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월요일(루가 4,24ㄴ-30)하느님 은총과 사랑은

2012. 3. 12. 오전 7: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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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2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가 4,24-30)

 

 

 말씀의 초대

나병 환자인 나아만은 엘리사 예언자가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는다. 그러자 그의 병이 깨끗이 나았다.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은 이스라엘이 믿는 하느님을 찬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신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난한 목수 집안의 아들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눈이 멀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나자렛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회당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사제도 아니신 분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희년을 선포하시고, 선포하신 희년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진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고향 사람이며,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선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미 그들의 고향에서 겪은 어려움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를 들면서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향 사람들은 분노에 가득 차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끌어내어, 산의 벼랑까지 끌고 가서 죽이려고 합니다.
열등감을 좋은 방향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사람의 특징은 허영이나 교만에 빠지기 쉬우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른 사람을 압도하려고 하고, 때로는 자기가 높아지려 노력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추락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어둡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고향 사람들도 이런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면 발견할 수 있는 삶의 기쁨이라는 기적이 일어날 리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모습이 매우 좋아 보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닮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환영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거기에 참된 기쁨도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편견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 요셉의 아들이며, 직업도 평범한목수였다는 편견입니다. 그들은 우월감에 젖어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형태로 마음을 닫고있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자신의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편견을 깨려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위대한 엘리야 예언자도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서 도움을 받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녀는 시돈 지방에 사는 이방인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시돈 지방에는 돼지 키우는 집이 많아 유다인들은 대단히 부정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깨끗하다는 유다인들을 제쳐 두고 사렙타의 과부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편견의 우월감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비유의 말씀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사렙타의 이방인 과부도 엘리야 예언자를 맞이했는데, 어찌하여 당신을 외면하느냐는 질책을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해치려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조용히 피신하십니다. 어리석음도, 난폭함도 참아 내십니다. 살다 보면 지난 일을 들추어내는사람들을 꼭 만나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복음의 예수님을 떠올려야 합니다..


나아만장군 (왕하 5:1-14)

하느님 은총과 사랑은

-김찬선신부-

 나아만과 엘리사.  세속 임금의 신하와 하느님의 사신.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하느님의 치유를 받고자 멀리서 옵니다. 그리고 치유를 받기 위해 정성을 다 하는 뜻에서 많은 봉물 가지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뜻에서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만나주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그저 요르단 강 물에 몸을 씻으라고만 합니다.

엘리사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신답습니다. 세속의 권세를 그리 대단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대단한지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 그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세속의 권세뿐 아니라  인간의 정성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나아만의 정성을 높이 사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도 나아만의 치유를 위해 정성을 들이지 않는 듯 보입니다.
아무런 성의가 없는 듯이 심부름꾼을 시켜 처방만 내립니다. 이에 나아만은 그렇게 성의도 없고 정성도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의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거며, 또 도랑물 같은 요르단 강 물로 무슨 병이 낫겠냐고 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의사가 성의도 없고 정성도 기울이지 않으면 그 치료는 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은 인간의 성의나 정성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치유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치유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치유하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언젠가 입시를 앞두고 학부모들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미사를 드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마고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대답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일어나 가면서 다시 한 번, “신부님, 정성껏 미사를 드려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을 다시 앉히고는 하느님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는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다 믿는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당신이 당신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더 사랑하심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믿는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불안해 하냐고 일침을 놓고 보시다시피 제 정성은 믿을 것이 못되니 제 정성을 믿지 마시고 하느님을 믿으시라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족속보다 더 당신 마음에 들거나 예뻐서 또는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당신 마음에 더 들어서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은사는 순전히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의해서이지 인간이 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하느님, 제 하는 짓 보고 구원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과 사랑으로 구원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멘.

    
첫 발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신앙촌에 사는 분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사랑합니다. 

  
  

  

사순절에 영혼의 정화를 위해 고해성사를 봐야 하겠습니다.

성지에 가서 고해 성사를 보고 온 한 신자가 본당 친구들에게 매우 친절한 고해 신부님을 만났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아주 친절하셨어. 고해성사 중에 혼내지도 않으시고,
캐묻지도 않으셨어. 훈계도 없으시고....
다만 노래로 하는 기도소리에 신부님이 주시는 보속을 잘 들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내가 알아서 주님의 기도 한 번을 바쳤어.
다음에도 그 성지에 가서 성사를 봐야겠어.”

친구들이 부러워하면서 “ 그 고해신부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
우리도 한번 찾아가고 싶은데!”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자가 “부 신부님이라고 알고 있어. 내가 자세히 봐 뒀지.
고해서 문패에 ‘고해신부 : 부재중’이라고 돼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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