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목사 I장로..

2010. 6. 6. 오후 7: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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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날씨가 왔다 갔다 했었습니다. 7가지 색이 확실히 보이는 무지개를 여러번 봤으니 말입니다.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은 지서련이라는 가수의 "울고 싶어지는 오후"입니다. 가끔 울고 싶어지는 오후가 있습니다.
일이 정말 힘들거나, 갑자기 사는 것이 왜 이 모양인가 하는 생각이 밀려들 때 그런 기분이 듭니다.
 
정말 사랑은 양날을 가진 칼입니다. 아시아적 가치로 사랑은 한방향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느낀 바로는
이곳의 사랑은 양날을 가진 칼입니다. 거의 한방향으로만 휘두르는 칼과는 다르게 이곳은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게 아무 방향에서 나옵니다. 어쩌면 다양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노래를 들으면서 사랑이란 것이
양날을 가진 칼이란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전해들은 이야기이지만 제목의 이야기가 겹쳐지는 것이 무슨 조화인지..
 
전에도 가끔 제가 떠들었던 말 중에 역맛살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전생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은
우리 Y목사님 입장에서는 사탄이 들은 사람 이야기겠지만 혹시 우리 모두 전생에 호주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역맛살이 작동해서 다시 이곳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 하는 소설을
씁니다. 이 복잡한 인연들이 얽히고 섥혀 가슴 아픈 과거를 만들지 않았을까 괜시리 애꿎은 전생을 끌어다
붙여 봅니다. 그만큼 제 마음도 편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신부님이 아니라 목사님을 목자로 가지고 있나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물론 목사님들을 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훌륭하신 목사님도 많고, 득도의 경지가
무엇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시는 많은 스님들이 있기에 감히 다른 종교를 욕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그렇지만 우리는 엄연히 가톨릭 신자라 우리의 체계 안에서는 당연히 신부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끄셔야
합니다. Y목사라는 말을 들으면서 왜 그렇게 딱 들어맞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탁 때리는 것은 그만큼
저도 우리 공동체에 흐르는 가슴 아픈 과거가 이미 뼈 속 깊이 스며들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고 제가 경멸했던
개신교를 욕먹이는 목사들에게 한 것처럼  욕을 퍼부을 수가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한다면
I 장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울고 싶어지는 오후인가 봅니다.
 
결국 예전에도 예상했듯이 돈이 수면 위로 올라온 느낌입니다. 그래서, 더욱 울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성직자, 더구나
개신교 목사님들과 다른 신부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신앙 속에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그분만을
붙잡고 사시는 경건한 분들이 순수하고 정직하며 깨끗해 그분 곁으로 우리를 사심없이 이끌 것을 믿기에 그렇다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만카라를 하신 신부님께서 목사님으로 변신을 하시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많아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지만 과연 이렇게 속절없이 I장로에게 당하면서 그분의 뜻대로만
외우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묻습니다. 무언가 행해야 한다면 또 다른 아픈 역사를 만드는 것이라 상처를 안 내며
과연 어떻게 해야 해결할 수 있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그냥 울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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