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 -월간 생활성서 2006년 3월호
2천년 교회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많은 영성의 흐름을 요약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꼭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신비사상의 기원을 찾다보면 '僞디오니시우스'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주후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 사도행전 17장 34절에 나오는 아레아파고 법정의 판사인 디오니시우스라는 이름의 저자가 <神秘神學>, <神名論>, <천제 위계론>, <교회 위계론> 등의 책을 냈는데, 이 저자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디오니시우스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그 사람 앞에 '가짜[僞]'라는 말을 붙였다. 그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종교적인 정화와 완성의 길을 활짝 펼쳐 보인 위대한 신비가이다. 그의 심오한 신학을 다루기 전에 먼저 <신비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신비주의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과 하느님과 인간 영혼 사이의 일치 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이론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신비사상은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된 종교 현상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는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경험하려는 뚜렷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신비가는 하느님에 관해서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한다. "절대적인 존재이신 하느님 그분만을 찾아 나서고, 그분 외의 어떤 존재에게 만족하지 않으며, 영혼이 갈망하는 대상이신 그분과 직접적으로 하나가 되려는 탐구, 이것이 곧 신비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앤드류 라우스, <서양 신비 사상의 기원>, 배성옥 옮김, 분도출판사, 2001, 16쪽).
하느님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게 된 의미와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창조는 하느님의 善性에서 비롯되니, 善은 존재의 자기 확산성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이 無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조론에서 이 '無'란 선하신 하느님이 당신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는 [無化] 자기제한을 통하여 당신이 지니신 내적인 생명의 온갖 풍요로움을 밖으로 발출함으로써 우주만물이 이루어졌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원천이며, 창조에 있어서는 하느님은 자신으로부터 나와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안에 내재한다. 창조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안에 있는 이데아(idea)들을 통해서 발생한다. 따라서 이데아들은 피조물의 모형들이며 모든 모형들은 천사들과 같은 천계와 교회 위계를 구성한다.
모든 존재하는 사물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기에 또한 궁극적으로 그분에게 귀환하도록 定向되어졌다. 디오니시우스가 보는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다. 즉 하느님은 인간이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기에, 하느님에 대해 인간이 알고 그분께 도달할 수 있는 지식은 긍정신학(상징신학), 부정신학을 통해서라고 한다.
하느님이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이유가 그분의 善性일 때, 이 善이 구체적인 형체를 취하고 보여짐은 아름다움[美]이다. 디오니시우스는 하느님을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이 우주를 하느님의 아름다움의 광채로 본다.
"초 본질인 아름다움은 미로 불리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물들에게 그것들의 본질에 따라 그 아름다움의 특성을 심어 주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물 속의 조화와 광채의 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빛처럼 사물들 위에 빛나고 그 빛나는 광채를 전달하여 그것들을 아름답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물들을 자신에게 부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아름다움으로 이름지어졌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물들을 상호 침투의 상태로 같이 끌어당기기 때문이다(神名論 IV, 7장)"
이 아름다움 자체, 美의 근원이 모든 사물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기에 美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여기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거울이요 상징이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하느님의 속성들을 보여 주는 聖事(sacramentum)와 같다. 이처럼 존재하는 사물들이 하느님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확실히 긍정한다는 사실에서 이를 '긍정신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사물들의 존재 이유가 하느님을 예배하고 찬미드림에서 하느님을 긍정하고 있기에 말이다. 디오니시우스가 '상징신학'이라고 말할 때 이는 '감각의 세계에서 택한 바를 하느님을 섬기는 데 쓰이도록 전환하는 것'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감각세계(물질세계)에서 보이는 개념들과의 類比(analogy)를 통하여 천상위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디오니시우스는 교회 내의 위계질서와 더불어 교회의 전례와 성사들이 하느님께서 가는 영적 여정에서 그 본질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디오니시우스의 하느님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파악하기 힘들고 알 수 없는 온전히 초월적인 분이시다. 긍정신학에서 다룬 존재하는 사물들이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속성들을 긍정하게 하지만,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고 표현하려고 할 때 우리는 커다란 한계와 벽에 부딪히게 된다.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성서의 진술들도 어느 정도 하느님의 유사성을 지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불완전한 표현들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에 관한 신성한 영역에 있어서는 부정이 오히려 진실한 것이며 긍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의 감춰진 뜻에 적당하지 못한 것인즉, 계시되는 내용과 닮지 않은 표상(상징들)을 통한 계시야말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더욱 잘 어울리는 것이다." (천상 위계론 II, 3장;141A).
