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료와 자신의 발견 2-김정규 (스크롤의 압박2)

2011. 5. 1. 오전 5:35:36

글자

누가 나를 받아들이겠어요?


필 자의 한 내담자는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사람인데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좀처럼 잘 안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지 물었더니 놀랍게도 하는 말이 "누가 내 이야기를 오래 들어주겠어요?"라고 반문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들어보니 어릴 적 어머니가 늘 자기에게 힘든 하소연을 많이 했는데 항상 듣기가 지겨웠지만 싫단 말을 못했다고 한다. 가족의 이야긴데도 듣기가 지겨웠는데 남의 이야기를 누가 들어주겠느냐는 것이다.


그 녀는 자신의 과거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projection)'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경험을 타인의 경험으로 착각하는 현상이다. 그녀는 이야기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는 도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에서는 이 도식이 사실을 잘 반영해주었다고 하겠는데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안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딸에게 하소연하기만 했지 반대로 딸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안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기는 더욱 쉽다.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인 어머니가 자기를 안받아주었는데 누가 자기를 받아주겠느냐는 것이다. 이것 역시 자신의 과거경험을 현재에 적용시킨 투사라고 하겠다.


한 편, 이 내담자가 실제로 타인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보고 잘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지 검증을 해보면 과거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문제는 대부분의 내담자들이 다 그렇지만, 이 내담자도 현실검증을 해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며 둘째로 그런 시도가 매우 위험하게 느껴져서 이를 적극 회피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주변에서 그녀를 잘 받아주는 사람들이 분명히 많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사람들이 분명히 자기에게 호감을 보이고 잘 받아주는데도 그녀는 그것이 받아주는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 순간에 그녀는 마치 머리 속에 들어있는 오래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머니에게 다가갔을 때 어머니가 눈쌀을 찌푸리며 밀쳐내던 장면의 필름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누가 나를 받아주겠어요?"라는 말을 매번 만날 때마다 되풀이하는 것이다.


지 금 그녀를 괴롭히는 것의 정체가 무얼까? 그녀의 어머니일까? 아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금 많이 달라지셨다. 그러면 왜 아직도 그녀가 고통을 겪고 있을까? 과거의 그녀의 어머니가 원인일까? 그것도 아니다. 과거의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무엇이 그녀를 지금 괴롭히고 있을까? 그것은 그녀 자신이다.


과 거의 어머니를 마음속에 보관하고서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자기 자신이다. 즉,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너는 귀찮은 존재다. 너를 받아줄 수 없어. 나는 피곤해!"라는 말을 들려주고 있다. 오래된 필름을 계속계속 돌리면서 자기를 현재와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다.


해 결책은 그녀가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것을 멈추고 성숙한 어른의 시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정말 자기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인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인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어머니의 시각이 아닌 어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사랑스런 아이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동자와 그 아이의 사랑받고 싶은 마음, 어머니에게 안기고 싶은 욕구들이 그대로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진다. 그것을 받아주지 못한 어머니가 안타까웁지, 아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들 수가 없다. 그러면서 사랑받지 못해 외로웠던 아이를 쳐다보며 한없이 애처로운 생각이 들며 꼬옥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필 자와 대화를 하면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아이를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 아이에게 어른으로서 무슨 말을 해보라고 제안했더니 그녀는 "얘야! 참 힘들었겠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었니? 그동안 너의 존재를 내가 외면하면서 살아온 것 같애. 미안해!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내가 잘못했어. 네가 뭘 할 수 있었겠니? 그저 외롭고 힘들고 그래도 아무도 안 알아주고 버려진 존재였지! 그런데 있잖아! 내가 너한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어! 너는 사랑스러운 존재야. 비록 어머니가 너를 받아주지 않았지만, 넌 정말 사랑스런 존재야! 이제부터 내가 너를 받아줄께!"


자 신이 막고 있는 것만 거두어들이면 세상은 열려져온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보내고 있는데 다만 우리가 그것들을 막고 있기 때문에 못 받아들이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우리는 타인들로부터 어릴 때 받았던 거부 같은 것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증오와 미움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때로는 우리가 사람들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사람과 사람들을 잇는 사랑의 힘이 더 강하게 받치고 있기 때문에 장애를 넘어서 우리의 사랑의 힘이 서로 전해지고 통해진다고 믿는다.


