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일 성주간 월요일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요한12,1-11)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특별한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예수님께서는 향유를 당신의 발에 붓는 마리아의 행동을 통하여 당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드러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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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랐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시편 23편 5절의 이 말씀처럼,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그 사람에 대한 영예의 표시로서 대개 머리에 바르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가 아닌 발에 기름을 부음으로써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존경을 겸손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릴 만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습니다. 자신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와 체면은 더 이상 주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가로막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가치였습니다.
유다는 그 사랑의 마음을 알아보기엔 너무도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허무하게 시들어 버려지는 꽃의 경제적 가치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꽃다발을 선물하는 사람의 마음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경제적 가치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그분에 대한 사랑이 간절하고 지극할수록 우리는 현세의 경제적 가치를 따지는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마리아와 유다
-김훈일 신부-
오늘 마리아는 값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다가 잔치에 앉으신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엄청난 행동입니다.
우선 향유 가격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한 데나리온이 근로자의 일당에 해당되므로 노동자의 일 년 소득과 비슷한 액수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발에 그냥 부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아주 극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유다는 이것을 아주 못마땅해합니다.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마땅했다고 말합니다. 드러난 사실을 보면 마리아의 사랑은 낭비적이고 유다의 사랑은 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지만 유다는 돈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사랑의 가치를 잘못 선택한 것에서 오는 결과입니다. 마리아는 그 사랑의 중심에 예수님을 선택했고, 유다는 자신의 선함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잘못된 선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사람들과의 친교의 자리나 활동하는 자리에는 열심히 하지만 기도에는 마음을 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자선을 많이 했다고 해서 헌금을 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먼저 선택하고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먼저 선택하고 우리의 삶도 시작해야 합니다. 사랑도, 선행도, 기도도, 모든 것이 예수님을 선택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랑의 완성
-정하돈 수녀(대구 포교 성베네딕도수녀회)-
예수님이 베다니아에서 라자로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실 때 마리아가 값진 나르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발라드렸다. 값진 향유를 머리도 아닌 발에 바른다는 것은 상식밖의 일이었을 뿐 아니라 큰 낭비요, 무익한 일이었다. 유다는 그 향유가 적어도 300데나리온은 될 것이라고 재빨리 계산을 하면서 마리아의 행동을 불만스러워한다. 300데나리온은 품팔이꾼이 일년 동안 버는 돈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진정 가난한 이들을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남이 사랑으로 하는 행동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지 못했을까? 그것은 질투와 탐욕으로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온 집안이 향기로 가득찼다.” 하느님의 실존을 체험할 때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볼 수 있다. 하느님의 발자취는 사람의 영혼 안에 좋은 향기, 신선한 맛, 달콤함과 기쁨을 안겨준다. 마치 가나 혼인잔치의 향긋한 술맛처럼!
향유를 바름은 사랑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발에 향유를 바르는 것은 아주 친근한 사이, 곧 아내나 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질투와 탐욕으로 눈이 어두운 유다가 어떻게 낭비하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어떻게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바친 그분 사랑의 신비를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죽도록 사랑한 분을 향한 여인의 애절한 사랑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십자가의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은 낭비하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이만이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분의 사랑이 내 안에 흘러 넘칠 때 향기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울 것이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양승국신부-
<아직 눈부신 하늘 아래 살아있기에>
사순절이 시작된 지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성주간에 접어들었군요. 우리 죄인들을 위해 고통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어떤 보속을 이행했는지,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께 무엇을 봉헌했는지 가만히 돌아보니 기가 막힙니다. 너무나 의식 없이, 개념 없이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부끄러움에 가슴 치는 성주간 월요일 아침, 주님께서는 한 여인을 남아있는 사순기간의 이정표이자 제 삶의 이정표로 세워주시는군요.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녀의 예수님을 향한 봉헌은 성주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오빠와 가족 모두를 죽음의 사슬에서 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도 고마웠던 마리아였습니다.
어느 날,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꿈에도 그리던 예수님과 일행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뛸 듯이 기뻤던 마리아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 새 삶을 부여해주신 예수께 어떤 방식으로든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 텐데, 어떤 것이 좋을까?
마리아는 우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물건 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 그래서 가장 애지중지하던 것, 생명처럼 여기던 것이 어떤 것인가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순 나르드 향유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마리아에게 있어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이제 머지않아 떠나가실 예수님임을 직감했던 마리아였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사랑을 기울여 예수님을 접대합니다.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 가장 극진한 접대의 표시로 마리아는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어드립니다.