그러므로 "모든 것을 부정하는 길이야말로 진실로 보고 아는 것이며, 만상 드높이 위에 계시는 그분을 초월적인 방법으로 찬미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손으로 동상을 만든 조각가들이 감춰진 형상을 분명히 볼 수 없게 만드는 군더더기 부분을 모조리 깎아내는 일과 같다.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이 환히 드러나게 되는 것은 이처럼 깎아 없애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신비신학 II ; 1025B)
디오니시우스는 이 부정을 통한 영혼의 상승을 말하면서 淨化의 길, 照明의 길 一致의 길을 제시한다.
"만물의 선한 원인(조물주)는 수많은 말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만 몇마디로 혹은 아무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참으로 감탙할 만한 사상이라고 여겨진다. 하느님 당신에 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어떠한 이해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께서는 존재를 모두 초월하여 계시며, 전례를 통한 축성과 淨化를 거쳐서 거룩한 산 최고 봉우리들 위에 두루 올라간 연후에 온갖 신비한 비추임[照明]을 받고 온갖 소리와 천상언어를 듣고 난 다음, 성경 말씀대로 만물을 초월하신 당신께서 계시는 그 어둠 속으로 들어선 사람들, 이들에게만 당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 주시기 때문이다. 거룩한 모세는 먼저 자신을 정화하도록 지시받았을 뿐 아니라 다음으로 그같이 정화되지 못한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오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정화의 과정을 모두 끝마치자 그는 우렁찬 나팔소리를 들었고 넓게 퍼지며 순수하게 맑은 광채를 내뿜는 수많은 빛을 보았다. 그러자 무리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오직 간택한 사람들과 함께 거룩한 산을 올라 최고 봉우리에 다다랐다. 그러나 직접 대화를 나누지도,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이시기에 그곳에서도 하느님을 뵙지도 못했다. 그곳은 다만 하느님이 계시는 곳일 뿐이다. … 그리하여 모세는 보이는 사물의 세계와 보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무지의 어둠, 진실로 감춰진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지식을 전해주는 어떠한 이해력에 대해서도 눈을 감아버린다. 모든 느낌과 이해가 완전히 초월한 영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한 세계에만 온전히 속하면서도 전혀 아무것에도 소속되지 않으며 자기도 아니고 남도 아닌 존재로서 자신의 가장 드높은 부분을 통하여 결코 알 수 없는 그 분과 힘들이지 않고 수동적으로 하나가 된다[일치]. 그는 지식 이해를 초월하는 의미로 하느님을 모름으로써(무지에 의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신비신학 I, 3L;1000B-10001A).
디오니시우스는 동방교회뿐 아니라 서방교회의 신학과 영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구체적인 예로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에 이르는 길을 정화-조명-일치의 세 단계로 보는 것이 영성생활 안에서 일반화되고 보편적인 원칙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의 부정신학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이 지닌 상징성 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설교28'에서 '마음의 가난'(마태5,3)을 '원하지 않는 것, 알지 않는 것,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해설한다. ……
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은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神化의 여정에는 자기를 부정하는 수덕의 삶이 필연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요구하셨다.(마태 16,24-28; 마르 8,34-38; 루카9,23-27).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길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자기포기는 하느님 안에서 무의 창조와 예수님의 자기비움에 의한 구원의 성취(필리2,6-11)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