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모성(母性)인 측은한 마음 -2006년 2월 12일
43년 간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던 마리안나와 말가리다 수녀님이 지난 해 말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한 가족처럼 지낸 주민들에게 헤어지는 아픔을 주기 싫다며 ‘사랑하는 친구·은인들에게’라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새벽에 남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두 수녀님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 큰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주민들에게 감사표현을 했습니다. 수녀님들은 환부에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늘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저는 수녀님들의 집에서 여러 번 피정을 하는 은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 없이 떠난 소록도의 두 천사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두 수녀님의 숭고한 사랑에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치유하시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환자에게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마르 1,41).
구약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자비)을 헤세드(hesed)와 라하밈(rahamim)이라는 두 표현으로 쓰고 있습니다. 라하밈은 ‘애간장’라는 뜻인데 그 어근은 rahem(母胎, 모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단어를 쓸 때(호세 11,1-8; 이사 49,14-19)는 하느님의 모성(母性)을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인 모성을 예수님의 측은한 마음에서 봅니다. 이 측은한 마음, 곧 애간장이 타는 마음은 예수님의 백성을 향한 착한 목자의 심정을 보여 줍니다. 이는 자기를 떠나 불행을 겪고 있는 상대편과 한 운명체가 될 정도로 이타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인 아가페(1요한 4,16)의 뿌리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고난받는 주님의 종으로서 나병 환자의 운명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마태 8,17). 그래서 예수님은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십니다(마르 1,45). 우리가 이런 주님의 마음을 닮는 길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이 가엾어 하는 마음을 다시 회복하고 키우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맹자(孟子)는 “지금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본다면, 다 놀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진심이요, 생각해서 얻는 것이 아니며, 힘써서 맞춘 것도 아니며, 하늘의 이치가 그러하다”고 갈파하였습니다. 얼마 전 에이즈 환자들과 함께 사시는 외국인 선교사 한 분을 만나 뵙고 크게 놀란 적이 있습니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나병이나 에이즈는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라 치료가 가능하므로 이런 병을 앓고 있는 분들에게 깊은 관심과 배려를 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