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루카15,1-3. 11ㄴ-32)

2012. 3. 10. 오전 6:48:37

글자
3월 10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 루카15,1-3. 11ㄴ-32


작은아들의 회개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의 묵상

    두 아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어리석을 정도로 착한 아버지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은 재산을 물려받자 곧바로 객지로 떠납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던 가출입니다.
    돈을 손에 쥔 그에게는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까운 돈을 물처럼 다 써 버렸습니다
    .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했을 때 ‘몽땅 날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해야만 정신 차리고 돌아올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돈이 떨어진 작은아들은 힘이 없었습니다.
    돈 힘으로 살아왔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이 비참함을 체험할 때 은총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작은아들은 처참한 상황에서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합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을 맞아 줄 아버지의 ‘여러 모습’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꾸중하는 모습입니다. “네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그 많은 재산을 다 어떻게 했느냐?” 분노하는 모습 앞에서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다음은, 침묵하는 모습입니다. “잘 왔다.”는 말씀도, “왜 왔느냐?”는 물음도 없는 차디찬 모습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은 꾸중하는 아버지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라는 것이 복음의 교훈입니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작은아들은 이 말을 오랫동안 연습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품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말없이 내어 줍니다. 작은아들도 놀랐지만, 큰아들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섬겼지만’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지 않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작은아들은 재산을 손에 쥐자 서둘러 떠납니다. 인사 한마디도 없이, 혹시나 아버지 마음이 변할까 봐 연기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철없는 아들에게 거금을 쥐어 준 것일까요? 가져가면 분명 날려 버릴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는지요?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유산이 있는 한,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선뜻 주었던 것입니다. 재산보다 아들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판단처럼 아들은 재산을 다 날립니다. 거저 생긴 것이었기에 물 쓰듯 써 버렸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자 고생과 굶주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인생의 눈’을 뜹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실패와 좌절은 곧바로 은총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주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 역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니셨음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실패 속에서도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찾아봐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언제나 넉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스카 쉰들러(1908-1974년)는 독일인 사업가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나치에 협력해 돈을 많이 벌었으나 그 재산으로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하여 천이백여 명의 유다인들을 구해 낸 인물입니다. 그의 이러한 선행이 전설과도 같이 입으로 전해졌지만 그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뒤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구제받은 유다인들의 명단 원본이 발견되자, 오스카의 일생은 단번에 영웅적인 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는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와 독일의 유다인 수용소 소장의 술좌석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오스카가 “선의 극치는 용서입니다.” 하고 수용소 소장에게 말하자, 그는 처음에는 이 말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유다인들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고 용서를 실천해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통하여 선을 체험해 보고 싶었던 소장은 이내 다시 자신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예전처럼 유다인들을 거리낌 없이 죽이고 맙니다.
    수용소 소장이 용서를 끝까지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은 용서에 대한 체험, 곧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라틴 말 속담처럼, 스스로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남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방탕한 생활을 접고 돌아온 작은아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나중에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탕자의 비유’라는 이야기로 많이 들어 왔던 내용입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 착각하며 삽니다. 그러기에 그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고마워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히 그에게는 삶의 애절함이 없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달라며 떼를 씁니다. 마침내 돈을 손에 쥐자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큰아들의 불평을 미루어 보건대, 아버지는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헛된 낭비를 하거나 인심을 마구 쓰는 헤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재물을 두말없이 작은아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재산을 믿고 있는 한, 이 아이는 영영 사람 되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넓고 깊었습니다. 그러기에 작은아들의 무례를 받아 줍니다. 결국은 재물을 날리고 고생할 것을 알았지만 허락합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참사람이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현명하고 사랑이 많았습니다. 앞을 내다봤고, 결국은 아들이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 역시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지니셨다고 비유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삶의 고통에는 그분께서 주시는 의미가 숨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유산이 자식을 망친다.”고. ~~~




<괜찮다, 다 괜찮다>


   날씨가 오락가락하지만 이제 또 다시 형제들과 어줍잖은 ‘아마추어 농사’를 슬슬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언젠가 하루 온종일 퇴비와 씨름한 적이 있었습니다. 냄새가 제대로인 퇴비를 한 트럭 실어왔습니다. 밭에 도착해서 골고루 뿌렸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형제들이 다들 코를 쥐고 뒤로 물러나더군요. 강력한 퇴비냄새가 온 몸에 배였던 것입니다.


