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길
강 훈 정
한 시절 눈부시게 뜨겁던 볕이
야트막한 능선 한편에 외로운 그늘 서너 뼘쯤 남아있는, 그리고
그 사이로 또 한세월이 가고 있다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앞뒤로 곧 지고 말 것을
단 한 번도 누구든 원망해 본 적 없는 어린 풀들에게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날 선 가위를 들고 허리를 굽혔다
주어지지 않은 자격으로 .
잠시 사랑했던 이름만으로는 될 수 없어
네 지나간 자리에 와닿는 것은 언제나 허전한 바람
억새풀 하나가 앞을 막는다
어제 같은 날인가해도 우린 어느새 멀리 와 있나 보다
아슬한 가지 끝에 서성이는 풀벌레들
이제 어느 처마에서 비를 긋겠나
참나무 늙은 돌배나무의 뒤틀린 그림자
설움에 눌리고 잘려나간 시린 등 허리는
어느 달빛에 하얗게 마를 것인가
자, 한 잔
눈물어린 것이 어디 술 뿐 이겠냐 마는
그래도 한 잔
2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