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없다 (요한10,31-42)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12. 3. 30. 오전 7:23:06

글자

2012년 3월 30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 이다.”
(요한 10,31-42)

 

  

 

말씀의 초대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마고르 미싸빕’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사방에서 공포’라는 뜻이다. 예언자로서 예레미야가 겪은 고통스러운 삶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사방에서 다가오는 조롱과 박해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께 찬양을 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께서 하느님의 일들을 하셨고,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과 하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며 돌을 던지려고 한다.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그 구실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증거를 찾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죄목에 맞는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이 나오도록 유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하자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두고 따집니다.
종교적 전통과 율법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편에 있지 않으면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도 그러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릇된 신념이나 편견과 고집으로 꽉 찬 사람들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까지도 일으킵니다. 폭력과 살상을 해서라도 자신들의 신념과 종교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내 신념이나 주관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올바로 점검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
유다인들은 돌을 던져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섬긴 것이 ‘아닌’ 결과가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출현을 노래했지만, 정작 오시니까 ‘거짓 예언자’라고 합니다. 성경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메시아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모르기에 돌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기에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종교 때문에 살인을 기획했다면 광신입니다. 미친 믿음이지요. 자신들은 의로움을 내세우지만, 진실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이려 들면 상대도 나를 죽이려 듭니다. 내가 남의 종교를 비난하면, 그들도 내 종교를 비난합니다. 신앙이 아니라고 우기면, 결과 역시 마찬가지로 돌아옵니다.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된 현실입니다.
타인의 종교에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기본 예의는 갖춰야 합니다. 종교를 떠나 해석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문화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려 드는 것은 참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럽 종교가 얼마나 우수한 문화를 말살시켰는지 역사는 알고 있습니다. 타 종교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꼈다면 이제는 벗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유다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 
예레미야는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반드시 복수해 주시리라 확신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벌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로 미루어 보아, 예레미야는 그의 행동에 꼬투리를 잡거나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술수를 꾀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임이 확실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자들의 음모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하느님께 그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레미야의 청원은 하느님께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공동체적인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백성에게 박해받는 예레미야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처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저주하고 배척하며 벌을 내려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시며 그들을 하느님께 봉헌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이 가슴 깊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10,31-42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다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 하십시오!
사랑합니다. 

김종업 ( (2012/03/30) : 처음 신부님을 뵈었을땐 곱상함과 여성스러움을 느꼈습니다.~접해볼수록 신부님 안에 사랑이 얼마나 크시면 한시도 하느님 사랑을 말하지 않으시면 안되시니 말입니다.~신부님 덕분에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깨우쳐 갑니다. 영육간에 건승하세요. 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 rlawhddjq)


"그때에 유다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

-양승국신부-

<짱돌>

어린 시절 저는 장난이 유난히 심했습니다. 당시 동네 마다 텃세란 것이 있었고, 때때로 동네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가 몰려 나가 다른 동네 아이들과 연탄재 싸움도 많이 했었지요. 싸움이 격해지다보니 연탄재가 아니라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동네 아이들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퇴각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저는 뒤통수에 뭔가 크게 와 닿는 둔탁한 충격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혼절한 상태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적십자 병원으로 실려 갔지요. 한참 만에 깨어났었는데, 어질어질했습니다. 후유증도 대단했습니다.

그 전에는 제가 산수 문제도 곧잘 풀곤 했었는데, 그 때 충격 탓인지 그 뒤로 공부와는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치명적인 살상도구인지 그 때 잘 알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예수님의 논리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유다인들은 화가 잔뜩 난 나머지 예수님을 향해 돌을 집어 듭니다.

그 누군가를 향하여 돌을 집어 든다는 것,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보편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정상적인 사고방식, 기본적인 상식을 지닌 인간들 사이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돌은 일종의 흉기입니다. 돌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흉기를 집어 들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결국 돌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살의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철저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철저하게 왕따를 당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동족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진정 그 어떤 민족에 앞서 가장 먼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몰라주고 자신을 끝까지 왕따시키는 동족 유다인들,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돌까지 집어든 동족들의 모습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노보다는 서글픔이, 미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신성모독죄를 저지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다고 따지던 동족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고 안타까워 할말을 잊으셨습니다.

아무리 눈을 뜨게 하려고, 아무리 깨닫게 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끝까지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동족 유다인들 앞에 예수님은 조용히 상황을 종료시키고 빠져나가십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 오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진지하게 찾아나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우리 삶 한 가운데 머물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감고 영혼의 눈을 뜨게 되는 순간, 창조 때부터 머물고 계셨던 하느님, 우리 인생 역사 시초부터 함께 자리하고 계셨던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굳게 닫혀있었던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이미 우리 안에 와계신 하느님 그분의 자취를 발견하는 소중한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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