그 러기 위해 내가 해야 될 일은 먼저 스스로 막고 있는 나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타인이 나에게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 이다. 그러면 봇물처럼 사랑의 에너지들이 밀려들어 오고 또한 나의 내면의 창조적 에너지가 밖으로 뿜어져 나올 것이다.


타 인이 내게 들어올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막연한 이야기도 추상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다. 예컨대, 타인이 나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 나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나에게 친구가 되고 싶은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 같은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다. 지금껏 우리는 그런 것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타인을 거부한 것이다. 이제 내가 나를 받아들임으로써 타인이 내게 들어와 친구가 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남이 보면 뭐라고 그러겠어?


내 가 나를 막는 것이 나의 비극이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으면서도 남이 어떻게 볼까봐 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길가다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어깨춤을 추고 싶었지만 남이 어떻게 볼까봐 내가 나를 가로막지 않았던가? 때로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내 심정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봐 나를 가로막지 않았던가? 때로는 친구를 만나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울고 싶은 때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봐 나를 막지 않았던가? 결국은 아무것도 못하고 허전하고 공허한 가슴만 안고 밤거리를 헤매어 다니지 않았던가?


우 리의 불행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기도 전에 매번 좌절당하는 데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나를 좌절시키는 것이다. 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행동에 옮기기 전에 한번 생각해봐! 남이 보면 뭐라고 그러겠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여 기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의 생각이라기보다는 타인이 비웃을 거라는 나의 생각이다. 사실 타인은 그렇게 나쁘게 안 볼 수도 있다. 설령 염려한대로 좀 나쁘게 보는 타인이 있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은 실제 타인의 생각보다는 타인이 나쁘게 볼 것이라는 생각과 그로 인한 두려움이다. 물론 이러한 두려움은 각 개인이 과거에 겪은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과거에 중요한 타인(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아프게 거부당한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런 두려움이 더 크고 따라서 타인을 의식해서 자기를 제지하는 행동을 더 많이 한다.


지금 나 아마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타인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다는 뜻인가요?" "타인의 시각은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요?"

그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할 때는 타인의 시각이 아닌 나의 욕구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타인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고 싶다면 나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치 타인이 내가 익숙하지 않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무조건 내 시각에서 좋다 나쁘다 평가하지 말고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내 가 하는 행동을 내가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 하고 싶으냐 하고 싶지 않으냐가 아니라 타인이 어떻게 볼 것 같으냐에 맞추어 하다보면 나는 없어지고 타인만이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생각하는 타인'만이 남게 된다. 즉, 사람은 없어지고 관념만이 남아 나를 지배하게 된다. 그것이 실존적 공허이고, 우리 불행의 본질이다.


대인관계


사람들에게 못 다가가겠어요.


필 자의 한 내담자는 사람들에게 잘 못 다가가겠다고 말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물었더니 "내가 완전해야 상대가 나를 받아들일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너무 허술한 데가 많아서 안 받아들여질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오히려 허술한 데가 있어야 사람들이 더 편해하지 너무 완전하면 불편하게 느낄 것 같다라는 말을 해주어도 그녀는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 되지만 감정적으로는 여전히 완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 녀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바로 이런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이 드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온 교육도 그렇고 사회제도도 그렇고 우리가 완전해져야만 인정해주겠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고, 실제 그런 척도에 의해 우리의 존재가 날마다 평가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완전해지는 어느 날,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 누구로부터 완전한 인정을 받게 되는 날 환상적인 행복에 도달할 것이라는 꿈을 좇아 끝없이 허덕이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노새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그렇게 허덕이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것은 어떤 절대 행복이 저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필요했던 그리고 가능했던 최소한의 행복이 유보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그렇게 목말라하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그러한 행복을 주지 못한 사람들(부모나 사회)이 그 이유를 우리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 거짓말이란 "네가 조금만 더 착한 아이가 되어준다면, 조금만 덜 애를 먹인다면, 조금만 더 조용히 앉아 있는다면, 조금만 덜 징징댄다면, 조금만 더 열심히 공부한다면 등등등, 언젠가는 내가 너를 사랑해줄께. 내말 믿어!"와 같은 말들이다.