예수님의 한없이 감미로운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 예수님의 무한한 자비를 조금이라도 체험한 사람은 마리아처럼 변화됩니다. 삶이 달라집니다. 행동양식이 달라집니다. 사고방식이 달라집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탈피해서 온전히 예수님 중심적인 삶으로 변화됩니다. 주변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오직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이 일생일대의 과제가 됩니다.
극진한 하느님 자비의 체험을 통한 마리아 내면의 변화를 알 리 없었던 유다였기에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제대로 된 봉헌생활을 꿈꾸는 분들은 마리아처럼 제대로 된 하느님 사랑의 사랑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온 세상의 모든 자비를 한 곳에 다 모은다 하더라도 하느님 한분의 자비를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된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저 역시 또 다른 희망을 지녀봅니다. 우리 모두 아직 이처럼 눈부신 하늘아래 살아있기에 마리아 못지않은 변화와 새 출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에 기뻐합니다.
또 다시 다가온 성주간(聖週間), 죄인인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신 예수님 자비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그 풍요로운 자비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지난 사순절, 돌아볼 때 마다 부끄럽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1주일이란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보다 자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피땀 흘리시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향한 극진한 그분의 사랑을 조용히 묵상해야겠습니다.

향 싼 종이에서 향기나고
-강영구신부-
당신은 봄의 향기를 느낍니까?
“향 싼 종이에서는 향기 나고, 생선 묶은 지푸라기에서는 비린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가슴에 무엇이 들어있나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면
당신에게서 사랑의 향기가 풍겨 나옵니다.
만일 당신의 가슴 속에 탐욕(貪慾)이 가득하고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와 원망으로 부글거린다면 당신에게서는 죽음의 악취가 풍겨 나옵니다.
겉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에게서 탐욕과 질투의 악취가 나고
대사제(大司祭)에게서 예수와 라자로를 죽이려는 살기(殺氣)가 풍겨 나옵니다.
그러나 값진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리는 마리아에게서 사랑의 향기가 납니다.
온 집안을 가득 채운 향기는 나르드 향유 냄새가 아니라 사랑의 향기입니다.
당신이 사랑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라면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당신에게서 시기질투와 미움과 증오, 탐욕의 악취가 난다면 당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매향(梅香) 풍기는 이른 봄입니다.
당신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성주간(聖週間)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 않을 것이다’
-정호신부-
예수님께서 살려주신 라자로의 동생들인 마르타와 마리아. 이 남매와 예수님이 얽혀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라자로를 살릴 때 언니 마르타가 한 행동, 곧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동생을 불러오는 행동의 이유가 된 사건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동생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리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종이 주인이 길에서 돌아오면 하던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 발에 물이 아닌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는 것은 정말 극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그분을 주인으로 대하는 행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로 마리아는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또 더 사랑받는 사람처럼 취급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이런 마리아의 행동이 아닌 그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한 제자의 눈을 통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용한 향유가 아주 값비싼 것이었기에 돈을 맡아있던 제자 유다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향유를 팔았더라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요한복음은 이미 유다에게 너그럽지 못하기에 그의 이런 말이 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이야기였다고 전해줍니다. 그러나 유다의 생각은 그냥 가치 없는 것으로 흘려들을 수만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너무나 흔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지적을 통해 유다가 다른 이가 나누는 사랑에 대해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이유로 다른 곳에 쓰여 지는 가치가 높은 물건의 사용을 문제 삼습니다. 그것을 차라리 이런 사람들에게 주면 될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이란 그것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것의 가치가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을 때 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줄 수 있는 순간은 그 때 뿐이니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그런 비싼 향유를 받으셔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늘 곁에 있어서 언제든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것을 그들을 빌미로 다른 사랑의 가치를 절하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더 비참하게 평가하고 이용하는 것이라는 속 뜻 조차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시기에 마리아의 행동 속에서 당신의 운명을 헤아리는 비통한 심정이시지만 제자인 유다는 같은 가치로 가난한 이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스승을 팔고 자신의 살 길을 도모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때이든 사랑이 일어날 때 우리는 유다와 같은 시각으로 그 일을 바라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 일을 하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선행이나 사랑의 실천을 다른 이유로 반대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사람들이 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 향유에 담긴 사랑 †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주님수난성지주일에는 환호와 열광, 고통과 죽음의 극단적인 두 가지 서로 다른 분위기가 큰 대조를 이루었다. 제1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행렬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의 환호와 기쁨과 믿음이 고조되었고, 제2부 미사에서는 예수님 스스로가 십자가를 지고 겪어야 할 불신과 배신, 고통과 죽음의 현실이 시종(始終) 무겁게 깔려있었다. 후자(後者)는 특히 긴 수난복음만큼이나 긴 암흑의 터널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오늘 성주간 월요일부터는 암흑의 긴 터널을 하나씩 토막내어 부둥켜안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제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12장은 베다니아와 예루살렘을 무대로 펼쳐지는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사건을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2장은 죽었던 라자로를 소생시켜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보이는 베다니아 사람들의 영접 만찬회와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는 사건(1-11절), 예루살렘 입성(12-19절), 이방인 그리스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이 자기계시(20-26절), 며칠 안에 벌어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예고(27-36절), 예수님의 마지막 공적 말씀에 대한 유다인들의 최종적 불신과 이에 대한 심판예고(37-50절)를 그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베다니아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사건과 비슷한 내용을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있었던 사건(마태 26,6-13; 마르 14,3-9)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입성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도하고 있다. 물론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께서 베다니아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어떤 여자'가 와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향유를 머리에 붓든 발에 붓든 여인(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의 '장례일'을 위하여 한 일이다.
