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이렇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았던 시절에 하룻밤을 지내지 못하고 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하는 인사라고 합니다. 식민지 시대, 전쟁, 가난의 시대를 살았던 분들에게 밤새 안녕한 것은 축복이기도 했었습니다.
지구촌에 예전의 우리처럼 밤새 안녕하지 못한 나라들이 많습니다.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에는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하루하루를 두려움과 굶주림에 떨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것인데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에서도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하루하루 살기가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인위적으로 쌓아놓은 장벽으로 인해 가까운 이웃들이 만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발전을 했어도 아직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애인, 사업에 실패해서 채무에 허덕이는 사람, 부모가 헤어져서 혼자 남게 된 아이들도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고통을 없애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에서는 이러한 고통까지도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과정,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가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올리브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우리는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하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고통과 아픔을 피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청해야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