우 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판단력이 전혀 없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이런 말을 끊임없이 듣고 자랐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깊이깊이 뇌리에 박혀있어 이를 의심할 생각은 감히 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거부당하거나 상처를 입을 때 얼른 먼저 드는 생각이 "아! 내가 잘못했겠구나. 내가 조금만 더 착했더라면,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상대가 내게 그러지 않았을 텐데!"라는 말이다. 그것은 명확히 상대가 잘못한 경우조차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내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서워지는 것이다. 내가 완전해야 한다는 신화가 깨어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나에게 완전을 요구하는 새디스트로만 지각될 것이다.


그 런데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은 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여린 가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누구나 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를 잘못 가르친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두려움에 휩싸인 채 힘들게 살은 사람들이다. 어쩌면 자식들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차갑게 대한 것도 자기 자신도 사랑에 목말라 허덕이면서 채워지지 않은 갈증에서, 끝없는 절망에서 아이들에게 짜증을 부리고 아이들을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그 러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언젠가 내가 완전해지면 사람들이 나를 받아들일 것이고 그러면 내가 천국에 들어갈 날이 올 것이라고 믿으며 헉헉대며 나를 계속 몰아 부칠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 길을 계속 갈 수는 없다. 이제 방향을 돌아서야 한다. 우리가 모두 한 배에 탄 공동체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무엇을 더 기다릴 것인가?


내 가 완전해진 다음 사람들에게 나아가겠다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 나아가야 한다. 부족한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보는 것이다. 무엇이 벌어지는가를. 사람들이 나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는 순간 나는 느낄 것이다.


" 여기에 삶이 있구나! 바로 지금여기에!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들, 언젠가는 만나겠지! 언젠가는! 하고 목말라 그리워했던 것들이 지금여기에 다 와 있구나! 그토록 그리던 따스한 미소, 따스한 눈빛들, 그것들이 지금여기에 다 와있구나!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아무 준비도 없이 왔는데도, 나를 기뻐해주는구나! 그냥 내 존재를 기뻐해주는구나!" 하고.


거절을 못하겠어요


친 구가 전화를 하면 한두 시간씩 전화를 상대해주어야 하는 데 그것이 지긋지긋하면서도 이제 그만 끊자는 말을 잘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더욱 지겨워지고 이제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으며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왜 적절한 순간에 대화를 중단하지 못하는지 물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으니, 그러면 친구가 자기를 싫어할 것이 뻔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 녀에게 가까운 사람의 의미는 싫어도 받아주고 참아주어야 하는 관계로 개념형성이 되어 있는 것이다. 즉, 자기가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유지되는 그런 관계다. 그녀에게는 자기가 힘든 일을 털어놓고 이해받고 받아들여지는 그런 의미에서의 가까운 사람의 개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이란 오히려 부담만 주는 관계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는 아니다. 그렇게 살면 얼마나 힘들지 상상이 된다.


정 말 친한 관계라면 힘들 때는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은 관계인데, 그런 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녀로서는 그런 것이 히말라야 산속에 사는 사람이 바다를 상상하기 힘든 것만큼이나 이해가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머리의 문제라기보다는 가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체험을 통해서 배운 것은 저절로 이해가 되지만 설명을 통해 들은 것은 돌아서면 아리숭해진다.


그 런데 거절을 잘못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다. 이는 우리 문화의 영향이기도 하다. 거절하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중에 복수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 거절을 않거나 말끝을 흐려 확답을 안 하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그런데 필요한 순간에 거절을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앞 의 내담자 예에서 보는 것처럼 엄청난 고통을 겪을 수 있다. 상대방의 심한 행동에 대해 내가 거절을 못하면 내가 많은 고통을 겪을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좋지 못할 수 있다. 내가 힘들다는 말을 안했기 때문에 상대방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 일 힘들다는 말을 했으면 충분히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데 이쪽에서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도 모르게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정말 염치가 좀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쪽에서 힘들다는 말을 했으면 염치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뻔 했는데, 그 사람에게 좋은 학습의 기회를 박탈한 셈이 되어버렸다. 어느 모로 보나 적절한 자기표현은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부탁은 그 쪽 일 거절은 내 쪽 일


" 아니 그 사람 내게 어떻게 그런 부탁을 다 할 수 있어?" 하고 흥분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부탁을 한 사람에게 화가 나서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는 말이다. 그 사람이 어떤 부탁을 하던 내가 못 들어줄만 하면 안 들어주면 되는 것이지 화가 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그가 나로 하여금 거절해야 되는 입장에 처하게 만든 것에 대해 화가 나는 것이다.