요한은 이 사건을 과월절 엿새 전에 일어난 일로 보도함으로써 이 날이 금요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정확히 엿새 후 금요일엔 예수님의 장례식이 치러질 것이다. 장례식을 일주일 앞두고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생애 마지막 만찬을 영접 받았으며, 값비싼 향유를 자신의 주검을 위한 수의(壽衣)의 표징으로 받으셨다. 예수님과 함께 라자로, 마르타, 그리고 손님들 모두가 기뻐하였으며, 마리아는 예수님께 특별한 사랑(향유)을 보였고, 그 사랑의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
그러나 단 한 사람, 가리옷 사람 유다만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수님 발에 쏟아 부은 매우 값진 한 근의 순 나르드 향유 때문이었다. 유다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놓았다.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돈으로 계산하면 3백 데나리온, 이는 사람 5,000명을 빵으로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값어치의 놀라운 금액이다(요한 6,7-9 참조). 유다의 눈에는 그것이 낭비로 보였다. 마리아의 행동은 분명 낭비이기도 하다.
그녀는 매우 값진 한 근의 순 나르드 향유를 오직 예수님의 발을 위하여 쏟아 부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넘치는 사랑을 보였으며, 예수님은 이 사랑을 자신의 장례식을 위한 일로 받아 들이셨다. 마리아는 이로써 자신이 할 수 있는 사랑 그 이상을 한 셈이다. 사랑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사랑은 이해 받을 수 없으며, 사랑이 이해 받지 못하는 곳에서 사랑은 살 수 없는 법이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행위가 전적으로 내적(內的)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리가 없다.......◆◆◆

사랑하는 마음은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은 사람, 아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 주고도 더 주지 못해 안타까워합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키로 그램)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하였습니다.(요한12,3)
마리아는 예수님께 자기의 아주 소중한 것을 바쳐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냄새가 가득했다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집안에 가득한 것을 나타냅니다. 이럴 때는 냄새가 아니라 향기라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눈이 있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12,5) 하며 마리아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향유의 값어치를 계산 하였습니다.
향유를 붓는 행위를 최고의 존경과 사랑,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계산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경제적 가치만 보였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가,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는 법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하면서 돈을 가로채던 유다에게는 돈이 보일 뿐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지금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바쳐드려야 함을 알지만 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큽니다.
나의 시간과 능력, 재물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에 기꺼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부활의 생명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 하였습니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들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요한12,11)
살리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죽음의 어둠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곳에 기쁨이 넘쳐 나야 하는 데 유다의 모습도 있고, 수석 사제들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생명의 문화’와 더불어 ‘죽음의 문화’가 함께 있습니다. 살리는 일에, 생명의 문화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시기와 질투, 기득권을 누리려는 곳에 어둠의 그림자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이 있는 곳에 모두를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마리아처럼 존경과 사랑으로 모두를 바칠 수 있는 한주간 되길 희망합니다.
“어떤 것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 어떤 것도 당신을 그분한테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는 기억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기쁨이요 힘입니다.
당신의 그 말씀을 꽉 붙잡고 있다면 어떤 유혹과 어려움이 닥쳐도 당신을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마더 데레사) 사랑합니다.
@ 다 알면 뭐합니까?
뭐든지 다 아는 아들을 둔 엄마가 있었습니다. 아들은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 그야말로 신동이었습니다. 그 영특함은 인근에 알려졌고, 엄마는 아들을 칭찬하는 소리에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항상 싱글벙글하였습니다.
드디어 아들이 학교에 들어가 첫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받아온 성적표는 모두 빵점이었습니다. 엄마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학교에 달려가 답안지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아들이 작성한 모든 답안지 맨 밑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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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니다. 로마노! 니가 사랑을 정말 알아?~~~
안다는 녀석이 그모냥 그꼴이냐? 에쿠, 주님 다시 할께요....
사랑합니다.~말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연습을 오늘도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저도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