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오 6,1-6.16-18)
사순 시기
사순 시기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 저녁 미사 전까지 사십 일 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40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숫자이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냈으며, 모세는 십계명을 받으려고 40일 동안 단식하였고, 엘리야 예언자는 40일 동안 걸어서 호렙 산에 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단식과 기도를 하시며 40일을 보내셨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정화의 기간을 뜻한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기쁘게 맞이하려면 사순 시기 동안 외적인 준비와 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사순 시기 동안 신자들은 단식과 금육이라는 외적인 준비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재의 수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있다. 단식은 만 18세부터 60세까지, 금육은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한다. 내적인 준비란 회개와 보속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고 쇄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준비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사순 시기 동안에 거행하는 전례는 신자들이 예수 부활 대축일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사순 시기 동안 미사 때나 말씀 전례에서 알렐루야와 대영광송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제가 입는 제의의 색깔은 회개와 보속을 상징하는 자주색이다. 신자들은 금요일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침으로써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에 동참한다.
재의 수요일인 오늘부터 거룩한 사순 시기가 시작됩니다.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사순 시기에는 특별히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보게 됩니다. 제 자신을 살펴보면 허물과 상처투성이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무거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제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용서를 청해야지.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 달리 살아야지.’ 하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사순 시기가 은총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죄와 허물투성이인 우리에게 새롭게 태어나서 기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주시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순 시기는 또한 기쁨의 축제인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파스카 축제를 기쁘게 맞이하고자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을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일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받아들이려고 세상이 주는 달콤함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를 변화시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나로써 세상이 밝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밝아야 내 마음도 밝아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밝아야 세상도 밝아집니다.
우리는 오늘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 2,12-13) 하는 요엘 예언자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자선이나 단식과 같은 회개의 행위들은 단순히 외적 행동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행실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면서 긴 사순 시기의 여정을 함께 걸어갑시다.
“내 아들들아, 자네들이 나를 프란치스코 아버지라 부른다면 이렇게 말하겠네. 자네들 수도회의 개혁을 믿지 말게. 자네들 각자 자신의 개혁을 믿게. 나의 형제들아, 자네들이 나를 프란치스코 형이라고 부른다면 이렇게 말하겠네. 거룩해지게, 그러면 세상이 자네들에게 거룩해 보일 걸세”(『프란치스코 저는』에서).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서양인의 묘지 비문에 종종 등장하는 라틴 말 문구입니다. 우리는 언제 다시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이 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가장 살아 보고 싶었던 바로 그 내일이다.”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명언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을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아니면 불평불만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흙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라틴 말에서 ‘흙’(humus)이라는 단어는 ‘겸손’과 ‘인간'이란 용어의 어원입니다. 곧, 우리 ‘인간’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죄에 떨어지기 쉬우며 자신이 최고인 것처럼 교만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의기양양하고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본모습을 깨닫고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2012년 2월 2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루가 9,22-25)

들으신 적이 있는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인도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구경을 갔습니다. 지옥에 들어가니 마침 식사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지옥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식탁을 보니 놀랍게도 음식이 풍족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삐쩍 말라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그들의 팔은 곧아서 그 음식을 집어 자기 입에 넣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는 천국에 가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곳 사람들의 팔도 구부러지지 않았습니다. 식탁의 음식을 보았더니 지옥의 것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얼굴은 살이 찌고 모두 평화롭고 행복에 차 있었습니다. 그 이유를 찾으려고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그들은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앞에 있는 사람의 입에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상대에게 음식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함께 먹여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만 살려고 하면 결국 나도 죽고 너도 죽습니다. 너를 위해 나를 죽인다고 할 때에 비로소 모두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어머니에게서 보게 됩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버립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자식을 살립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며 이미 인류도 이 지구상에서 없어졌을 것입니다. 사랑은 뺏는 것이 아니라 줌으로써 남을 살리고 자기 자신도 살리는 구원의 힘입니다.
2012년 2월 2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요한의 제자들은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사실 바리사이파는 단식을 엄격히 지켜 왔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이 적군에게 불타 버린 것을 기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당한 이 국가적 재앙과 수모를 비통해 하면서 단식을 지킨 것입니다. 국가적 재앙을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단식의 의미는 퇴색되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단식한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단식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그릇된 종교적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이며 그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서에서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 62,5). 혼인 잔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미 벌어졌습니다. 혼인 잔치는 메시아 시대를 상징하고 신랑은 예수님이시며 친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지금은 축제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누리면 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닥칠 수난을 암시하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신랑을 빼앗기게 되면 신랑의 친구들은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즐기시는 단식은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가 지켜야 할 단식이 과연 무엇인지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