그 런데 그게 왜 화가 날까? 그것은 내가 거절하면 상대가 나에게 화가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내가 부당하게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대개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는 것은 이처럼 생각이 두 단계를 앞질러가기 때문이다.


그 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이다. 상대는 단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물어본 것일 뿐이고 나는 거기에 대해 있다 없다 라는 대답만 해주면 그만이다. 이때 상대가 나의 입장을 이해하고 물러서든 아니면 자기입장에서 생각해 섭섭해 하든 그것은 상대의 문제이다. 즉, 상대가 성숙한 사람이냐 미성숙한 사람이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 것은 그 사람이 책임져야할 몫이다.


이 때 나의 몫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는 것은 내가 거절을 잘 못하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한 사람이 원망스러워서 나타나는 감정이다. 그런데 내가 거절을 잘 못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책임져야할 문제다. 그런데도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나의 문제를 상대에게 책임 전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 여성



내 가 노우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정말 나를 싫어할까?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우를 잘 못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노우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심지어는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고 따라서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노 우를 잘 못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상대방에게 더 신경 쓰고 자신을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낀다. 그래서 노우를 잘 못하는 사람을 은연중에 경멸한다. 그래서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함부로 대해도 그런 사람은 항의도 잘 하지 못한다. 항의는 자신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상대의 행위에 대해 노우하는 것인데, 평범한 노우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과감한 노우를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사람은 타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여 성들의 경우에 노우는 특히 중요하다. 여성들은 어릴 적부터 순종적인 교육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상대방에게 노우라고 말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여성이든 남성이든 노우는 매우 중요하다.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이 노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내 허락 없이는 못 들어옵니다."라는 경계표시가 노우이다.


노 우가 분명할 때 예스가 정말 예스가 된다. 그것은 노우가 분명해짐으로써 내가 분명해지고, 내가 누구인지 분명해짐으로써 그 사람이 예스를 할 때 그 예스를 책임지는 주체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우가 분명하지 않을 때 내가 누구인지 주체가 불분명해지고, 그런 사람이 하는 예스는 책임질 주체가 불분명하므로 정말 예스라고 보기 힘들다.


그 러면 노우는 많이 할수록 좋은가? 그렇지 않다. 무조건 예스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 못지않게 무조건 노우하는 것도 문제가 많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아버지가 권위적이어서 싫었기 때문에 나이든 남자들만 보면 무조건 반발심을 가졌다. 그래서 상대방이 하는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리거나 때로는 쏘아주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위축되고 오금을 잘 펴지를 못했다. 그녀의 노우는 예스가 없는 노우로서 자기 울타리를 지나치게 많이 침으로써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더는 자신의 영역표시가 아니라 타인과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들이 그녀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결국 자신과 이성의 사이를 갈라놓고 만 것이다.


노 우는 필요한 곳에 노우라야 한다. 무조건 노우는 노우의 진정한 목적과 효용을 상실해버린다.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당한 요구나 힘겨운 부탁에 대해 자신의 내적 현실을 알리는 노우라야 한다. "다른 때는 모르겠으나, 오늘은 좀 힘들어요."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몰라도 매일 도와드리는 것은 부담스러워요!"라는 식의 노우라야 노우의 진정한 의미 가 드러난다.


