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그라든 손 (마르 3,1-6)

2012. 1. 18. 오전 8: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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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 연중 제2주간 수요일-마르코 3장 1-6절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사랑스런 사람이 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손이 오그라들어 살아오는 내내 불편하고 우울했던 사람에게 오늘 베풀어진 치유의 기적, 그 원동력이자 배경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 가련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의 에너지가 아니었을까요? 가련한 인생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호시탐탐 먹을 것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바리사이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어기게 되면 몰매 맞아 죽을 ‘안식일 규정’ 조차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오직 당신 앞에 홀로 서 있는 한 인간에게만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사람, 오랜 세월 질곡의 고통에 시달려왔던 불행한 인간의 구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 결과가 오그라든 손의 치유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1대 100, 1대 다수가 아니라 당신 눈앞에 있는 오직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결국 사랑이 기적을 불러오는군요. 결국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사랑만이 영원히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충만한 사랑을 받아야 되는데, 그래서 치유의 기적을 입은 사람처럼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되는데, 그것이 왜 이렇게 잘 느껴지지 않을까요? 고민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스러워져야 한다는 것.’

     우리도 가끔씩 그런 체험을 하지요.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 사랑스럽지 않는 사람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뻐할 구석이 있어야 예뻐하고, 사랑스러운 데가 있어야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한번 받아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십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 없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제 탓이요’를 연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빨리 깨닫는 사람, 인간의 무력함, 인간의 한계, 인간의 보잘 것 없음을 하루라도 빨리 인식하는 사람, 그래서 늘 하느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하느님 눈에 쏙 드는 사람, 하느님 눈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적어도 두 가지 이상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단의 순간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다른 하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두 여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1열왕 3,16-28 참조). 진짜 어머니는 아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참으로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아들을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가짜 어머니는 칼로 아이를 잘라 아이가 죽더라도 반쪽만이라도 챙기겠다고 말합니다. 참된 선택의 기준은 사랑에 있고 그 사랑은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진퇴양난의 고비를 어떻게 맞으시는지 보고 싶었으며, 예수님을 고발할 적당한 구실도 찾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면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위반한 것이 되고, 안식일 법을 지키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율법이냐? 사랑이냐?” 이 두 가지가 서로 상충될 때 어느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선택의 때에 행동 방침을 주시지 않고 근본 규범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행동한 것, 또는 행하려고 하는 것의 근본 동기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결단하는 것이 식별입니다. 그런데 식별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모든 선함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연중 2주간 수요일(마르 3,1-6)
 

 한번 비뚤어지면

반영억라파엘신부

얼음위에서 놀던 어린이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목격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구해야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이지만 실제로 자신의 몸을 던져 구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 법을 위반하는 사람은 추방당하거나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출애31,14). 유다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가 아니면,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법적인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치유해준 병자는 손이 오그라든 상태였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법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애 버릴까 모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안식일 법의 맹목적인 준수보다는 안식일에도 선행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에게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커갔습니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칭찬은커녕 흉보고 비난하며 불평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 더 문제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치유를 보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외적인 규정을 어겼다는 사실 하나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해칠 궁리를 하는 사람은 바로 시기 질투하는 나의 모습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고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킨다고 자만하면서, 실제로는 교만의 죄를 범하고 생명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지를 알면서도 마음한번 비뚤어지면 대책이 없습니다. 그는 중환자입니다. 그는 치유 받아야 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보다도 더 먼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혹 나도 잘못된 고정관념, 어떤 것에 대한 집착, 쓸데없는 고집, 자존심의 중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하시며 오그라든 손을 성하게 하신 능력의 말씀이 오그라든 우리 마음을 펴주시길 기도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칠 수 없지만,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은 다른 이를 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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