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요?(마르 8,34─9,1)

2012. 2. 17. 오후 11:09:07

글자

2012년 2월 17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 8,34─9,1)


 

 

 

 

말씀의 초대

야고보 사도는 믿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고쳐 주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말씀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야고보 2,14-24.26)
).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사람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우신다. 곧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참된 목표는 세상 끝 날에 성자께서 다시 오실 때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마르코복음 8,34ㅡ9,1)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군중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것을 예고하신 말씀 다음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수난의 길을 막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곧 그분께서 하시려는 일이 옳다고 믿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적인 계산을 넘어서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가 잘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계산을 초월합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모습도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고 사랑하는 사람의 삶은 상대방에게 거울이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면서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라.” 하는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열에 참여하여 오늘의 내 삶의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죽음의 길을 가라는 말씀입니다. 오해나 박해를 감당할 모험이나 투신 없이는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 세상에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삶은 고독한 것입니다.

☆☆☆

‘바르나바’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갓난아이처럼 그의 어머니가 밥을 먹여 주고 대소변을 처리해 주어야 할 정도로 중증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잠시도 그를 떠나 있지 못하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볼 때마다 “‘애물단지’를 안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인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정작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애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에서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데, 왜 사람들이 애물단지로만 보는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어느새 그의 어머니는 신앙 안에서 자신이 안고 사는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지고 사는 십자가가 더 이상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은총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복음 나누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르나바가 너무 몸이 아파서 지난주에는 성당에 데리고 가지 못했습니다. 혼자 하는 미사가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갈 때, 바르나바와 함께만 있다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십자가가 없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운명처럼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의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그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며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기쁨과 행복은 이런 사람들의 몫입니다.

☆☆☆

 

 

심리학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느닷없이 3일 후에 죽는다면 당장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이야기해 보라 했습니다. 학생들은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일단 부모님께 전화하고 애인이랑 여행 가고……. , 작년에 연락이 끊긴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그러다 보면 사흘이 가겠지요. , 저라면 부모님과 마지막 여행을 가고, 그다음엔 꼭 가 보고 싶었던 고급 식당에서 비싼 음식을 먹겠습니다. 그러고는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일기를 써야죠.
학생들의 소망은 뜻밖에도 평범했습니다. 여행을 간다. 친구를 만난다. 짝사랑했던 그녀에게 고백을 한다.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교수님은 칠판에다 한마디를 썼습니다. Do it now!(지금 바로 하라!) 교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습니다. 어디선가 읽었던 만화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죽는다고 생각하면 지지 못할 십자가는 없습니다. 지금 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

 

미국의 한 유명한 여자 골프 선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승도 좋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가정의 행복”이라며 가정의 소중함을 전하였습니다. 그녀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였을 때 소원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좋은 엄마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에게는 유명 인사가 누리는 명예나 재력보다는 어머니의 역할이 더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가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만큼 더 중요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요?

반영억라파엘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혹 십자가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그들은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하겠습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합니다. 
                 

-양승국신부-

 

<길동무 같은 십자가>

제게 지워지는 가장 큰 십자가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무래도 제게 있어 가장 큰 십자가는 제게 과중한, 동시에 과분한, 그래서 몹시 부담스러운, 그래서 늘 도망가고 싶은 ‘직책’이었습니다.

꽤나 이른 나이부터 제게 그 부담스런 ‘직책’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직책이란 것이 형제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고, 또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하고,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부담스러운 것이었기에, 또 옷에 잘 맞지 않는 옷같이 불편했기에, 늘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단호하게 거절하고 사양할수록 더 제게 맡겨지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하기 싫다는 사람에게 계속 일을 맡기는 장상들이 밉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지워주시는 신비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직책을 통해서 더 많이 봉사하고, 그 책책을 통해서 더 많이 사랑하고, 그 직책을 통해서 형제적 친교를 위해 더 깊이 투신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부터는 마음이 많이 편해졌습니다.

십자가라는 것, 참으로 묘합니다. 피하려고 하면 피하려 할수록 더 크게 다가옵니다. 도망가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집요하게 쫓아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는 차라리 날 잡아 잡수세요, 하고 두 손 두 발 다 드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마음 크게 먹고, 그러려니 하고, 그냥 십자가를 껴안는 자세가 더 필요합니다. 있는 그대로, 주어지는 그대로 십자가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는 관대한 마음이 요구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때로 정말 수용하기 힘듭니다. 때로 너무나 억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내 십자가만 무거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필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십자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목숨 붙어있는 한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 바꾸려하지 말고, 떨쳐버리려 하지 말고, 몸부림치지 말고, 그저 친구처럼, 길동무처럼, 연인처럼 여기며 그렇게 살아갈 일입니다. 그렇게 마음먹게 될 때 신기한 일이 한 가지 생깁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십자가가 가벼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나를 짓누르던 십자가가 편한 멍에로 변화되는 기적이 생겨납니다.



기러기가족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