진짜 노우와 가짜 노우

진짜 예스와 가자 예스


정 말 싫어서 노우하는 것이 진짜 노우이고, 사실은 좋지만 노우라고 말하는 것이 가짜 노우다. 후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끔은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가짜 노우도 쓸모가 있다. 하지만 자주 그리고 언제나 가짜 노우가 나오면 커뮤니케이션에 혼란을 가져다준다. 전자는 내숭이라고 봐주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왜 그렇게 하는지 잘 살펴봐야 한다. 아마 본인은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피드백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정 말 좋아서 예스하는 것이 진짜 예스고, 사실은 싫지만 거절을 못해서 예스하는 것이 가짜 예스이다. 여기서도 후자가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벼운 경우에는 별 문제가 안 되겠지만 심한 경우에는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어머니 때문에 한 내담자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사실은 자기는 수녀원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너무나 불행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결혼했다고 했다.


결 국 그녀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생활을 하느라 엄청난 마음고생을 했고 결혼이 몇 번씩이나 파경에 이르렀다.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몇 번씩이나 있었지만, 그것도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그냥 눌러 살았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의 기대에 대해 노우를 못해 결혼했고, 어머니의 기대 때문에 자신의 파산한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노우를 못한 것이다.


이해에 대하여


대 인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해다.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이해함으로써 서로 오해가 생기지 않고, 불필요한 갈등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마음을 잘 이해하면 우선 내 마음이 편하다. 사람들 중에는 상대방의 행동을 제대로 잘 이해하지 못하고 늘 왜곡해서 지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하면 우선 자신의 마음이 불편하다. 상대방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혹은 그런 의미로 한 행동이 아닌데 혼자 괜히 지나친 상상을 하여 스스로 불편한 마음을 만들어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다 음으로 이해를 잘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줌으로써 상대방에게 좋은 일을 하게 된다. 타인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 드문 세상에 이는 값진 이타적 행동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해는 타인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사람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고 호감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므로 이해는 서로간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어준다.


그 런데 이렇게 좋은 이해를 사람들은 왜 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받아본 경험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서로 이해해주고 이해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거나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우선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해보려고 해도 어떻게 하는지를 잘 몰라서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것을 넘어서는 행동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썩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 사람은 살아오면서 이해가 무엇인지 들어서 알고 있고 적게 많게 체험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무얼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과거의 영향이란 자신이 과거에 겪은 일들이 현재에 투사되어 나타남으로써 상대방을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예컨대, 어릴 때 계모 밑에서 자라며 무시를 많이 당한 사람은 상대방이 별 뜻 없이 하는 말을 자기를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다 음으로 잘못된 생각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잘못된 생각 두 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상대방을 이해해주면 내 생각이 틀리게 되기 때문에 이해해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종종 부부싸움이 끝이 안 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잘못이다. 상대방을 이해해준다는 것은 상대방의 주장이 맞다고 동의해주는 것과는 다르다. 이해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심정을 헤아려주고 알아주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경험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해는 내가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입장과 시각을 취해봄으로써 그의 심정을 이해해보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나 주장을 맞다고 동의해주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내 생각과 나의 심정을 포기하지 않은 채 얼마든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볼 수 있다. 그런 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해보면 누구나 그 효과를 금방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가 아니라 상대가 나의 마음(심정)을 알아주느냐 주지 않느냐이다. 상대가 최소한 내 심정을 이해해주려는 노력을 하는 것만 느껴도 우리 마음은 금방 누그러든다.


또 다른 잘못된 생각은 상대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데 내가 왜 상대를 이해해주어야 하느냐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도 잘못된 생각이다. 이해란 서로 공평하게 주고받아야 하는 그런 물건 같은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좀더 많이 이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손해 보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해는 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모로 이익을 보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기에게도 편하고 상대에게도 좋고 서로의 관계에도 도움이 된다. 그뿐만 아니다. 이해의 진정한 가치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이해를 함으로써 나의 보는 시각이 넓고 깊어진다. 이해를 못할 때는 내입장만 알았지만 이해를 하고 나면 상대방의 입장까지도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입장에서만 볼 때는 상대방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해를 하고나면 상대방의 존재가 보인다. 즉, 상대방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 어떤 심정인지가 보이게 된다.


