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 주님을 강렬히 체험한 사울은 회심하고 세례를 받는다. 이제 사울은 ‘바오로’로 개명하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것이다(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은 생명의 빵을 먹고 영원히 살 것이다(복음).
그때에 유다인들이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자기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요한 6,52-59)
“지금부터 각자 새장에서 새 한 마리를 꺼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죽인 다음 내 앞에 다시 가져오너라.”
그러자 제자들은 새를 한 마리씩 꺼내 들고 흩어져 갔습니다.
시간이 흘러 각자 죽인 새를 들고 스승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어느새 죽은 새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평소 바보 취급을 당하던 제자 하나만 해가 지도록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들 바보 하나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며 불평을 했습니다. 이윽고 그가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안고 와서 말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을 찾았지만 그런 곳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나무와 풀이 보고 있고, 하늘이 보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던 제자들은 새를 죽이는 것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스승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이는 놀림만 받던 바보뿐이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한 유다인들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눈에 보이는 썩어 없어질 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같은 빵을 두고도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밀가루로 만든 빵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먹어서 죽지 않는 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초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예수님께서는 위 선언을 통해 성체성사에 대한 정의와 핵심, 본질, 효과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이 기술되고 있던 당시 이미 여러 교회에서 성체성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당시 성체성사에 대한 유다인들의 오해와 반감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표현하신 ‘내 살’, ‘내 피’란 용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인육제가 벌어지는가보다 하고 단정 짓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이라는 표현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 피는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되는, 엄중하게 금지된 것이었기에, 예수님의 피와 관련된 이 말씀은 그들의 귀를 엄청나게 거슬리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 9장 4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신명기 12장 16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베푸신 복에 따라, 너희가 원하는 대로 어느 성에서든지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
유다인들은 예수님 말씀 안에 깃든 심오한 뜻, 숨은 뜻, 더 중요한 의미를 간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제정하시려는 성체성사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똑똑한 첫 했지만 사실 어리석기 짝이 없었습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갖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데 익숙하다보니 전체적인 맥락을 읽어나가는데 실패했습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다보니 정작 가장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전혀 뒷받침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생명의 말씀, 구원에로의 초대 말씀조차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얼굴로 들어가던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향한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초대 얼마나 행복한 초대인지 모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히 불사불멸하는 구원에로의 초대입니다.
더 행복한 일이 있습니다.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이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성사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변화를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마침내 사제의 손으로 나누어지는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일입니다. 이로서 우리 안에 매일 매 순간 구원이 이루어지며, 그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매일의 작은 구원들이 합쳐져 언젠가 영원한 구원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초대이자 정말 은혜로운 대사건인 성체성사이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 하나가 생기는군요. 아직도 성체성사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우리 이웃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초대하는 일입니다.

지금 시대 같으면 게시자의 표현에 따라 '성전주의'이다 할 것입니다. '성전주의' 라는 것도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성전중심 생활의 내면 보다는 성전중심 생활의 형식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이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예수님의 말씀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육적인 형식에 얽매이면 영적인 내면'에 대하여서는 언제나 의문에 갇히는 법입니다. 컵에 물이 가득 담겨 있으면 새로운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나 '성전주의'는 자신들의 말대로 결코 예수님의 '살'을 먹을 수 없습니다. 형식에 결박되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단지 입으로 먹고 밖으로 나오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살'에 대하여 아마도 당시의 유다인들에게는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현대의 사람들 역시 눈이 열리지 않았다 해도 가히 지나친 말은 아니다 싶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사랑의 살과 피'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양식은 먹어야 생명이 되지만 하느님에게 양식은 주어야 생명이 된다고 상호 대비해서 표현하고자 합니다. '사랑'은 먹기 보다는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분명히 사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도 역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음식을 부모가 자기 입에 넣기 보다는 자식들의 입에다 넣어 주는 것이 더욱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이로써 부모의 사랑은 자식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때의 '사랑 마음'은 부모의 자기 살과 피를 자식들에게 먹이는 것과 전혀 다름이 없습니다.
유다인들도 이런 부모의 '사랑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는 바로 '사랑의 살과 피'이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이렇게 인간에게 보여주셨습니다.그러나 시대가 지나고 현대의 사람들도 유다인들과 다를 바가 없이 "자신을 내어 주는" 이 사랑에 대하여 깨닫지 못합니다.
'율법주의'가 율법의 형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과 같이 현대의 '성전주의'도 성전중심의 형식에 속박되어 <도>를 닦을 뿐입니다. 마치 불교의 도승처럼 그리스도교의 도승이 되려고 아니 율법학자, 혹은 바리사이들이 되려고 <자기 버림의 도승>이 되고자 애씁니다.
'자기 버림'이 이루어져서 '자기 내어 주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은 <도승>에 불과합니다. 결코 자기를 버리지 못하고 끝내는 자기를 내어 주지 못합니다.
자기 버림은 자신을 내어 주는 일을 실행(시작)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내어 줄때 버릴 수 있다 할 것입니다. 내어 주지도 못하면서 자기를 버리고자 한다면 거짓말쟁이입니다
자식의 입에 좋은 것을 <내어 주는 사랑>이 자기 입에 좋은 것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입에만 좋은 것을 먹고 자식의 입에는 좋은 것을 주지 못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는 '사랑의 살과 피'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술을 마시는 일(성전 다니는 일)은 있어도 남들에게 베푸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버리겠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에 불과하다 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도 해 주지 못하는 사람이 다수 대중에게 해 준다는 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다수에게 해 준 것이 있다면 이 세상은 이렇게 어려울 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도 <자신을 내어 주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을 버려야 한다>고 입으로만 소리치는 세상입니다.
'성전주의자'들은 특히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께서 바로 성전이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돌로 된 성전 중심'에 있듯이 '살로 된 사람 중심'에 있도록 마음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예수님과 일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세상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서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마음을 빨리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기 버림'의 도승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 되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오신부님)
이로써 자기 버림의 자기 없슴에 도달하고 마침내 예수님과 일치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이 됩니다" (오신부님)
맛있는 음식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사제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 성체이신 예수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에 저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체께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습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이번 기회에 미사 참례회수를 늘리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 하늘로부터 내려오시고, 성령의 힘으로 성모님께 태어나시며, 사람이 되신 분,
이 모두가 특별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빵과 포도주를 드시고,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먹고 마실 빵과 포도주가 되신다.
정말이지 성체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육화(肉化)는
이제 특별한 곳, 특정한 시간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옛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살았던 그때에 나도 살았더라면…” 하는 식의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때 그 제자들 곁에서 계시던 것보다 오히려 더 가까이 이미 내 곁에 계신다.
예수님은 바로 오늘 나의 양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