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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은 뒤에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가 부른 찬미의 노래, 곧 ‘즈카르야의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즈카르야 스스로 아들이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 말은 아버지로서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박해 속에서 시련과 고통을 받았고,
때로는 불의에 항거하다가 처절하게 죽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태 5,12; 23,31 참조). 그러니 아버지가 아들의 앞날에 대하여
예언자의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예고하면서도
오히려 찬미와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즈카르야는 아들이 비록 예언자의 삶을 살면서 박해와
처절한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그보다 더 큰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그러한 삶으로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참된 구원이 실현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곧,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모든 이가
구원의 빛을 받아 평화의 길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즈카르야는 주님의 더 높으신 뜻을 깨닫고
기꺼이 아들 요한을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가족의 안위보다
하느님의 더 큰 뜻을 헤아리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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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이사야 말씀하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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