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영성의 조화와 일치 -(위)디오니시우스 이후의 신비신학, 생활성서 2006년 4월호
지난 호에 우리는 위(僞)디오니시우스의 초월신학을 다루었다. 얼핏 보아 굉장히 추상적이고 난해해 보이는 신비신학인데 인간의 이성을 고양시키면서 또한 그 한계를 분명히 보고 있다.
그런데 2천 년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의 초석을 놓은 교부들의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이성과 신앙이 일치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교부들은 동방과 서방교회를 막론하고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경륜이 담겨 있는 게시의 내용인 성경의 말씀대로 직접 살았으며, 자신들의 생생한 신앙체험과 영적인 삶을 인간의 이성을 빌려, 즉 철학과 신학의 이론을 통하여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그래서 교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가 대신학자들이며 동시에 대성인들이었다. 모두가 탁월한 영성가들이며 뛰어난 사목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부들의 시대에서는 이성과 신앙의 일치, 신학과 영성의 조화, 즉 다시 말해서 앎과 삶의 일치가 자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들 안에 이분화의 현상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신학과 이성의 분리
12세기 초 프랑스 클레르보의 성베르나르도는 생 피에리의 기욤, 생 빅토르의 리차드와 함께 새로운 관상수도회인 시토회를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같은 수도원의 회원이자 철학자였던 아벨라르드는 철학의 이론으로 신앙의 내용을 정립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성경의 말씀들을 변증법으로 다루는 데 익숙하였다. 그는 ꡒ실제로 평신도들이 교의(dogma)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ꡓ 하고 반문하며 신앙의 진리들이 논리학의 도움으로 이해되기를 바랐다. 이에 대하여 베르나르도나 기욤은 아벨라르드가 신앙의 모든 내용을 이성의 비판에 종속시킨다고 보았다.
그의 이론체계 안에서는 이성이 첫 번째 단어이자 마지막 단어여서 계시의 본질적인 내용들까지도 위태롭게 한다고 그들은 보았다.
익히 알려진 대로 아벨라르드는 엘리이스라는 여자 수도자와의 연문으로 교회 안에 커다란 파문을 야기한 이다. 이런 이유로 베르나르도와 동료들은 ꡒ그는 외적으로는 수도승처럼 자신을 소개하지만 내적으로는 이단자이다. 그의 삶과 살아온 방식이나 저서들은 그가 가톨릭 신앙의 박해자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임을 증명한다ꡓ고 보았다. 결국 1140년의 상스공의회에서 교황 인노센트 2세는 아벨라르드를 파문에 처하였다. 이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느님에 대한 신비적인 체험은 수도원의 삶이나 성직자들의 양성 안에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보고, 신학은 수도원의 울타리와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흐름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신학을 개인적인 삶과는 관계없이 순수한 이성의 학문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여기에 윌리암 옥캄(1285-1334)의 유명론(唯名論)이 가세하였다. 이 이론은 구체적인 진리란 인간이 부여하는 이름이 뜻하는 개념과 범주 안에만 존재 한다고 보는 것으로서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체험을 단지 인간 이성 체계 안으로 축소시키게 하였다.
윌리엄 제임스 ꡐ-종교적 경험의 다양성ꡑ
이미 중세에서 비롯된 신학과 영성의 분리현상은 20세기에 와서는 또 다르게 전개된다. 인간의 감성이 하느님 체험의 중요한 식별기준이 된 것이다. 미구그이 종교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1902년에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저서를 통하여 종교학은 반드시 경험적인 자료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인간의 전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종교적 경험을 밝혀내는 데 그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는 종교적인 경험을 어떠한 특별한 종교적 전통의 관점에서 분석하지 않고 종교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려고 하였으니, 그에 의하면 종교적인 현상은 곧 심리현상이다. 즉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은 의식적 상태에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ꡐ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문ꡑ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경험적 가설을 세우고 있다.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김재영 옮김, 한길사, 238쪽).
