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공현대축일 (이사60,1-6 ;에페3,2.3.5-6;마태2,1-12)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기심과 헛된 망상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하고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율법학자들 같이, 오늘의 종교 혹은 정치 지도자들이 하는 엉뚱한 주문,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한 맺힌 외침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그 숨결로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 사는 이기심과 무관심의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시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보살필 때, 하느님은 우리 실천의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실천의 원천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주님을 볼 수 있는 눈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사랑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공적으로 드러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이 메시아요, 구세주로 오셨다는 것을 기뻐합니다. 이 시간 그 ‘주님을 뵐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 하는 가운데 주님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정작 필요한 것을 가까운 곳에 두고 멀리서 찾는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늘 은총 안에 있으면 그것이 은총인줄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낀다면 더 많은 그리고 더 큰 감사의 기회가 될 텐데 말입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돌아보니 은총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내 남편을 만난 것이 은총이요, 지금 내 아내를 만난 것 또한 은총입니다. 지금 부모를 모신 것이 또 자식을 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은총이라기엔 벅찬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뒤집으면 틀림없이 은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이 은총의 때임을 일깨우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이것은 큰 은총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구세주를 기다려왔고 그분이 거기 오셨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탄생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와서야 알게 됩니다(마태2,2).‘유다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 고 묻는 박사들의 말에 헤로데 왕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놓고 그리스도께서 나실 곳이 어디냐고 묻고, 결국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기득권을 빼앗길 수 없었기에 두 살 아래 된 사내 아기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마태2,16).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면 자기 뜻을 접고 진리를 따라야 하거늘 그는 더 큰 악의 구렁 속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욕심은 큰 화를 불러옵니다. 헤로데는 알게 됨으로써 악으로 치달았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사뭇 달랐습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고, 또 아기를 찾게 되면 알려달라는 헤로데 왕의 부탁을 들으며 길을 떠났지만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습니다(마태2,12).
참으로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헤로데는 아는 게 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의 박사들은 발길을 서둘렀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계획을 접고 하느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우리를 일깨웁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6,8-9).
당장은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아도 주님의 뜻을 선택하면 그 안에서 반드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요한3,21).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뜻을 접고 하느님의 원의를 선택해야 합니다. 율법학자 대사제, 동방박사의 얘기를 다 듣고는 결국 자기의 뜻을 펼치는 헤로데, 꿈의 안내를 받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동방의 박사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매 순간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자기 뜻을 접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이 머리로가 아니라 가슴과 손발이 커지는 앎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이 은총의 순간임을 알 수 있는 눈이 뜨이기를 기도합니다.
별을 보고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볼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비천한 마구간에 나셨지만 그분은 위대한 왕으로, 하느님으로 그리고 인간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나도 무엇인가 선물을 드려야 할텐데…….
학교에서 시력 검사하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마태오 ‘너 눈이 몇이지?’ 했더니 ‘제 눈은 두개댄요’ 하였습니다. 선생님이 당황해서 다시 ‘아니, 눈이 얼마냐고?’ 하셨습니다. 순수한 마태오는 ‘저, 눈 안 파는대요’ 하였답니다. 눈이 몇이든, 눈이 얼마든 우리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육안보다는 마음의 눈을 그리고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알아봐야 합니다. 내 옆에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큰 은총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일어나 비추어라, 너희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이사60,1-2).하며 메시아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의 탄생으로 그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을 비추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된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잘 알아 뵙고 그 주님을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결코 내가 만든 주님을 전하지 않기를……… 사랑합니다.
그분 향해 길 떠나면 하느님이 별이 되어
[서공석 신부 강론-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마태 2,1-12. 이사 60,1-6.
성탄축일에 우리는 한 어린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그 생명은 자라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에 우리는 태어난 그 어린 생명을 영접하기 위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이야기는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記事)가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것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이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하였고, 먼 이역(異域)에서 사람들이 찾아 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더 큰 호응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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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ustralia 1966, Oct. 19 sc#422Adoration of the shepherds | ||
오늘 복음은 박사라는 사람들이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들이 몇 명인지, 베들레헴을 다녀서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등 우리가 궁금해 할 수 있는 일을 어느 것 하나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 그들의 배역을 마치고 사라지는 배우와 같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말은 복음서가 열거하는 예물이 셋이라서, 기원 후 500 년경에 발생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과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듣자, 즉시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헤로데는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주문을 하면서 그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냅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베틀레헴에서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은 이스라엘 안에 주어졌지만, 길을 묻고, 찾는 사람이 말씀을 만난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마태오복음서의 의도가 보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모두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갑니다. 돈과 권력을 좇아, 어떤 때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도 하고, 이웃을 외면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숨결, 곧 그분의 생명과 연대되어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허무로 돌아가지 않는 생명입니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시게 살아야 하는 인간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의 구유를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여행은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여정(旅程)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별을 보고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의 말씀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였고, 회의(懷疑)에 빠져 그들의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이 준비한 정성을 바치고, 우리의 시야에서 그들은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더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하고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겠다는 마음과 그것을 좇아 떠나겠다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았던 삶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 꾸며주는 온상에서 하느님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남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남을 지배하며 살겠다는 마음에는 말씀의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한 아기의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 길을 가는 우리가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어디다 두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초라하고 고통당하는 약자들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초라한 사람들이 있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의 현실에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보살핌의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그 보살핌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1964년 파리에서 서품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신앙언어>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