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1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45-56)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바빌론으로 유배 간 이스라엘 자손들을 다시 데려오시고, 남과 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을 한 민족으로 모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다시 맺고 그 계약은 영원할 것이라고 예고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칠 고난과 죽음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광야로 돌리신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회상하고 기억하며 당신의 소명을 다시 확인하실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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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도랑이나 하천가 양지바른 곳에 어김없이 자라는 풀이 ‘고마리’라는 풀입니다. 오염된 시궁창이나 도랑에 난 이 풀을 쓸모없는 잡초쯤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고마리’는 수질 정화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물의 오염이 심할수록 그 뿌리가 발달해서 더욱 잘 자라나고 물을 정화시키는 힘도 그만큼 커집니다. 오염되어 악취가 진동하는 곳에서 자라나 흘러가는 물을 맑게 해 주는 이 풀은 참으로 고마운 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풀을 ‘고마운 풀’로 불렀는데 그 말이 변해서 지금의 ‘고마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으로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시려고 스스로 수렁으로 들어서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염된 시궁창을 맑게 해 주는 ‘고마리’와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 신앙인도 ‘고마리’처럼 살아서 세상을 맑게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고마리’가 되려면 악취 나고 오염된 수렁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탐욕과 이기심의 수렁에 나눔과 공생의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미움과 폭력의 도랑에서 사랑과 평화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를 비우고 죽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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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희생양’은 있습니다. 죄와는 무관하게 사라진 이들은 역사 안에 수없이 많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런 희생양으로 예수님을 선택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이끄심이었습니다. 다음 말은 ‘카야파’ 대사제의 발언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예수님께서 백성을 선동하시어 로마에 반기를 들까 봐 우려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 군인들’이 성전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한다는 논리입니다. 하지만 핑계입니다. 유다인의 최고 의회였던 ‘산헤드린’의 재가를 얻으려는 설득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전통’을 과감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이 부담스러웠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희생양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받아들이려 애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닮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은 은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상황의 반전’을 만나게 하십니다. 당신의 부활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희생은 언제나 또 다른 축복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억울함을 당하고 불평등을 체험하게 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끝은 언제나 부활입니다. 우리는 ‘그 부활’을 희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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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나오는 ‘최고 의회’는 유다인들의 ‘산헤드린’을 번역한 말입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협조자들을 뽑았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70명가량을 선별한 뒤 자신을 돕게 했습니다. 이 조직이 훗날의 산헤드린으로 발전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와 지방 유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산헤드린’을 인정했고,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그들의 판단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서서히 로마의 비위를 맞추는 조직으로 바뀐 이유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이곳의 결정으로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와 바오로 사도 역시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은 로마와의 충돌을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키면 로마의 개입이 시작되고,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불행’에 직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활동을 불순하게 보았고, 민중을 선동하는 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카야파 대사제는 ‘민족의 멸망보다는 한 사람의 죽음이 더 낫다.’는 논리를 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이 여전히 ‘민중의 선동자’입니다. 고정 관념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음을 비우지 못한 결과입니다. 선입관을 극복해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요한 11,45-56)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됩니까? 왜 나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 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의 희생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 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 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사랑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모든 것이 다 제 불찰입니다>
-양승국신부-
가난한 지역에 위치한 한 중학교에 끔찍이도 아이들을 사랑하시던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얼마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셨고, 아이들을 따뜻이 보듬어주셨는지 하루종일 아이들은 선생님 주변을 떠날 줄 몰랐습니다.
한번은 상습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던 반 아이 한 명이 된통 크게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있다고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이의 집에는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학교로 전화를 한 것입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즉시 경찰서로 출동한 선생님은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번 건수는 워낙 금액도 크고 피해자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어서 아무래도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아이가 그 모양이 되기까지 자녀교육에 무관심했던 부모의 탓이 가장 컸겠지요. 또한 열악한 학교 교육제도의 탓도 클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주변환경의 탓도 무시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의 잘못을 오로지 자신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선생님은 경찰관 앞에서 오직 이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제가 이 아이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제가 아이의 담임으로서 역할을 소홀히 했습니다. 다시 한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우연히 담임을 맞게되어 만나게 된 한 사고뭉치가 저지른 잘못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선생님 앞에서 경찰서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경찰서에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무죄고 모든 것이 상대방 탓이라고 우겨대는 것이 보통인데,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선생님 앞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저지른 모든 잘못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선생님의 삶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속죄양" "희생양"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모든 죄와 악습과 우상숭배를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 청하시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한평생은 오로지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속죄양으로서의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식들의 그릇된 삶, 결정적인 실수, 크고 작은 잘못들을 자신의 부덕(不德)으로 여길 때 우리는 또 다른 속죄양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부족함과 비행과 버릇없음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선생님의 삶은 진정한 희생양으로서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