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주간 목요일(마르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반영억라파엘신부
환자방문을 하였습니다. 위암으로 고통을 받는 분과 허리를 다치신 분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주님을 새롭게 찾게 되신 것이 은총이지만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며 “신부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며 애원하시는 어머니를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에 여기저기 철심을 박고 침대에는 성경을 가지런히 펼쳐놓으신 형제님이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기워 갚고 주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환자방문을 하였습니다. 위암으로 고통을 받는 분과 허리를 다치신 분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주님을 새롭게 찾게 되신 것이 은총이지만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며 “신부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며 애원하시는 어머니를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에 여기저기 철심을 박고 침대에는 성경을 가지런히 펼쳐놓으신 형제님이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기워 갚고 주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그래서 병자나 불구자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겪었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습니다.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그래서 병자나 불구자는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이들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괴로움을 겪었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습니다.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며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더 당신께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더 당신께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치유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하늘과 땅 사이에 / 꽃과 나비가 /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
호적도 없이 /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 성한 사람이올시다
오늘 복음에 나병 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득 문둥이 시인이라고 불리는 한하운 시인의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이 시는 나병이라는 장애를 가진 시인이 세상의 편견과 멸시를 받고 목 메인 절규를 한 시입니다. 병자에 대한 동정과 연민보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팔매질이 시인을 더욱 힘들게 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보시고 그를 가엾이 여기시고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나병 환자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병자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지닐 때 사회적 약자들의 한은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