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김대건 신부 두 분 다 존경합니다. 두 분이 우리 역사에 남겨 놓은 업적과 위대성은 조금도 퇴색됨이 없이 앞으로도 더욱 빛날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김대건 신부는 신앙 때문에 순교하신 분이고, 성삼문은 충절을 지켜서 순국하신 분이지요.
이 두분의 깊은 내면, 즉 두사람의 죽음에 임한 그 순간의 깊은 내면을 한번 비교해 보자 이 말입니다.
성삼문, 그 분 또한 대단하지요. 새남터에 도착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듯 사람들은 그를 구경하고, 저녁하늘에 북소리가 점점 크게 울러 퍼지지요. 성삼문이 옥중에서 자신의 충절을 피력한 점에 우리는 놀라고 숙연해집니다.
한 인간으로서 목숨이 떨어질 때 그 자신이 느꼈던 마지막 내적 심정이 어땠는지 우리는 알길이 없지요.
그런데 그 형장에서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시 귀가 한구절 있습니다.
성삼문의 '임사부절명시'라고 하지요.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하니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라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하니 今夜宿誰家 (금야수수가)라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들어 보니 해가 서산으로 저무는구나,
황천 가는 곳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 나는 어디서 머물고"
이 절명시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허무'지요.
저무는 황혼에 생을 마감하면서 느끼는 허무를 감당할 길 없어 하는 성삼문을 우리는 분명히 느낍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똑같이 조선에 의해 죽음 당하셨던 김대건 신부의 모습을 봅시다.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 북소리를 들으며 죽음의 마지막 칼날을 받기 직전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일장 훈화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해 일해 왔다. 이제 이 목숨을 마치려 한다. 바야흐로 나를 위한 새 삶이 시작된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지요. 그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죽지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으시오. 천주교를 믿으시오. 믿고 봉헌하시오"
그것은 부활신앙에서 오는 삶과 죽음의 가치관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김대건 신부는 지극히 평온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오히려 긴장하고 있는 희광이들을 바라보면서 "내 자세가 어떠냐, 어떻게 바로 잡아주면 너희들이 칼질하기가 편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허무' 고 하나는 '새 출발' 이지요. 하나는 자기의 소신을 위해서 죽지만 그 개인적 소신이 준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인 허무고, 하느님의 계시 진리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새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이라는 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가치는 설명만으로 될 일이 아니고, 그리스도교 신자의 삶 안에 실제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천주교 교리가 그렇듯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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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김길수 교수님이 쓰신 책 "하늘로 가는 나그네"에서 발취한 것입니다.
사순시기 부활의 의미를 되 새기고자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 손 철 호 사도요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