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마르코 8장 11-13절
뭘 보여줘야 하나
-반영억라파엘신부ㅡ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진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고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기적>
예수님께 몰려온 바리사이들은 집요하게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출애굽기 16장 12절 참조).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열왕기 상권 18장 44절 참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한번 보십시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 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런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투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과 물고기 기적 후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손을 씻는 정결 예식 문제로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두 번째 빵과 물고기의 기적 후에도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시비를 겁니다. 사실 그들은 여러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기적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능력으로 땅에서 이루어진 것일 따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그들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의도적인 악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며 예언서에도 정통하다고 으스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병자들이 치유되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말 못하는 이들이 말을 하며 죄인들이 회개하는 모습 등을 인정하기 싫어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표징들을 외면하는 그들에게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주는 것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깊이 한탄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완고한 사람은 어둠 속에서는 앞을 볼 수 있으나 햇빛 아래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야행성 부엉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장과 만족을 위한 일에서는 꽤 똑똑해 보이지만, 진리의 빛 앞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눈 뜬 장님입니다. 소중한 것은 열린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보입니다.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을 때, 우리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올바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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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기적을 보여 주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조건을 다는 것이지요. “돈을 벌게 해 주면 성당에 다니겠습니다.” “사업이 성공하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찬가지 이야기입니다. 적극적인 요구는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마음으로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십니다. 신앙은 조건을 단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고 맡기면 어느 날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그러니 늘 청해야 할 것은 ‘인내와 절제’입니다. 참지 못하고 객기 부리는 마음을 ‘조절하게’ 해 주십사는 것이지요. 아직도 투정 부리는 신앙이라면 어린이의 신앙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1코린 13,11). 그러니 우리 역시 어른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조건’을 달지 않는 일입니다.
은총은 반드시 옵니다. 일상에 충실하면 ‘삶의 기쁨’은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나의 신앙’으로 내가 끌고 가야 합니다. 억지로 ‘끌려가는’ 신앙이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 때문에 신앙이 힘들다.’ ‘누구 때문에 인생이 괴롭다.’ 이런 것은 모두 조건을 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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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바로 앞 내용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허기진 군중 사천 명가량을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배불리 먹이신 뒤 그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였다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이 일어난 뒤 오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기적에 대한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요청에 탄식하며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참된 의도는 감탄을 자아내는 신비한 표징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외적인 기적 사건 속에 감추어진 내적 신비를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기적의 표징만을 요구하는 이들에게는 그 기적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인간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참된 의미를 간과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신비한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참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