한 편, 이런 이해와 관련해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 한 가지 있다. 사실 오랫동안 우리 문화권에서는 서구문화권에 비해 이해의 가치에 대해 상대적으로 훨씬 높은 의미를 부여해왔던 것 같다. 이것은 참 좋은 전통인 것 같다. 필자가 미국이나 구라파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 중에 하나가 그들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서로에 대한 이해 노력이 우리 문화권에 비해 훨씬 부족하고 또한 그에 대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미부여도 적다는 것이었다. 이점은 서구문화에서 매우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한편 우리 사회에서는 가끔 이해에 대한 가치부여가 지나친 나머지 윤리적인 압력으로 작용하여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생긴 힘든 문제를 윗사람에게 혹은 친구에게 털어놓을 때 흔히 듣는 말이 "네가 이해해라!"라는 윤리적 충고내지는 압력의 말이다. 이때 윗사람이 말하는 이해는 도덕적 명령이다. 이해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더더구나 어떤 압력에 의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는 내가 나의 문제가 많이 해결된 시점에서 성숙한 어른의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행동이다. 그것이 진정한 이해이고 또한 가치 있는 이해이다.


그 런데 "네가 이해해라!"는 말은 대개 아직도 그런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충고조로 하는 말인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효과가 없다. 듣는 사람의 반발을 살 수도 있고 설령 그 충고를 좇아서 억지로 이해를 시도한다고 하더라도 자칫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즉,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무시하고 억지로 상대를 이해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어 인격이 통합되지 않을 수 있다. 흔히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은 외면한 채 상대방을 이해하는 쪽으로만 치달아 오히려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사람들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솔직히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오해에 대하여


우 리는 누구나 오해를 받았을 때 마음이 상한다. 나의 진심을 몰라줄 때 혹은 나의 진가를 몰라줄 때 속이 상한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속상할 일이 아니다. 스스로 나 자신에 대해 확고한 마음이 있으면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이 문제가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해 때문에 심하게 속이 상하는 것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상대의 평가에 의해 나의 행복이 달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것이야말로 오해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이다. 결국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된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을 훌륭하게 생각하고 바르게 생각하면 설령 다른 사람이 오해를 하더라도 별로 큰 문제가 안 된다. 내 스스로가 나를 인정하기 때문에 타인의 오해가 나를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자신감이 나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대의 나에 대한 평가를 바꾸려고 애쓰는 것보다 나 자신을 스스로 정당하게 평가하고 신뢰하고 그 믿음 위에 흔들리지 않게 서는 일이 더 중요하다.


어 떤 의미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이 나를 오해할 때 마음속에 심한 갈등이 일어나며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판단할 때 문제는 풀기가 정말 어려워진다. 다른 사람과 오해가 생겼을 때는 그 사람에게 가서 해명하거나 안 되면 따지기라도 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나를 오해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런 오해는 내 속에 은밀히 숨어서 평생을 따라 다니며 시시각각으로 나를 괴롭힌다.


자 신에 대한 오해 중에 가장 자주 일어나는 것은 자신을 부당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앓는 것은 대부분 자기 자신을 오해하는 문제와 관련 있다. 예컨대, 타인들이 보기에 매우 따뜻한 사람인데 자신은 자기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타인이 보기에 매우 유능한 사람인데 자신은 자기를 무능하다고 보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 미인인데 자신은 못생겼다고 고민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등은 모두 자신을 오해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은 자신을 바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과의 올바른 대인관계를 맺을 수 없고 그로인해 심각한 심리적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 런데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이들은 언제부터 자신에 대해 이런 오해를 가지게 되었을까? 이들의 오해는 우연히 자기 혼자서 갖게 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 사람은 가족관계에서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이런 오해를 배우게 된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아이들의 실수를 어른들이 용납하지 못하고 이를 아이의 잘못으로 꾸짖는다거나, 그 자체로 한없이 사랑스런 존재인 아이에 대해 단지 아이들이 많다거나 경제적 여건 혹은 부모의 개인적 사정으로 아이를 충분히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를 거부하게 되고, 그것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 른이 되어서도 이러한 자신에 대한 오해는 지속되고 그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바꿀 수 있다. 어른의 시각으로 다시 냉철하게 생각하고 판단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을 바로 봄으로써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아무도 자기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 다가 가보라.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상대편이 반갑게 맞아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과 성, 결혼


사랑에 대하여


우 리 모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사랑이다. 삶의 목적이 거기에 있고 삶의 행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그리고 늙어서 노인이 되기까지 한 순간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사랑이다.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을 때 행복하다. 그것이 안 될 때 우리는 슬프고 허전하고 외롭고 마침내 절망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 너무나 적은 것이 사랑인 것 같다.


