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사람은 혀를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악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같은 혀로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한다(제1독서).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예언자들을 대표한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예수님 안에서 구약 전체가 실현되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구약의 예언자들이 받았던 고난과 박해를 받으실 것이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을 드러내실 것이다(복음).
1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2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의 입에 재갈을 물려 복종하게 만들면, 그 온몸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4 그리고 배를 보십시오. 배가 아무리 크고 또 거센 바람에 떠밀려도, 키잡이의 의도에 따라 아주 작은 키로 조종됩니다. 5 이와 마찬가지로 혀도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큰일을 한다고 자랑합니다. 아주 작은 불이 얼마나 큰 수풀을 태워 버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6 혀도 불입니다. 또 불의의 세계입니다. 이러한 혀가 우리의 지체 가운데에 들어앉아 온몸을 더럽히고 인생행로를 불태우며, 그 자체도 지옥 불로 타오르고 있습니다.
7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과 길짐승과 바다 생물이 인류의 손에 길들여질 수 있으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혀는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악한 것으로, 사람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9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야고보서 3,1-10)
거룩한변모(다볼산의 예수< 마르코 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다볼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미래를 삽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살아가면서 과거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이미 지난일 입니다.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교훈 삼아 오늘을 살아야지 거기에 매여 있으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거기에 머물렀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좋은 순간이라고 거기에 안주해서도 안 되겠지만 성경이나 신심서적을 읽으면서 느꼈던 마음, 성체조배를 하거나 성체를 모시면서 지녔던 귀한 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데 힘이 되어야 합니다. 등산을 하면서 산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정상에 오른 사람과 오르지 않은 사람이 분명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체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도 하면서 얻은 좋은 기억과 체험이 신앙생활에 활력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헛된 환상을 추구하지는 마십시오. 기도하는데 촛불이 변하였다든지 성모님 얼굴이 나타났다든지…..그래서 다음에 기도할 때는 그 이상한 현상이 또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분심에 빠져 기도 아닌 기도를 한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던 제자 세 사람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빛나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말합니다. 그때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베드로는 황홀한 순간을 목격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구약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예언자의 대표자인 엘리야가 예수님께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완성자이시며 새로운 시대의 창시자이심을 뜻합니다. 구세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려면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하셔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도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신다는 것이 힘이 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은 하느님의 구세사 안에 이미 계획되어 있으니 십자가의 죽음의 길은 당신께서 걸어가야 할 길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때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어두운 시간이 우리에게 닥칩니다. 고통과 시련, 눈앞이 막막한 불확실성에 우리는 힘겨워합니다. 그런 때일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식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계십니다. 우리 삶 안에 모신 그분께서는 알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시어 고귀한 존재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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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늘 셋방을 전전하며 사는 가난한 자매가 있습니다. 오십의 나이를 훌쩍 넘겼지만 한 번도 제집을 가져 본 적이 없이, 재개발 공사에 밀려 여기저기 지하 단칸방을 옮겨 다닌 분입니다. 그분은 입버릇처럼, 어린 시절 가난하지만 이웃과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자신의 초가집이 그립다고 말합니다. 도시 생활의 고단함이 늘 그 자매의 표정 속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그 자매는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싶다는 베드로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고 했습니다. 그저 초막집이라도 좋으니 이리저리 떠날 걱정 하지 않고 어린 시절처럼 그렇게 걱정 없이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주석적 의미와는 다른 대답일 수 있지만, 그 자매의 묵상이 그 어떤 나눔보다 깊이 다가옵니다.
산 위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을 체험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마전장이도 할 수 없을 만큼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충만함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 황홀한 체험 안에서 베드로는 그곳에 주님을 잡아 두고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머리 둘 곳 없이 예수님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고단한 삶을 멈추고, 초막이라도 지어 그 충만한 기쁨에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자매가 어린 시절 가난의 그 고통과 초가집의 불편함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시절의 삶이 그리운 것은, 사실은 그 고향 집이 아니라, 마음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은 어떤 그리움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그리움의 끝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에 있음을 잠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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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천상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앞으로 어떤 환란이 닥치더라도 지금의 모습을 기억하며 용기를 잃지 말라는 의도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모세와 ‘예언자 엘리야’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좋아 초막을 짓고 함께 지내자고 합니다.
유다인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종말에 다시 온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지 않고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준비’를 위해 온다고 답변하십니다. 그러면서 세례자 요한을 암시하십니다.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면 누구나 ‘엘리야’가 되고 ‘세례자 요한’이 됩니다. 우리 주위에도 엘리야는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사람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기 싫은 일’이 엘리야일 수 있습니다. 하기 싫은 교회 활동이 요한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 활동을 오해합니다. ‘하도 하라니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끌려가는 신앙생활입니다. 오히려 한 걸음 앞선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도처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엘리야와 요한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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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오르신 뒤 거룩한 모습으로 변하십니다.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거룩하고 새하얗게 빛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부활 이후의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때 구름 속에서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시라는 말씀을 해 주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해 주십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모두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이유는 그들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진정한 부활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을 잃고 난 다음 스승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자신들도 따라야 할 운명에 놓일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나약한 제자들은 그러한 십자가의 길에서 좌절감을 맛보고 중도에 포기하려는 유혹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럴 때에 제자들이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억하여, 믿음과 바람을 지니고 끝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지고 나갈 힘을 내게 하시고자, 당신의 변화한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신지를 잘 느낄 수 있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