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6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악을 버리고 선을 실천한다면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이사야 1,10.16-20).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교만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처럼 살지 말라고 하시며,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마태오23,1-12).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높은 지위나 명예는 많은 사람이 지향하는 목표이며, 때로는 삶의 자극제가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정당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들에게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칭찬과 인정이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심만을 채우려는 것일 때 그는 결국 심신이 허약해질 것이며, 그가 속한 공동체도 오래 지탱되지 못할 것입니다. 남을 위해 살아가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고, 그리하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와 몸도 더욱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건 없이 봉사하는 이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봉사는 남을 위한 일이지만 봉사하면서 얻는 기쁨과 보람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
유다인들은 성전 율법 규정에 따라, 겉옷 가장자리에 자줏빛 끈으로 장식한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기억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을 언제나 명심하도록 하는 구실을 했습니다. 또한 성구갑을 만들어, 그 안에 구약 성경 구절들을 적은 양피지를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늘 율법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율법을 사랑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유난스럽게 겉옷에 술을 길게 만들었고, 성구갑도 남들 눈에 띄도록 크게 만들어 달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인사받기 좋아하는 그들은 뭔가 달라 보여야 했습니다. 허영심과 우월감이 높은 사람들의 심리가 의복이나 가식적인 행동으로 겉치레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의 이런 껍데기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명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재물을 소유하며 과시하는 것은 다 같은 심리입니다.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감을 받으려면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치장해야만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내적으로 비어 있는 사람일수록 늘 남의 눈을 의식하며, 이런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내적인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는 행동은 결국 겉꾸밈으로 흘러 금방 그 힘을 잃고 맙니다. ‘무늬만’ 신자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남을 섬기고 자신을 희생하는 내적인 겸손 때문입니다.
☆☆☆
잘 익은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입니다. 알이 꽉 차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짜 벼’는 고개를 숙이고 싶어도 숙여지지 않습니다. ‘알맹이’가 없는 탓입니다. 가을 들판이 되면 어디서나 드러나는 모습입니다. 대충 보더라도 어느 것이 가짜 벼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자리가 높아지면 웬만한 사람은 착각합니다. ‘대단한’ 사람이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람은 ‘그대로’이고 자리만 높아진 것인데, 그걸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습니다. 점차 ‘마음의 고개’도 숙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뻣뻣한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알맹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이 많을수록 가짜가 판치는 세상이 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복음 말씀도 ‘자리의 유혹’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현대판 바리사이’는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섬김의 자리에 앉았건만 ‘섬김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을 ‘자신의 판단’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어의 이해한다는 말은 ‘언더스탠드’(understand)입니다. 직역하면 ‘아래에 서다’이지요. 상대에게 맞추어야 이해가 가능해진다는 암시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자리에 가든 고개를 숙입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가벼이 보지 않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렇다고 ‘육친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린이의 신앙’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나를 있게 하신 분이며, 삶의 모든 것을 지배하시는 분입니다.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다.” 진리는 주님께만 유보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이론도 그분 앞에선 ‘참고 사항’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아는 사람’은 고개를 숙입니다. 낮추어야 할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스승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인지천산 불여 천지일산’(人之千算不如天之一算)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 번’을 계산해도 하늘이 ‘한 번’ 계산함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하늘이 한 번 봐주는 것에 못 미친다는 말과 같습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늘의 힘이 개입하기에 그렇습니다.
☆☆☆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사야에게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말은 이사야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이사야에게서는 다른 우상들과 절대 공유되어서는 안 되는 독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지 않는 삶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배척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갖 종류의 우상 숭배와 하느님의 눈길을 피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교만은 반드시 단죄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사야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활을 버리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형식적인 예식으로만 일관하는 이스라엘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 믿음을 증언하라고 외치고 있으며, 이렇게 하느님께 돌아온 죄인들은 그 죄가 아무리 다홍같이 붉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용서로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과,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 신앙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가르침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
예수님을 중심으로 103위 성인의 모습을 담아 천정을 장식하였고, 제대를 중심으로 12사도의 상징과 조각으로 벽면을 장식하였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서 구산성지에 들렀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무덤이 있고 그 후손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입니다. 구산성지의 정문을 비롯하여 성모상, 예수 성심상, 십자가의 길, 야외정자 및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당은 아늑하고 평화롭게 나무와 흙을 이용하였고 벽면은 묵주기도를 묵상 할 수 있도록 섬세한 조각 작품들이 봉헌자들의 이름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구석구석 하나하나에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이 들어갔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도 성모순례지를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자를 거꾸로 하면 ‘푹’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삶이 뒷받침될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고 하셨습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마음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 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