 오늘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더했겠지요. 그는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탕진해버리고 살길이 막막해지자 돼지 치는 농장에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주로 했던 일은 어떤 일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생산해내는 막대한 배설물들을 계속해서 치우는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마땅히 갈 곳 없다며 취직자리 알아봐달라는 ‘의지가 약한’ 그래서 늘 떠도는 한 형제를 돼지 치는 농장에 보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월급도 그만하면 괜찮고 시골이라 돈 쓸 일도 없고, 금방 돈 모으겠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사흘 만에 전화가 왔습니다.

 “신부님, 저 여기서 도저히 일 못하겠어요. 냄새 때문에 돌아버리겠어요.”
 제발 조금만 더 견뎌보라는 말에 그 형제는 제게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신부님이 여기 와서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일해보고, 그런 말 하라구요!”

 그때 저는 돼지농장하시는 분들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살길이 없음을 알게 된 둘째 아들의 마침내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고, 드디어 발길을 아버지 집으로 돌리게 됩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둘째 아들의 몰골을 떠올려보십시오. 가관입니다. 제대로 씻기나 했겠습니까? 땀 냄새, 돼지 배설물 냄새, 별의 별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발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맨발입니다. 머리카락은 산발에다 떡 진 머리입니다. 옷은 갈아입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기억 못합니다. 거지 중의 상거지 꼴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사람마다 다들 코를 움켜쥐고 멀찌감치 피해갔습니다. 그가 지나가고 나면 다들 투덜거렸습니다.

 “저게 사람이냐, 짐승이냐?”

아버지 집 가까이 이르러서는 따가운 눈총들이 더 심했겠지요.

“야, 저게 누구냐? 그 싸가지 없는 둘째 아들 아냐? 꼴좋다! 천하의 불효자식 같으니라구! 빈대도 낯짝이 있지. 그러고도 지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

다들 한 목소리로 둘째 아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쌍욕을 해댔겠지요.


그러나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유일하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왜 그랬냐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싸가지 없는 자식이라며 뒤통수를 치지도 않습니다.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며 다그치지도 않습니다. 돈 얼마 남았냐며 호주머니를 뒤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말없이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품에 끌어 앉습니다. 한손으로는 내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치지 않겠노라며 끌어안습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괜찮다, 다 괜찮다, 너만 살아 돌아왔으면 다 괜찮다며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십니다.

자비하신 우리 하느님의 얼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사랑을 기억하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저는 램블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좋아 합니다. 그 그림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아버지의 눈은 사시가 된 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는 집나간 아들이 그리워 마음과 눈이 늘 아들에게로 향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한결같고 또 그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무릎을 꿇은 작은 아들은 다 닳아버린 신발 때문에 발바닥을 드러낸 채 아버지의 가슴에 모두를 맡겨버렸고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한 구석에서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한 여인이 이 장면을 애달프게 지켜보고 있는데 어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면 방탕한 삶을 멀리하는 표현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들이 용서를 청하든 그렇지 않든 돌아온 것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며 내가 알기도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 하느님아버지가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매끈한 오른손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투박한 왼 손이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은 지팡이를 쥔 채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회개한 작은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옛 생활을 버리고 아버지께 돌아왔는데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집의 처지가 밖에보다 못하였다면 그는 아버지 집을 구지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넉넉함을 기억한다는 것은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큰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모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루카15,12). 하여 자기 것을 챙겨서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한 것입니다. 반면 큰 아들은 아버지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랑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루카15,29) 하며 투정을 부렸습니다. 몸은 같이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더 문제입니다.
큰 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두 아들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며 아버지 품을 그리워 하는 사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품에서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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