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르2,1-12)

2012. 1. 13. 오전 7:43:43

글자

 [(녹)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성 힐라리오 주교 학자 기념]

힐라리오 성인은 320년 무렵 프랑스 푸아티에의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성인은 우연히 책 한 권을 얻어 그리스도교를 연구하다가 이교의 허무함을 깨닫고 세례를 받았다. 350년 무렵 주교로 임명된 그는 아리우스 이단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힐라리오 성인은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는 많은 책을 남기고 370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지상술 힐라리오 신부님의 영육간의 건승하심을 빕니다.)

복음 

1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2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3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4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6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7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8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9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10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12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마르2,1-12)





 기도하지 않는 영혼은

반영억라파엘 신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를 하지 않는 영혼은 중풍병에 걸렸거나 손발이 부자유스럽게 된 사람과 같아서, 손과 발에게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만약에 이런 영혼들이 그 커다란 비참을 깨닫지 못하고, 따라서 스스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롯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것처럼 자기한테서 머리를 돌린 탓으로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 것(영혼의 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중풍환자, 즉 영적인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접하고도 아무런 깨달음을 갖지 못하고 은총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장애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 않고 보관만 하고 있거나 또 설령 읽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상태가 중풍환자나 다름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2,1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 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사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들것에 누워있습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말씀에 따르십시오. 그러면 영적인 감각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중풍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들것을 달아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이렇게 위대합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기적을 낳습니다. 그 믿음이 내 믿음이든 다른 사람의 믿음이든, 믿음을 갖고 하는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마음과 영혼에, 삶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매 순간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근심걱정을, 인생여정을, 앞으로의 미래를 온전히 맡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믿음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숨을 곳을 찾아 땅을 파는 두더지처럼 몸과 마음을 땅으로 굽힙니다. 그들은 현세적이고 지나가는 세상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열심히 기도함으로써 영혼의 중풍환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가을 하늘을 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보면 대개 삼각형 모양입니다. 조류 학자들에 따르면, 혼자서 날아가는 것보다 삼각형으로 함께 날면 공기 저항을 덜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승 기류 때문에 70퍼센트가량을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삼각 형태의 맨 앞에 나는 새는 공기 저항 때문에 쉽게 지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새가 앞으로 나선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러기들은 날아갈 때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는데, 이것은 서로 격려하는 것이며 특히 맨 앞에서 공기 저항을 가장 많이 받는 새에게 힘을 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체력이 떨어지거나 아파서 낙오된 새가 있으면 반드시 동료 새 두 마리가 같이 땅에 내려와서 몸이 회복되도록 도와주고 기운이 회복되면 다시 대열에 합류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러기는 협동심이 강하고 우애가 매우 돈독한 새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집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문 앞을 지나 예수님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네 사람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관계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다른 사람의 마음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할 때 조금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주위에서 받는 작은 도움에 큰 힘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주는 작은 도움은 그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기러기들이 하늘을 날아갈 때 서로 격려하고 어려울 때에 함께하듯이, 우리도 서로서로 격려와 용기를 주고받으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우애 있게 사는 우리 모습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실 것이며, 우리에게는 사람으로 사는 보람입니다.


중풍병자(마르2,1-12)

 -유 광수신부-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왔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셋째는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께 온 중풍병자, 넷째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네 사람이다. 다섯째는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보다는 듣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학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다섯 부류의 모습에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내가 이 다섯 부류 중에 어느 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면 중풍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네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 율법학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이나 잡고 판단하고 있으면 늘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어떤 사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그런 일을 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인가?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복음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드는가?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중풍병자일지도 모른다.

또 당신은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 중에 한 사람인가? 예수님 주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당신은 많은 은혜를 받고 중풍병자가 중풍병에서 치유되었듯이 당신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받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었고 매 주일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고 받은 은혜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즉 복음을 듣고 복음에 의한 복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병이나 치유받으려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중풍병자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고 성당에 다니고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기쁨도 없고 받은 은혜도 없이 무감각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있다면 그것이 중풍병자 아니고 무엇인가?

중풍병자의 특징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누워있으면 있는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의 모습이요, 죽으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시체의 모습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모습이 당신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요,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중풍병자를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사람을 살리는 봉사이다.

나의 믿음은 나만을 위한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나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들도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줄 수 있고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중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하고 희생을 치루워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보라.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그들이 중풍병자를 설득해서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 데려 오는 것도 힘든 일이고 또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뚫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 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 이 네 사람이 겪어야했던 어려움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었으며 힘든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노력하였고 인내하였으며 희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드디어 중풍병자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이 사도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요, 신앙인의 삶이고 자세이다. 

 

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는 하였지만 그 다음은 중풍병자에게 달렸다. 항상 결정적인 치유는 본인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른 이들은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목마른 이를 우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대신 마셔 줄 수가 없듯이 네 사람의 역할과 중풍병자의 몫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것까지는 네 사람이 할 수 있었지만 중풍병자가 치유받고 못받는 것은 전적으로 중풍병자에게 달려 있다. 

만일 중풍병자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하더라도 그가 원치 않았으면 강제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셨을 때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들것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중풍병자가 치유받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는데 낮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특별한 진찰도 하지 않고 다만 보시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한 마디 말씀만을 듣고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결국 중풍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 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믿음을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어떤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얕은 지식으로 판단만 하는 율법학자들은 아무 은혜를 받지 못했다.

 

그럼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의 죄였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을 앓고 들것에 누워지내는 병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해야한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라고 한다.
사도는 자기 영혼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자기 주위에 발산하는 사람이다.
사도는 보화를 축적하고, 그 축적한 보화를 인류에게 전해주는 성인이다.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게 대한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절제할 수도 차단시킬 수도 없는 사람이다.
사도는 갈증을 해소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로 달려가 넘치도록 채워주는 선택된 그릇이다.
사도는 자신 안에서 최고도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성전이다.
한 저술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도는 자신의 몸 전체에서-공사를 막론하고 자기의 말, 일, 기도, 몸짓, 태도를 통해서- 그의 전존재로부터 하느님을 발산시키는 사람이다.
하느님에 의거해서 살라! 그리고 하느님을 주라!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에서-
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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