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질서 보존을 향하여

2006. 12. 31. 오전 12: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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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질서 보존을 향하여 -가톨릭신문 1990년 8월 19, 26일


1. 내가 사목하고 있는 구로동 지역은 전국에서 대기 중 아황산가스농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최근에는 맑은 날씨인데도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를 뿌옇게 흐리는 광화학(光化學) 스모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자동차와 공장의 소음, 분진 등으로 주거 환경이 좋지 않으며, 조용한 시골에 며칠 갔다가 구로동에 도착하면, 머리가 아파오며 대기 오염의 심각함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우리는 환경 파괴 문제가 단지 어느 특정지역만의 문제가 아니고 국가적으로 심각하다는 것을 점점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어디 한국만의 문제인가? 현대세계와 문명이 부딪친 전 세계의 과제라고 하겠다. 이런 면에서 지난 1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평화의 날' 메시지는 오늘의 환경보전 문제에 대한 교회의 사명과 책임을 일깨워주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하겠다. 기독교 교회협의회(W.C.C.)가 지난 3월 한국에서 세계대회를 가졌는데, 주제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이었으며, 기독교 형제들도 오래 전부터 환경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이 환경보전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당면한 이 시대의 징표(마태 16, 3)라고 하겠다.


  1) 창조설화(창세 1-3장)에서 본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하여 가진 태도는 대략 아래와 같다.


  첫째는, 신비로운 존재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숭배였다. 이 우주와 대자연은 때로 천재지변 등으로 인간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세력이었기에, 인간은 종교의식 등을 통하여 자연의 재앙을 피하거나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대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숭배와 예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둘째로,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창조주 하느님이 인간이 경배해야 할 절대적인 분이 됨으로써 모든 피조물은 상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자연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생사와 길흉화복은 좌우하는 신적이거나 악마적인 영역이 되지 못하고, 인간은 대자연 대신에 하느님만을 숭배하고 향하도록 초대되었다.  더욱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호의적이고 그들을 환대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자, 인간은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지배권에 참여하게 되고 하느님의 대리자가 돌 수 있었다.


  셋째는, 창조설화(창세 1-3장)에서 본 자연과 인간의 관계다. 현대세계의 환경파괴, 생태계의 위기는 산업화된 국가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의 상황은 근대 이래 과학과 기술문명이 초래한 생태학적 위기, 자연에 대한 파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세계의 위기는 자연의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기술과 자연과학을 통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 됨으로써 일어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힘'과 '초능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기인한다. 이 욕망은 그리스도교의 문화권 안에서 오해되고 오용된 성서의 창조신앙을 통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땅을 정복하라"(창세 1, 26-28)는 성서 말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세계정복, 그리고 세계지배를 위한 신적인 계명으로 간주되었다.  '힘'에 대한 무한한 추구를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 '전능하신 분'과 비슷하게 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서구의 교회에 의해 대변된 창조신앙은 오늘의 세계적 위기에 대하여 공동의 책임을 지고 있다.(J 몰트만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35-36쪽에서 인용) 그렇다면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창세 1, 28)는 말씀의 본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989년 유렵 교회 일치대회에서 나온 선언문은 창조신앙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창조중에(창세 1, 28; 2, 15) 인류에게 특별한 위치를 주셨음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이 세상 안에서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청지기는 소유주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이 온 세상 피조물의 소유주입니다. 피조물 중에 가장 많은 특권을 지닌 인간존재의 특별한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질서 지워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창세 2, 3)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모든 창조와 전 역사의 시작이고 중심이며 정점입니다.(묵시 1, 8) 그러므로 여러 세기에 걸쳐 지배적이었던 윤리관을 재고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즉 인류로 하여금 창조계를 그들의 고유한 목적에 따라 지배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은 하느님 말씀의 진정한 뜻과 배치됩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느님께 복종하는 가운데 피조물 전체를 보존하고 발전시킬 의무를 지닙니다."


  부연하자면 "정복하여라"(창세 1, 28)는 말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땅을 위임하신 하느님의 뜻은 목자와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주신 데 있다. 이 말씀은 오히려 인간이 자연 안에 있고, 자연에 속해 있음을 뜻한다. 현재와 같은 환경오염과 자연파괴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전적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하느님과 더불어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삶이 인간의 삶이다. 자연은 단순히 인간에게 외적으로만 조건 지워지지 않고 인간의 삶의 중심이며 필요조건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인간 측에서 자연에게 비는 화해를 요구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연과 연결되어 있고 자연 안에 놓여 있는 존재다.