어 딜 가도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곳곳에 오해와 미움과 질투가 도사리고 있지 정말 우리가 받고 싶은 포근하고 따스한 조건 없는 사랑은 무척 드문 것 같다. 왜 그럴까? 애당초 우리 속에 사랑이 적기 때문에 그럴까? 아니면 사랑은 아주 소수의 사람만 갖고 있고 그것을 많은 사람이 얻기 위해서 경쟁하고, 결국 몇 사람만 사랑을 받고 나머지 대부분 사람은 상처받고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진실인가?


나 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가슴 속에 사랑을 가득 갖고 태어난다. 흔히 부모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아이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고 말할 정도로 아이들은 사랑을 가득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가 자기를 조금만 이쁘해 주어도 아이는 너무나 행복해하며, "엄마 사랑해! 아빠두 사랑해!"라고 말하며 목을 부둥켜안고 뽀뽀를 하며 부모에게 열 배 스무 배를 되돌려 준다. 아이들은 참으로 부자다. 부모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자기감정에 못 이겨 아이를 때리고 미워해도 아이들은 그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부모를 용서해준다. 그리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시 부모에게 사랑을 선물한다.


그 런데 왜 이 세상에는 사랑이 그렇게 없을까?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들로 숱한 상처를 입으면서 차츰 마음 문을 닫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 것만큼 아픈 것도 없는 것 같다. 그 상처를 치료받지도 못한 채 거듭거듭 상처를 받다보면 우리는 점점 사람들이 무서워진다. 그래서 또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 문을 닫게 되고 그러다보니 저마다 아픈 가슴들을 혼자 쓸어 담아 안고 외롭게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세상에는 사랑이 점점 없어지고 사람들 사이에 찬바람만 쓸쓸하게 불고 지나가는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직도 세파에 덜 시달린, 그래서 아직도 사랑이 남아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목마른 갈증을 풀려고 그 사람에게 달려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 렇다면 이 세상에는 정말 사랑이 메말라버렸을까? 이 세상에서는 이제 다시는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 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사랑이 가득하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한없이 용솟음쳐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집단 심리치료를 통해 그런 체험을 수 없이 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마치 화산 속의 뜨거운 용암 같은 사랑의 에너지가 항상 끓고 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깥부분이 바위와 흙으로 감싸져 있어 다만 사람들에게 안 보일뿐 용암은 뜨겁게 끓고 있다. 어쩌면 표면의 껍질들이 속의 용암을 잘 보호해주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뜨거운 용암의 일부분만이라도 밖으로 뿜어낼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해질까 생각해본다.


사 람들은 저마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조그만 화산들을 다 갖고 있다. 그것을 부지갱이로 쑤셔서 조금만 밖으로 끄집어내면 따스한 화롯불이 될 수 있는데도 그것이 안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두려움 때문이다. 즉, 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지만 그것이 거부당할까봐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묻어버리고 덮어버리고 살자고 마음먹어버린다. 외롭고 슬프지만 그래도 그것이 아픈 것보다는 나으니까라고 생각하며.


