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
| 4 |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
| 5 |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006년 2월 19일
얼마 전에 제가 속해 있는 프라도회의 신부님 한 분이 많은 나이에 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종신서약 형제들이 조촐하게 환송연을 마련했습니다. 유학을 갈 신부님이 “당신들 덕분에 제가 사람이 됐습니다. 여러분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예수님께 데려간 친구들과 같습니다…”라고 감사를 표하자, 함께 있던 신부님 한 분이 “그런데 말이야 내가 당신을 들 것에 실어 나르면서 사실은 내 병이 나은 것 같아…”라고 답변했습니다. 그 날 우리는 오랜만에 깊은 우정을 확인하며 석별의 정을 아쉬움을 나누었습니다.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3,1)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가 예수님에게서 치유를 받은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요인은 친구들입니다. 이 병자는 주님께 죄를 뉘우치거나, 병을 치유해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의 자유 의지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고도 구원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오늘 “예”라고 대답하십니다(2코린 1,19).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여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실락원’이 가져온 ‘죄의 연대성’에 대응하는 ‘선(善)’의 연대성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아니 중풍병자도 친구들의 극성과 열성에 감동하여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 깊이 뉘우치지 않았을까요? 이런 의미로 지금 여기에서 성인(聖人)들과 통공(通功)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달려 있고, 동시에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이냐시오 로욜라).
예수님은 환자를 만나실 때 단지 외적인 상처나 증상만을 보지 않고 인간을 근본적으로 병들고 파괴하는 깊은 뿌리까지 돌보아 주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사실 죄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입니다”(키에르 케고르).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어린 아기’(teknon)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품는 친밀감과 사랑스러운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와 구원 경륜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도록 가르치고, 각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계획을 회복시켜 주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마르 2,2).
그래서 이 중풍병자를 하느님 안에서 지니고 있는 본래모습인 ‘아들’이 되게 하십니다(마르 2,5). 이 회복은 죄의 용서로 이루어지기에 예수님의 치유는 늘 인간의 신앙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영혼의 의사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심연, 곧 죄로 상처 입은 인간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마르 1,27.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