  2. 이제 창조신앙에 비추어 본 피조물의 위치를 몇 가지 관점에서 부연해 보고자 한다.


  1)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시편 86, 6-12)을 드러내며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으시다.(창세 1, 31) 보나벤투라 성인은 신비적이고 관상적인 눈으로 '하느님과 피조물과의 관계'를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흔적(Vestigia Dei)이다.  비록 비이성적인 피조물일지라도 하느님의 흔적 또는 그림자며, 그 안에서 삼위일체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F. 코풀스톤, 중세철학사, 338-353쪽) 모든 자연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글자(또는 암호)를 발견하며, 모든 피조물은 인간에게 보내는 하느님의 사랑의 편지다. 자연 자체는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며, 하느님의 형상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의 반사와 반영을 인식할 수 있다.


  2) 피조물 안에 내재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세계를 창조하시는 동시에 존재케 하고 보존하신다. 세계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힘 때문에 존재하며, 하느님은 그 안에 계신다. "하느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 6) 세계를 초월하는 하느님은 또한 세계 안에 내재하신다. "이 성서적 창조 개념은 우주에 존재를 주어 있게 하는 일, 즉 존재의 부여만을 뜻하지 않고 창조물 안에 하느님의 영이 임재함을 뜻합니다."(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을 생명을 주시는 주님} 22-23쪽)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은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피조물에 거처하시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즉 무생물과 함께 하사 존재를 허락하시고, 식물과 함께 하사 성장을 허락하시고 또 동물과 함께 하사 감각을 주시고… 알아듣기를 주시면서 사람 안에 생활하심을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존재와 생명과 감각과 지성을 주시면서 내 안에 계시고 또한 나를 당신의 지존하신 천주성과 비슷한 모상으로 창조하심으로써, 나를 당신의 궁전으로 삼으셔서 내 안에 계심을 생각할 것이다…"(영신수련 No, 235, 236)


  3) 땅은 인류의 공동유산


  이 지구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공동유산이며 그 소출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사목헌장 69항) 그러므로 이 세상의 천연자원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와 남용, 소수인에 의한 자연 자원의 독점은 하느님의 선물과 은총을 거스르는 것이다.


  4) 인류의 죄가 피조물에 끼친 영향


  창세기 1-11장의 내용은 세상을 더럽히게 한 분쟁과 고통의 원인을 묘사한다. 인류의 첫 조상들이 하느님과의 친교와 땅의 소출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조물로서의 자기의 처지를 거부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유혹 때문에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렸다. 이 죄는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동시에 인간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왔다. 또한 이런 죄의 경향은 피조물에 대한 폭력과 파괴, 지배로 이어진다. 모든 피조물은 인류와 함께 고통을 겪으며 탄식한다. 피조물이 겪는 수난은 인간이 그들에게 휘두른 폭력행사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 19-22)


  5)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원천


  인류의 범죄로 인해 갈라지고 분열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희망의 서광은 하느님이 인간과 맺은 계약의 성실성에 기초한다. 하느님의 계약은 인간을 넘어서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다. 하느님은 피조물과 계약을 맺으셨으며(창세 9장), 하느님의 계약은 창조질서를 포함한다. 이 계약 정신이 창조질서의 보존을 위한 토대가 되며, 교회가 이 세상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에 대해 응답하는 근거가 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 하느님은 성자의 육화(肉化․incarnatio)를 통하여 인간과 세상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을 드러내시며 인간과 세상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시키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첫 분이시며 이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셨다.(골로 1, 15-20)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며 이분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의 새 창조의 근원이 되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말씀 업시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 3)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와 구속사건이 새로운 창조의 출발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 5)에 대한 희망이 싹트게 되었다. 이러한 새 창조와 구원사건은 단지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신앙고백이 아니고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우리는 이 구원과 새로운 창조의 결실을 이미 이 세상 안에서 맛보게 된다.  이는 바로 교회의 신비와 그 사명 안에서 잘 드러난다.


  6)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가 이룩하신 구속과 새로운 창조가 이 역사와 세상 안에서 구현되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다. 즉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이 구원과 새로운 창조의 신비를 이 세상 안에 현존케 하고 드러내는 표징이다.(교회헌장 9항) 바울로사도는 이 신비를 다음과 같이 웅장하게 표현하고 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로마 8, 18-25) 생태계의 위기와 환경문제에 대한 신앙인들의 관심과 투신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에서 우러나온다. 교회가 이 세상 안에서 이러한 자신의 사명을 잘 간직하며 나아갈 때, 오늘의 인류가 직면한 환경문제 해결에 진정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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