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요한 1,35-42)

말씀의 초대
소년 사무엘은 성전에서 엘리 사제 밑에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을 부르시는 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을 때 그는 곧바로 그분을 섬길 자세를 보인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그들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성전이 된 이들은 거룩한 생활을 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그 가운데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주신다. 이름에는 그 나름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바위라는 뜻의‘케파’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은, 앞으로 베드로는 바위처럼 교회의 기둥을 든든히 받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삶을 보면, 생전에 좋은 일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 주셨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사람들, 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더욱이 그토록 아끼셨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갔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이 고난을 받고 결국 남을 위해 목숨을 잃는 어린양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보면 겉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순전히 밑지는 장사를 하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보처럼 사신 것이고 예수님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삶이 바보의 삶, 실패한 인생이 아님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철저히 남을 위해 사시고, 남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는 영원히 살게 하시어, 예수님의 삶이 옳았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비록 육체가 살아 있다고 해도 그 영혼은 죽은 것이나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만 살려고 하면 남은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자기만 살려고 하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죽으려고 하면 남을 살리고 자신의 영혼도 영원히 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를 살리는 길이며, 남도 살리는 길입니다.
☆☆☆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처음 만난 그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본래 이름 ‘시몬’ 대신에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숨기고 싶을 때 이름을 바꿉니다. 지난날의 모습을 없애고 싶을 때 이름을 바꿉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런 암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시몬은 죽었다. 그러니 너는 이제 베드로로 다시 태어나라.’ 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이렇게 이름을 바꾸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베드로의 운명을 바꿉니다.
바위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견디어 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모습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고 있는지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흐느적거리며 살고 있는지요? ‘별것도 아닌 말’에 속상해하고, ‘별일도 아닌 사건’에 격분합니다. 지나고 보면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베드로 사도만이 이름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세례명에 걸맞게 살고 있는지 오늘은 돌아봐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요한1,29-34)
-유 광수신부-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그냥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자문해 보게 된다.
요한은 "세상의 죄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지 않고 "세상의 죄를"이라고 단수로 말하였다.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의 죄란 이런 저런 여러 가지들이 아니라 모든 죄의 뿌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세상의 죄이다. 율법학자들이 중풍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씀하셨을 때 "이 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2,7)라고 말하였듯이 하느님을 보고 이야기하면서도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즉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많은 죄들을 짖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을 안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요한 세례자는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외친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무지함"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죄의 뿌리를 아예 없애버리러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죄의 일부분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조의 뿌리가 되는 "세상의 죄"를 용서해주러 오신 분이시다.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하느님이시다."라고 하지 않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분이 이제 오시는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러니까 요한은 늘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분이 저기 오신다는 것이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던 분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한다. 나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늘 하고 있는가? 내가 평소에 아무런 하느님에 대한 생각없이 또는 아무런 기다림도 없이 생활하고 있다면 하느님이 오신다고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겠는가? 또 내가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 있어야 그런 하느님을 볼 때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을 기다리는 마음도 없고 또 내가 바라는 구체적인 하느님의 모습도 없다면 지금 당장 하느님이 내 앞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겠는가? 요한은 절대로 예수님이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던 분이 오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분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라고 말하였다. 요한은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장차 오시는 하느님은 어떤 모습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갑자기 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이상한 모습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미 "언제, 어떤 모습으로, 왜, 오실 것"이라는 것을 예언자를 통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이사 40 3-5)고 당신이 오신다는 것을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53, 6-7)라고 오실 하느님의 모습을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말씀해 주셨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또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다." 이렇게 우리의 잘못으로 지은 모든 죄를 없애주고 용서해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은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자식이 죄를 지으면 부모가 모든 수모를 다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요한은 인간이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짖게 되는 이 세상의 죄의 뿌리가 되는 "하느님에 무지함"을 아예 없애버리러 오신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죄를 짖지 않으려면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모르면 우리는 또 다시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난다." 그럼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느님은 우리의 이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공부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이 직접 당신을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직접 하느님한테 듣고 보고 배워야 한다. 요한도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라고 하셨듯이 하느님이 보여주신 것을 보았고 일러주신 대로 하였기 때문에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죄를 짓게 하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함"에서부터 깨어나야 한다. 즉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짓게 될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며 해결책이다. 그럼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말씀 즉 성서를 아는 것이다. 성서는 모두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시는 내용이며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 가를 알게 된다. 성서를 알게 되면 "길을 헤매며 제멋대로 놀아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으며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연중 제2주일 2012년 1월 15일.
요한 1, 35-42.
요한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세 개의 다른 복음서들이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그 세 개의 복음서들에서 주제들을 택하여 명상하고, 그 내용을 그 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인 이야기 양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고 고백하였다는 이야기와 안드레아와 베드로가 그 고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 복음서는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에 주목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증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성전에서 피 흘려 바쳐지는 희생양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 피 흘림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9,22)에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해지며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사실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성전에서 속죄의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과 같은 예수님의 운명이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요한의 증언을 소개하고, 그 증언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가 그분과 함께 머물렀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이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는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곳(15,5)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안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같은 복음서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 사랑 안에 머무는 것처럼, 그대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입니다.”(15,9-10).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그분이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그분이 실천하신 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머문 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메시아라는 호칭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당신이 사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고, 세상 만방을 다스리게 해 주는 왕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이 어느 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서 많은 사람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자, 사람들은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6,14)라고 말하면서, 그분을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서 당신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다.”(6,15)고 말합니다. 예수는 사람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 독립하고, 강대국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노력하여 이룰 일입니다.
흥부전에서 제비가 흥부에게 박 씨를 갖다 주었습니다. 지극히 가난했던 흥부는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대박이 터져,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흥부의 꿈을 제비가 이루어 주었습니다. 예수는 그 제비와 같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원을 이루어주는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예수 시대 혁명당원이라는 이스라엘의 분파가 기대하던 하느님도 그런 분이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우리의 소원을 성취해주는 하느님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정성을 바치면, 재물도 생기고 출세도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 되는 수단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는 ‘하느님의 어린 양’입니다. 당신 스스로는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을 위해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어 피를 흘린 분입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듣고, 그 사랑을 자기 주변에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랑 안에 살고 계시는 지를 보고 제자도 같은 사랑 안에 머물렀더니,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들이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몸소 해 본 사람이 그분을 메시아로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어 피를 흘린 메시아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같은 실천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세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생명을 위해 기여하고 죽어갑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지 못하는 생명은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삽니다. 그렇게 유아독존(唯我獨尊)하는 생명은 볼품없는 자기 모습 하나 남기고 허무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생명의 순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신앙은 하느님 생명의 순리를 살라고 권합니다. 그 순리를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면서, ‘내어주는 몸’이라는 성찬에 참여하고, 스스로를 내어주는 순리를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소인(小人)의 근성을 넘어,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대의(大義)를 실현하는 삶의 운동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에게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보며’ 그의 이름을 바꿔놓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세례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새 사람으로 태어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분을 ‘하느님의 어린 양’, 곧 그분의 죽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와 함께 머물며, 그분이 하신 실천, 곧 이웃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줄 때입니다. 신앙인은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 알아듣고 그분이 실천한 대의를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그 실천 안에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메시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실천을 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