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大望) [終]

2010. 4. 13. 오후 2:26:38

글자
그러나 군사 규모는 대등했지만 서군은 이에야스 같은 유능한 지휘자가 없어 패하고 말았다.
그 싸움에서 서군에 가담했다 영지를 몰수당한 가문의 많은 가신들이 또 떠돌이 무사로 전락했고
싸움만이 살길인 그들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고 소란과 소동을 획책하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전란의 뿌리가 그처럼 계속 살아 움직이면 언젠가는 또 싹이 자라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10년쯤 지나 전란의 싹이 크게 자라자 이번에도 히데요리 가신들이 죽음과 멸망의 신을 불렀다.
측근 중신들이 히데요리를 부추겨 망동을 부린 것이지만 싸움 경험이 없는 젊은 철부지들이었다. 
히데요시가 물려 준 엄청난 황금으로 군사를 모아 빼앗긴 천하를 찾겠다는 것인데.
아무튼 때를 기다리던 이름 있는 떠돌이 무사들이 출세를 위해 오사카 성으로 대거 모여 들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대장도 없이 오합지졸에 불과한 그들이 이에야스의 정예군을 어찌 당하겠는가.
후에 '오사카 여름전쟁'이라 불리는 그 싸움은 싸움이라 할 것도 없이 하룻만에 끝났다.
하지만 전쟁에서 살길을 찾지 못하면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떠돌이 무사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그처럼 죽음을 각오하면 강한 군사가 되는데다 이번에는 유능한 총대장이 지휘했다.

그들이 그 해에 재차 도발한 '오사카 겨울전쟁'은 여름전쟁과 달리 대등한 싸움이었고 치열했다.
이에야스와 히데타다 부자가 위기를 넘긴 그 경우를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해야 할듯.
두 부자가 위기를 모면한 것은 순전히 '운' 이고 '전쟁의 신' 이 있어 도왔다고 할 수밖에는...
그리고 만일 부자 중 한 사람이라도 죽었다면 일본 역사는 크게 다르게 진행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전쟁에서 초반전의 승리가 중요한 이유는 전군의 사기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전략가인 이에야스였어도 그 싸움 초반은 그의 작전과 전략이 통하지 않았다.
주요 동군 무장들이 이길 싸움이라 하여 그가 계획한 작전명령을 철저하게 따르지 않은 반면
서군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을 각오로 싸워 초반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처음부터 서군이 난전을 유도하자 경험 없는 무장들이 그들 전략에 속아 동군끼리 싸움을 벌였고
서군의 맹공격에 아군이 고전하면 당연히 도와야 함에도 군사를 아껴 모른채 한 무장들도 많았다.
이에야스의 본진 역시 전세가 불리한 속에 지나치게 전진하여 싸움터 중심부까지 진출했는데
싸움이 당초의 작전대로 진행되지 않아 일부러 위험 속에 뛰어든 상황이 된 것이다.

당연히 서군은 이에야스의 본진을 집중적으로 공격했고 본진 호위군들도 결사적으로 방어했지만
공격군은 전쟁 승패를 떠나 이에야스 목만 베면 죽어도 좋다는 서군대장 직속의 정예군인 것이다. 
이에야스 직속 호위군도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였으나 본진을 떠나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만큼 서군의 공격이 맹렬했다는 뜻이고 마지막 호위군마저 떠나 결국 이에야스 혼자 되었는데...

이에야스 본진의 위태로운 상황을 연락받고 쇼군 본진의 호위군들이 깜짝 놀라 황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쇼군 가까이 있던 아군들이 모두 전투 중이어서 이제는 쇼군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단 한 사람 일본 제일의 병법자 야규 무네노리가 곁에 있었지만 그 혼자 많은 적을 막을 수는 없다.
그가 쇼군을 알아 보고 덤벼든 서군 무장 7~8명을 베었을 때 다행히 호위군들이 돌아왔던 것이다.
두 부자의 무방비 상태는 약 15분쯤... 서군은 그 기회를 놓쳐 겨울전쟁을 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1615년의 그 전쟁을 마지막으로 근세의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때까지 전쟁이 없었다.
이에야스의 위대한 업적인 평화시대 250년은 1603년부터 1853년까지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말하며
그 1853년에 대포로 무장한 미국 군함 4척이 일본에 와서 위협한 사건이 있었다.
외국 상선의 입항을 선별적으로 허가해 온 막부에게 개항을 강요하며 무력으로 위협한 것이다. 