사랑을 무서워하는 사람들


그 렇게 마음먹고 단념하고 살고 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기대 없이 살고 있는데, 잊고 살다보니 그런대로 그런 삶에 익숙해져 이렇게 살아도 되겠구나 나름대로 편하다고도 생각하며 살고 있는데, 누가 당신에게 애정과 관심을 표현해온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처음엔 "이게 무언가? 내가 잘못 본거겠지." 하고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한 걸음 더 다가와서 애정을 표현한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은 당황되고 어찌할 바를 모를른지 모른다. 아마 계면쩍어 외면하는 몸짓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상대방이 아직도 당신 곁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좀 짜증이 나고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갑자기 퉁명스럽게 상대를 쏘아주거나 아니면 더 심하게 노골적으로 상대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당신은 사랑이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당신은 상대방의 애정표현에 무언가 위협을 느끼고 그런 반응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그들을 놀라게 만든다. 사랑은 그들의 억눌렸던 슬픔과 고통, 분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런 것들을 억누르고 있던 상태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익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편했다. 그런데 사랑은 그런 편안한 마음에 평지풍파를 일으키므로 무섭게 느껴진다. 상대방의 애정이 자기가 지금껏 쌓아온 벽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불 란서 마르세이유 항 앞바다의 섬에 있는 샤토디프라는 중세시대의 감옥이 있다. 이 감옥은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악명이 나있는 곳이다. 이 감옥에서 50년간 감옥살이를 해온 사람에게 어느 날 감옥문을 열어주었을 때 그는 갑자기 찾아온 자유에 놀라 기절할지도 모른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닥친 자유야말로 그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사랑이었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 눈앞에 현실로 닥쳐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놀라고 당황하고 그래서 화를 내며 그것을 거부하게 된다.


우 리는 사랑으로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살아왔고 사랑 없이 사는 삶에 너무나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토록 그리던 것이 현실로 닥쳐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선 그것이 나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주어질지 의심이 가고 또한 내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도 자신이 안 서고, 그리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되돌려주어야 할지 도대체 상상이 안 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화를 내며 그의 애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속 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거에요? 나를 놀리는 거에요? 당신이 책임질 거에요? 나에게 너무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도 잘 모르지만 내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애. 그것을 가만히 덮어 두어야지, 잘못 건드리면 내가 폭발할 것 같애. 슬픔, 분노, 적개심, 사랑받고 싶은 마음... 무언지 모르겠어. 하지만 그것들을 가만히 덮어두어야지 잘못 건드리면 내가 이제까지 애써 쌓아온 벽이 허물어지고 내가 주저앉을 것 같애. 제발 가까이 오지마! 난 지금 무서워. 당신에게 화를 낼까봐. 아니야, 그것보다 내가 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서 그래. 제발 가까이 오지마!"


우 리는 타인이 이런 반응을 보일꺼라는 것을 예감하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다가서기가 주저된다. 이는 서로서로 마찬가지이므로 결국은 사람들 사이에 마음 문은 점점 더 닫히게 되는 것이다. 서로 마음 다치지 않으려고 서로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심지어는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사실은 남편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솔직히 내보이고 싶지만 남편으로부터 거부당할까봐 말을 안 하고, 기껏 "왜 당신은 나에게 관심이 없느냐? 사랑해주지 않느냐?"는 식으로 항의하는 말로 대신한다. 남자의 경우는 이런 어려움이 훨씬 더 많다. 남자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그러한 욕구를 부정한다. 그래서 애써 강한 척 태연한 척해야 되는 남자들의 운명은 여자들보다 이 부분에 있어 훨씬 더 비극적이다.


남 자들의 애정욕구는 거의 대부분 부인을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식으로 표현된다. "남자가 집에 들어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지" 하는 식, 아니면 "당신은 다른 여자들처럼 좀 상냥할 수 없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여자들에 비해 자신의 욕구마저 솔직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자나 여자 모두 가까운 부부사이에서조차 상대방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식으로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주기보다는 받기만 원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포 때문이다. 즉, 사랑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주는 것에 비해 훨씬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부담스러우면 피하거나 거부해버릴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내가 거부당할 수 있고 그것은 매우 큰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 랑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받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주는 것은 더욱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 사랑을 받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주는 것은 더 더욱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 속에 끓고 있는 사랑의 에너지를 끄집어내어 우리 모두 따뜻한 세상을 만들기를 정말 원하고 있지 않는가? 그 일을 위해서는 용기를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간은 분명한 목적의식이 생기면 의외로 많은 용기를 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사랑에서부터 그리고 가까운 친구사이에서 얼마든지 실험의 장이 열려있다. 사랑이 다시 넘쳐나는 세상을 위하여.

댓글 2

  • 2011년 5월 1일 오후 6:57

    수고 많으셨어요.감사합니다. 그리고 잘 읽고갑니다.한 번만 읽어서는 아니되겠고...

  • 2011년 5월 5일 오전 1:17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을 위하여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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