그에 의하면 신비주의도 신비적인 정신 상태의 특징이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야 하며 이 상태는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전이될 수도 없다. 이러한 특수성 속에서 신비적 상태는 지적 상태보다는 감정적 상태에 더 가깝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신비적인 체험의 절정인 황홀경도 인간의 지성에 의한 추론일 수 없고 직관이며, 우리의 즉각적 느낌이라고 부르는 그런 양식에 따라 형성되어야만 한다. ꡒ종교의 영역에는 제도적인 종교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개인적인 종교가 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나 자신을 순수하고 단순한 개인적인 종교에 한정하려고 한다. 종교는 개인적 상태에 있는 그들의 감정, 행위, 그리고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ꡓ(위의 책, 87-89쪽).
이 윌리엄 제임스의 이론이 끼친 영향은 실로 크며 아마도 개신교의 영성체험의 기준들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의 이론은 경험주의에 기초하는데 경험주의는 모든 인식이 감각들로부터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정신은 종교적인 경험을 축소시킨다. 즉 감정과 감각을 종교적인 인시그이 유일한 양태로 보며 모든 다른 매개(종교적 제도, 이성 등)를 제거할 뿐 아니라, 더욱 중대한 문제는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접근을 부분적인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볼 때 하느님은 보편적인 하느님이라기보다는 특별하신 하느님, 즉 인간의 기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이다.
신학과 영성의 일치를 위한 모색
신학과 영성의 분리현상은 현대인의 종교생활 안에서 자주 대두되고 있다. 어쩌면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서, 영적인 목마름을 호소하고 영적인 샘물을 애타게 찾고 있는 신자들 안에서 더 자주 발견하게 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볼 때 디오니시우스의 신비사상의 기초가 된 신 플라토니즘이 끼친 영향 중 하나는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분리, 정신과 물질의 분리이다. 중세기의 르네상스(문예부흥)에 의해 인간의 현세적인 삶과 이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의 전환이 시작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더 이상 하느님이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과 역사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하여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인류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사명과 책임감을 자각하고 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교회와 신앙인들은 물질문명의 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과학시대를 살아가는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올바른 영성생활은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가톨릭 영성의 뿌리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 있어서 신학과 영성은 하나였으며 신앙과 생활이 일치를 이루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볼 때 성서 안에서도 특별히 요한복음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 안에서 이미 참다운 의미의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다. 올바를 영성생활이 가져오는 열매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신앙에 의한 인식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영성생활이 하느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묵상기도에 뿌리를 내리고 하느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영감을 받고, 말씀으로 양육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1469-1536)는 ꡐ크리스챤 군인의 지침서ꡑ에서 신학의 전개 과정을 이렇게 본다. ꡒ그는 신학자들에게 겸손을 설교한다. 왜냐하면 신학의 목적은 신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비가 계시 안에 담겨져 있기에 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적이다. 신학은 교부들의 가르침에 기초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부들의 가르침은 역사적이고 전통이며 순례의 여정 중에 잇는 교회의 양심이다. 결국 신학은 신비주의이다. 왜냐하면 신학은 성서의 신비적인 의미에까지 도달해 올라가야 하며, 이는 정신뿐아니라 마음으로도 성서의 말씀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ꡓ
사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위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분리되지 않고 서로 흡수되지도 않고 일치를 이루었다. 강생의 신비 안에서 하느님ᄋ이 인간성과 결합하셨고 하느님이 이 세상과, 아니 물질과도 결합하셨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느님의 이성(Logos)이시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쟝 귀똥은 바오로 6세 교황과의 깊은 우정을 지닌 평신도였다. 한번은 두 분이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오로 6세 교황이 ꡒ성서에서 말씀(Verbum)이 육(Caro)이 되셨다ꡓ고 하는데, 이 말을 뒤집어서 ꡐ육이 말씀이 되었다ꡑ라고 표현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에 대한 가장 심오한 정의가 아닐까ꡒ 하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이 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인간이 변모될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의 위력에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생활에 힘쓰는 것도 바로 기도의 힘에 의해 변모되는 데 있다고 할 때 기도와 말씀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즉 우리가 기도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깊게 묵상하고 되새김질하며 말씀 안에 머무를 때에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서 깊은 침묵과 고독의 시간, 광야의 때가 개인의 삶 안에 마련되어야 한다. 숨가쁘게 분주히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 도시인의 진부한 일상적인 삶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이런 시간과 공간을 내 실존 안에 마련할 때에 영적인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