 생각이다. 아무래도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람들에게 아직 낯설고, 신자들이 가장 익숙한 복음서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문의: 평화화랑 02-727-2336)

십자가의 성 요한...
십자가의 요한 (Juan de la Cruz, 1568-1591)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 사랑에 빠졌던 사람, 한평생 줄곧 성령이신 사랑의 불로 불붙어 끊임없이 타오르는 통나무처럼 살았던 사람, 하느님 안에서 삼라만상을 사랑한 사람."

   
▲ 십자가의 성 요한
요한은 1542년 스페인의 폰티베로스에서 유력한 가문 출신의 출신의 부친 곤잘로 예페스와 직조공으로 신앙심 깊은 유태계 출신의 고아 카타리나 알바레즈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들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기에 극도로 빈궁한 처지에서 자녀들을 양육해야 했으므로 요한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몫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그의 마음 안에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랑들이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일하고 있던 '라 부바 병원'의 원목이라는 안정된 직책을 제안 받았으나 자시의 자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요한은 1563년 가르멜(O.C)에 입회하여 4년 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때 요한은 깊은 관상에 대한 갈망으로 수도회를 바꾸려고 마음먹고 있던 차에 가르멜 여자 수도회를 개혁한 예수의 데레사 성녀를 만나게 되었다. 성녀는 요한 수사를 즉시 꿰뚫어보고 당신 개혁 사업의 협력자로 택하여 그 이듬 해 1568년 11월 28일 두루엘로에 개혁 가르멜 남자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데레사 성녀가 영혼을 지도하기 위해 천부적 직관으로 쓴 책들을 성 요한은 견고한 신학으로 뒷받침하고 종합하여 가르멜 영성을 체계화하였다. '아름다우신 하느님(Todo)을 얻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온갖 피조물에 이탈하는 (Nada) 것 '

   
▲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의 만남
십자가의 성 요한 영성을 한마디로 하자면 '아름다우신 하느님(Todo)을 얻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온갖 피조물에서 이탈하는 (Nada)것' 이것이다.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것에서 이탈해야 한다는 단호한 비타협성을 우리는 흔히 오해하기 쉽다. 빛에 이르기 위해 영혼은 어둔밤을 거쳐야 하는데,이 어둔 밤은 가장 활동적인 밤으로 온갖 욕망에서 우리 영혼을 정화해주고 우리의 영적 생명을 원천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하느님과 일치하기를 갈망하는 이런 영혼의 상태를 성인은 '스페인 서정시인의 주보성인'다운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내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령을 힘입어 성령 안에서 도달하게 된 거룩함과 완전함의 본보기이다. 또한 성인은 온전히 인간다운 자세로 이 세상에서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았다. 사랑에 근거한 온유함과 동정심이 깃든 그의 성품은 이웃에 대해서는 예민하고 섬세하며 자상한 반면,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한 이탈과 극기 고행으로 대했다. 이런 것이 성인에게 '무의 박사'라는 별명을 갖게 했으나 사실은 오롯한 사랑과, 모든 것에 이르는 절대 조건을 강조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성인은 진실로 '사랑의 박사'이며 그의 삶의 인격을 합당하게 평가하는 데 사랑보다 더 특정적인 것은 없다.

사실상 개혁 가르멜의 영적 지도자였던 요한 성인은 개혁 이전의 가르멜과 개혁파 수도자들 사이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으며 개혁이전의 가르멜 수도자들에 의해 감금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고통들은 요한 성인의 영혼 안에 더할 나위 없는 하느님 체험의 진수를 직조하는 기간이 되기도 했다.

"이 생명의 저녁,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으리라." 하고 말한 사랑의 박사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장상이 아닌 위치 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고통 받으며 죽기를" 원했는데, 바로 그가 원하던 대로 이 모든 조건이 채워진 우베다 수도원에서 1591년 12월 13일 49세로 이승에서의 밤을 마쳤다.

(참고/가르멜수도회 한국관구 홈페이지 http://www.carmel.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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