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샘물21/병자성사

2009. 1. 25. 오후 9:20:41

글자
 
 
<병자성사>
 
1.병(고통)의 상황과 의미
 
  질병이란 인간의 출생, 성장과 성숙, 노쇠와 죽음과 같이 인류의 원초적 체험에 속한다.
 
 구약에서는 인간의 죄를 그 원인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왜 의로운 사람이 가난과 고통 속에 살다가 일찍 죽으며, 불신자들이 오히려 잘 살고 더 오래 사는가 하는 질문 앞에 이 해석도 힘을 잃는다.
 
 이에 대해 예언자들은, 쇠가 불 속에 단련을 받아야 더 단단해 지듯이 인간도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더 단단해 진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교육적 가치 이외에도 고통은 죄의 보속일 수 있으며, 회개로 이끄는 계기도 되고, 모세와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다른 이의 죄를 대신하여 중재 속량하는 기능도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신약에 이르러 고통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먼저 그리스도는 고통의 승리자로 나타나시는데, 병자의 치유, 죽은 자의 소생과 같은 일화들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과 죽음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하느님의 영광과 업적이 드러나는 계기로 삼으시면서, 고통의 순간을 축복의 순간으로 변모시키신다.(요한9,1-3)
 
 고통과 질병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으로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하는 기차와 같은 것으로 해석된다. 고통에 대한 이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가 이해 못할 신비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성서도 고통의 원인과 그 해결을 설명하지 않고, 고통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데 그치는 것은 바로 이 고통이 갖는 신비성 때문이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이러한 고통 앞에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며, 이로써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로마8,17-18) 이러한 의미에서 질병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의 참여로 생각할 수 있고 또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 앞에서 다음과 같은 겸손된 질문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주어진 고통의 의미는 무었이며, 하느님은 이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실까?"
 
고통의 문제는 결코 개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의 고통에도 관심을 갖고, 그 고통에 어떤 식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한몸이기 때문이다.
 
 2. 예수님과 병자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에게 특별한 동정심을 갖고 도와 주셨다. 복음서 여러 대목들은 예수님께서 고통에 시달리는 자들을 보시고 얼마나 깊이 동정하고 자비를 배푸셨는지 또 그들을 도와주고 치유해주셨는지를 잘 보도하고 있다.
 
예수께서 도시와 촌락을 두루 다닐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왔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자들을 데리고 와서 그의 발 앞에 눕혀 놓았다.(마태4,24:루가4,4:요한6,2)  예수께서는 고통을 당하는 자들과 병자들과의 연대의식을 갖고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래서 최후심판에 대한 언사에서(마태25,31-46)그러한 자들에게 해준 친절봉사와 모든 도움과 혹은 그 반대로그러한 도움을 거절한 것을 바로 자신에게 한 것으로 직결시키고 있다. "너희가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의 형제에게 한 것(안한 것)은 바로 나에게 한 것(안한 것)이다"(마태25,40.45) 또한 이와 관련해서 병자를 위로해 주고 도와주는 병자방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밖에도 당신 제자들에게 병자들 위에 안수해주고(마르16,18) 그들에게 기름을 발라주며(마르6,13)병을 고쳐 주라는 위임과 권한을(루가9,1-3)부여했다. 사도행전에는 제자들이 예수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 예수의 이름과 권위로 병자들을 고쳐주었다(3,1-10;5,15-16)고 전하고 있다.
 
 초기 사도 공동체가 병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특별한 의의에 대하여 야고보서 5장14-1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여러분 중에 앓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원로들을 청하십시오. 원로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는 앓는 사람을 낫게 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지은 죄가 있으면 그 죄는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동체와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위임한 것을 그의 의도에 따라 계속 수행하는 것이다. 기름 바르는 행위(희랍어로는 안수하는 행위를 가리킴)와 병행되어 표현된 신앙의 기도는 육체적 및 영신적 구원과 회복, 경우에  따라서는 죄의 사함도 이루어 주었다.
 
 여기서 확실히 할 것은 죽음에 임박한 임종자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앓는 병자에 대한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병자들을 공동체의 직무 수행자들인 원로들에게 데려간 것이지 어느 카리스마를 지닌 자들에게 데려간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병자를 위한 이 직무는 곧 교회의 직무수행이다.
 
3.병자의 성사
 
 병자성사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분명히 밝혔듯이 병자와 허약자를 위한 성사이다. 따라서 병과 노쇠로 위험상태에 있는 이들이 이 성사를 받도록 주의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환자의 친척과 친구들은 특히 중병의 경우에 사제를 불러 환자를 돕는다든지, 환자가 이 성사를 가치 있게 받도록 준비시킬 의무가 있다.
 
 수세기 동안 죽음에 임박한 중환자만 이 성사를 받게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 성사를 '종부성사' 즉 '마지막 도유'라고 불렀으나 교회는 이 병자성사가 좀더 널리 이용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종부"는 더 적절히 표현하자면 '병자의 도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죽을 위험에 임박한 이들만을 위한 성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병이나 노쇠로 죽을 위험이 였보이면 이 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시기가 된 것이다."(전례헌장 73항)
 
 그러므로 병자가 죽음 직전에 있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과연 병세가 위중한지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세심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개연적 확실성만으로도 충분하다. 병자가 이 성사를 받은 후 건강을 회복하였다가 다시 병들었을 경우라든지 또는 동일한 병세가 계속되다가 중태에 빠지게 되는 경우에도 반복해서 실시 할 수 있다.
 
병자들이 비록 의식이나 이성의 활동을 상실하였더라도 의식이 있으면 믿는 마음을 가지고 아마도 병자성사를 청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그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다.
 
 사제가 병자에게 불려갔을 때 병자가 이미 임종하였을 경우, 사제는 그를 위해서 하느님께 그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자비로이 천국으로 받아 주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지만, 병자성사는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병자가 확실히 죽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의심이 날 경우에는 조건부로 이 성사를 줄 수 있다.
 
4. 병자성사 예식
 
 병자성사에는 인사, 개회식, 참회식(고백성사로 대치할 수 있다)으로 시작한다.
 말씀의 전례가 그 다음에 오는데 적당한 독서를 하면 된다. 강론을 하고 그 후에 성사를 준다. 먼저 참석한 사제 모두가 안수한다. 그리고 성사 집행자가 병자의 이마와 양손에 혹은 급한 경우에는 이마나 몸의 아무 부분에 기름 바른다. 성유를 바르는 행위가 안수이기도 하다.
특히 이 기름 바르는 예식과 그것에 따른는 기도가 성사적 표지이다.
 
 "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 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아멘" (병자성사 예식서 76항)
 
 병자의 도유예식은 환자를 위한 특별기도로 끝을 맺고 주의 기도, 혹은 영성체와 강복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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