막부는 대포 20문씩 장착된 거대한 군함 4척의 무력 시위에 굴복하여 개항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 일을  '구로후네 사건' 이라며 수치스럽게 여기지만 오히려 그 개방으로 발전하게 된다.
새 시대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 흐름이 몇 년 후 '명치유신' 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즉 천년 이상 봉건 영주들이 지배하던 막부정치가 끝나고 천황 중심의 정치체제로 바뀐 것이다.
이에야스가 세운 도쿠가와 막부시대(에도시대라고도 함)에는 오사카 전쟁이 마지막 전쟁이었다.

 

대망에는 이처럼 많은 내용들이 들어 있으며 이 외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내용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독자들은 완독하는데 족히 몇 달은 걸려야 하는 약8천 쪽 분량의 소설인데
단순하게 이에야스의 처세술만 논한다면 읽은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물론 독자마다 취향이 다를 수밖에 없지만 방대한 초대하 소설이므로 얻고자 하면 얻을 것이 많다.
나의 이 간추린 내용이 대망 독자들에게 다소라도 도움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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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주군(主君)은 아직도 오다와라 성에 있느냐?"  라는 일본 격언에 대한 이야기.

원래는 "주군은 아직도 회의만 하고 있느냐?" 인데 누군가 잘못 올린 것 같다.

 

오다 노부나가가 갑자기 죽은 후 히데요시가 일본 천하를 잡을 무렵
그 당시 전국의 영주들 모두가 히데요시에게 인질을 보내 사실상 무릎을 꿇은 상황이었으며
이에야스도 둘째 아들을 히데요시의 양자로 보냈으나 실은 인질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한 편으로 만들기 위하여
40 넘은 늙은? 여동생을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 처남 매제 관계가 되었다.

 

당시의 아내들은 33세 넘으면 액년이라 하여 남편 가까이 가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그 혼인은 자신의 명령에 따를 수 있는 명분 즉 이에야스의 체면을 세워 준 것이었다.
그때 여동생 남편은 이혼 즉시 할복하여 뒤 끝을 깨끗이? 했는데
히데요시가 그처럼 무리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에야스의 존재가 만만치 않았음을 뜻하고
그에는 또 호조 가문을 정벌하려는 속샘도 있었다.

 

즉 이에야스의 미카와 도우토미 스루가 영지와 호조 가문의 광대한 영지가 이웃해 있었고
이에야스가 호조 가문 우지마사의 후계자 우지나오에게 딸을 출가시켜 사돈 관계였다.
그 때문에 이에야스와 우지마사가 서로 힘을 합치면 히데요시도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먼 간토로 영지를 이동시켰는데 그 배경에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간토 주(州)는 기존의 이에야스 영지보다 거의 두배 넓었지만 그 대신 황무지가 많았다.

 

그러나 영지를 이전했더라도 사돈과 사위 관계가 변할 리 없는 일.
이에야스는 시대 변화를 암시하며 우지마사에게 상경하라고 권했으나 우지마사는 듣지 않았다.
물론 상경 권유는 히데요시에게 굴복하라는 뜻이다.
호조 가문은 남 북조와 가마쿠라 막부 이래 명문이라며 졸개 출신 히데요시를 항상 비웃었다.
그런 비천한 자에게 결코 무릎 꿇을 수없고 또한 어떤 공격도 막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호조가문의 거성 오다와라 성이 천연의 요새에다 주변의 견고한 여러개 성으로 둘러 쌓여 있고
수하에 용맹한 장수들이 즐비한데다 비축식량도 충분하여 몇년을 싸워도 자신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설사 위험에 처한다 하더라도 사돈인 이에야스가 사위를 모른 채 하겠는가.
최악의 경우 이에야스가 적절히 화해를 주선해 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 때 화해하면 체면도 서고 싸워 패한 것이 아니므로 가문의 명예가 계속 유지된다. 

