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8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말씀의 초대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솔로몬을 찾아온다. 그녀는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점들을 솔로몬에게 묻는다. 솔로몬은 그때마다 막힘없이 지혜롭게 답변한다.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탄복하며,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신 주님께 찬미를 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몸 안에 있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종교 의식을 비판하시며 정결과 부정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을 내리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천주교에서는 죄의 근본에 일곱 가지의 실마리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을 ‘칠죄종’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일곱 가지는 교만, 질투, 인색, 분노, 탐욕, 음욕, 그리고 나태입니다. 교만, 인색, 탐욕, 음욕은 자신의 이익을 지나치게 원함으로써 생기는 죄들입니다. 그리고 질투, 분노, 나태는 자신의 불편을 지나치게 피하려는 데에서 생기는 죄입니다. 이는 모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하여 사랑이 부족한 데에서 생기는 결과이므로, 칠죄종을 극복하는 길은 애덕과 극기의 정신을 기르는 것입니다.
마음의 병이 일곱 가지가 있다면 그것을 치료할 약도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일곱 가지 죄의 실마리를 이겨 내는 일곱 가지 덕목은 무엇일까요? 그 첫째는 남에게 겸손함으로써 교만을 이겨 내는 것이고, 둘째는 남에게 어질고 남을 사랑함으로써 질투를 이겨 내는 것이고, 셋째는 재물을 이웃과 나눔으로써 인색함을 이겨 내는 것이고, 넷째는 참고 견딤으로써 분노를 이겨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집착을 없앰으로써 먹고 마시는 것에만 빠져드는 탐욕을 이겨 내는 것이고, 여섯째는 욕망을 끊음으로써 음욕에 빠지는 것을 이겨 내는 것이고, 일곱째는 하느님을 부지런히 섬기고 착한 일을 함으로써 게으름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밖에 있는 사물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고, 인간의 내면에 사람을 더럽히는 부정의 뿌리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하신 것이지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더럽히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요소들은 우리 마음 안에 잠재해 있습니다. 어떤 것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장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죄의 뿌리는 인간이면 누구나 지니고 있습니다. 나쁜 생각과 악한 마음은 악마가 우리에게 넣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릇된 의지와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들어가는 것’이 더럽힐 수는 없다는 말씀! 과연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살면서 가장 많이 뱉어 내는 것은 말입니다. 말로써 남을 더럽히고 자신도 더럽히는 경우를 수없이 경험합니다. 그러기에 가끔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침묵이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말을 하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문을 잠그고 방 안에 숨어 지내는 것보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악에 물들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 자체에 윤리적 잣대를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어서 ‘죄 되는 음식’도 없고 ‘선이 되는 음식’도 없다는 선언입니다. 당연한 말씀이지만 아직도 ‘음식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는 것이 ‘힘 자체’는 아닙니다. 아는 것을 실천할 때 힘이 됩니다. 어쭙잖게 알아서 남에게 피해 주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요?
모든 음식은 약입니다.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가끔은 음식을 먹는 자세도 돌아봐야 합니다. 급히 먹기에, 홧김에 먹기에, 분노하면서 먹기에 우리의 언어가 급해지고 분노로 얼룩지는 것은 아닌지요? 건강한 삶은 언제나 절제와 함께합니다.
☆☆☆
레위기(11,1-47)와 신명기(14,3-21)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이 내용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먹거나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짐승들이 많이 나열됩니다. 이러한 전통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이스라엘 국민들만의 음식인 ‘코셔’(Kosher: 돼지고기를 포함한 부정한 음식이 들어 있지 않은 이스라엘의 종교 음식)를 탄생시켰고, 특히 정통 유다인들은 이 규정을 엄격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것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이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강조하시면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종교 규정들을 비판하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화를 내는 것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화를 내는 것이요, 기쁜 것도 ‘무엇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한 모든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돌릴 수 있는 마음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음식에 대해 이토록 명확한 답변을 줄 수 있을는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음식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신 것입니다.
음식은 사람을 악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 있을 뿐입니다. 먹어서 ‘악이 되는 음식’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먹어서 ‘선이 되는 음식’도 없습니다. ‘기피 음식’이 있는 것은, 그것을 먹고 많은 이들이 혼이 났기 때문입니다. 음식은 그저 음식일 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대하면 모두가 이로운 음식입니다.
예법은 사람 사이에 허물없이 지내자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예의를 너무 따지면 관계가 오히려 딱딱해집니다. 친밀한 것이 사라집니다. 예법의 노예가 되는 것이지요. 언제라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 예법이 아닙니다.
조상을 섬기라고 제사가 있는 것인데, ‘제사법’이 너무 까다롭다면 제삿날이 귀찮아집니다. 신앙을 도우려는 ‘교회법’인데 신앙생활을 막고 있다면 올바른 법이 아닙니다. 내용은 외면하고 형식만 좇다 보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진리의 말씀입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
반영억라파엘신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쓰려고 하면 더러움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육의 욕망들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하십시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주께서 나를
주께서 나를 어떻게 또 얼마나
주께서 나를 사랑해 또 사랑해 주셨네
이젠 아느냐 이젠 아느냐 널 향한 내 마음 이제 아느냐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 아느냐
사랑의 주님께 이 한마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이 되렵니다
(글 류진미 스텔라, 곡 강훈 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