그러나 주군(우지마사)의 친 형제들과 누대의 중신들 대부분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세상은 변했고 떠 오르는 해와 같은 히데요시를 누구도 당할 수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워낙 주군의 뜻이 확고하고 고집 또한 강하여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형편이었다.
주군 형제들이 목숨 걸고 간하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자신의 성에 유폐되다시피 한 것이다.
친 형제들도 중신 신분이지만 여타 중신들보다는 물론 월등한 위치에 있다. 

이에야스를 생각하여 출병시기를 늦추었다가 여의치 않음을 눈치 챈 히데요시는 곧 출병했다.
그러나 대군이 오다와라 성에 도착하려면 거리가 매우 멀어 많은 시일이 소요될 수밖에 없고
게다가 이에야스가 아직 완전히 포기 하지 않고 있음을 아는 터라 서두를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여러 측실들과 함께 길 주변의 명소에 들리는 등 유유자적 유람하는듯이 진군했다.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우지마사의 항복을 바라기 때문이었다.

공격군이 차츰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여러 전령들을 통해 각 성마다 전해질 것은 당연.
하지만 각 성주들은 구름처럼 밀려오는 히데요시의 대군을 방법이 없다.
호조의 전군이 6~7만이지만 성안의 늙은이들까지 포함한 숫자인데 적군은 15만 정예군이었다.
게다가 일본 전쟁역사 통털어 성곽공격의 명수로 이름을 떨치는 히데요시 아닌가.
오다와라 성이 난공불락이라 소문난 성이라 해도 그 명성이 과연 히데요시에게 통할런지...

문제는 오다와라 성보다 그 주변의 성들과 그 성을 지키는 성주들에게 있었다.
그 성들은 그처럼 엄청난 대군을 맞아 싸운 일도 없고 또 싸울 수 있게 축조된 성도 아니었다.
끝까지 버티다가 안 되면 오다와라 성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함께 하라는 주군 명령인데....
일이 주군 뜻대로 되면 다행이지만 성이 함락되면 가문이 멸망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호조 가문의 가신들은 자신들은 어찌되든 상관없으나 가문만은 존속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적군은 점점 가까이 쇄도해 오고 있고 오다와라 성 주군에게선 아무런 기별이 없다.
싸우면 패할 것이 뻔하고 가문 멸망까지 예상되는데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계속 주군에게 전령을 보내 보지만 가지고 오는 답은 항상 똑 같다.
오늘도 역시 측근 중신들과 회의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회의를 하는 것이 아니고 측근들과 매일 마지막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지만....

주군 우지마사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할 정도로 바보 무장이 아니다.
이에야스의 마지막 전갈을 듣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이었다는 것과 때가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가문의 명예와 체면 때문에 뜻을 번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죽어도 후계자 우지나오만은 이에야스가 조처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성주들이 보낸 전령을 적당히 일러 보내라 하고 문 닫고 일체 만나주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전령들은 돌아가서 보고하기를 '계속 회의 중이시라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였고
그러다가 똑 같은 답변을 계속 보고하기 민망하여 머뭇거리는 전령에게 성주가 먼저

"주군은 아직도 회의만 하고 계시느냐?"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므로 계속 회의만 하다가 가문이 망했음을 조롱했고
그것이 후세까지 전해져 오늘도 어리석음의 대명사인 유명한 격언이 된 것이다.
그 후의 일을 궁금히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오다와라 성은 결국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항복했으며 우지마사와 주요 중신들은 할복했다.

 
후계자 우지나오는 이에야스 덕분에 살았지만 평민 신분으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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