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3일 성주간 화요일
“주님, 그게 누굽니까?
(요한 13,21-33.36-38)

말씀의 초대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이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민족들의 빛으로 삼아 주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다.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자 유다는 자신의 일을 하러 어두운 밤 속으로 사라진다(복음).
유다는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지 못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유다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고, 돈 때문에 결국 스승을 팔아넘기게 된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또 하나의 이유는 자기 뜻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로마에게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여러 번 경고하시면서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귀담아 듣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 떠납니다. 유다는 빛에서 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유다가 밖으로 나간 시간이 밤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마음속도 밤이었다는 뜻입니다. 유다는 이제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1티모 6,10)라고 했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과 욕심이 지나치면 돈은 우리를 멸망의 길에 빠뜨립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이 예수님의 것과 다르면 자신을 굽히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유다를 통해 거울 속에 비친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나는 과연 소유에서 자유로운가?’ ‘나는 하루하루 삶에서 주님의 뜻을 물으며 살고 있는가?’
유다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어제 복음에서 본 것처럼 유다는 셈이 참 빨랐습니다. 세상의 이치에 밝은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 드린 순 나르드 향유의 가격이 얼마인지 그는 그 가치를 금방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 가운데 세리 마태오를 제치고 제자들의 돈주머니를 관리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 제자단의 재무를 담당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예수님 일행에서 떠납니다. 유다는 본능적으로 예수님께 닥칠 위기를 감지했나 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늘어났지만 당시 유다 사회를 이끌고 있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능적으로 계산이 빠른 유다는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스승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껏 보아 온 예수님의 능력이면 위기 때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일이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유다는 빛을 떠나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남에게 빛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의 밤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보입니다. ‘유다의 밤’은 바로 이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자기 안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스승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도 사랑도 없습니다. 끊임없이 계산하고 판단하는 냉혹한 생존 본능만 남게 됩니다. 마음 밑바닥까지 주님은 없고 철저하게 자기만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유다의 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어둠입니다
‘배신’은 믿음과 의리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평생 ‘후회할’ 일인데 일부러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찮아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역사 안에는 숱한 배신과 배은망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감을 얻은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개인적인 욕심이었습니다. 아무리 명분이 거창해도 시간이 지나니까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조금씩은 배반합니다. 은혜를 잊고, 도와준 것을 망각합니다. 조금 섭섭하다고 예전의 좋았던 관계마저 의심합니다. 푸념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면서 소문에는 민감하고, 베푸는 일에는 냉정해집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의 모습입니다.
유다는 명석했습니다. 주님께서 ‘먹고 자고 관리하는 일’을 맡길 만큼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매일 그는 기적을 체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미루어 보건대,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엉뚱한 생각이 자리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는 유다의 모습이 없는지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감사의 시각’으로 보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남의 것을 기웃거리게 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우직한 사람’도 마침내 자만하게 됩니다. 감사와 겸손이 언제라도 삶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유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의 배반을 알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무리 동기가 옳아도 배신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유다 역시 스승님을 따라나섰던 사람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에게 ‘차가운 마음’이 들게 했을까요? 그를 움직였던 분명한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만이 배신을 합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배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계산하고 따지기에 등을 돌립니다. 이해타산에 얽히기에 배신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모두 ‘판단의 잘못’입니다. 영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원인입니다.
복음의 베드로 역시 스승님의 예언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수를 바로잡았기에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뉘우침이 빨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순간의 잘못을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결과는 파멸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겁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돌아서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살다 보면 우리를 붙잡는 말들을 만납니다. 사건들을 만납니다.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느낌이 앞섭니다. 그때 멈춰야 합니다. 그 순간 멈출 수 있는 힘을 지니라고 작은 시련들이 끊임없이 주어집니다. 진정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을 예언하십니다. 또한 베드로의 배반까지 예고하십니다. 유다는 스승의 말씀에 밖으로 나갔지만 베드로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펄쩍 뛰었을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말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스승이 붙잡히자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주위를 맴돌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합니다.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했는데 막상 부딪히자 엉뚱한 말이 튀어나온 겁니다. 그것도 스승의 예고처럼 세 번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굳이 배반이라 몰아세울 수 있을는지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모른다고 말했을 겁니다. 어정쩡한 자세였기에 마음에 없는 말이 튀어나왔을 겁니다. 베드로는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의 은총이 내리지 않은 탓입니다.
누구라도 은총이 없으면 흔들립니다. 아무리 우직한 사람이라도 은총이 붙잡아 주지 않으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겸손해야 합니다. 쉽게 장담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용서를 전제로 한 말씀이었습니다
배신의 죄보다 자비가 크다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하게 되며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마침내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의 자살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겠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 유다의 배신, 자신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스승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자신 만만해 하는 베드로를 봅니다. 주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지요? 어떤 상황 안에서도 겸손하게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 어쨌든, 사랑하라
주일 저녁미사를 다녀온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아내에게 평상시와는 다르게 무척 잘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내는 신부님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려고
과일바구니를 들고 사제관을 찾아갔습니다.
“신부님, 어제 주일 저녁미사 강론이 무척 좋았나 봅니다.
남편이 얼마나 잘해 주던지.... 말씀주제가 ‘아내를 사랑하라’였죠?”
신부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아닌데요. ‘원수를 사랑하라’였습니다."
유다와 베드로
- 이연수-
예수님은 이제 당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죽고 들어 올려지며 영광스럽게 되는 그때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아신 것이지요.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며 당신을 배신할 유다에게 적신 빵을 건넵니다.
유다는 빵을 받아들고서는 바로 밖으로 나갑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 밤은 사탄이 활개를 칠 때입니다.
유다는 이제 세상의 빛에서 나와 자신의 스승 예수를 배신하고, 그분을 죽이려고 음모를 꾀한 이들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유다가 떠남으로써, 이제 사람의 아들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들어 올려지고 하느님은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영광스럽게 되는데, 그분의 죽음이 하느님의 영광을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하느님이 계시되는 시간이자 장소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와 더불어 인간적 모습을 보여 주는 또 한 명의 제자가 있으니,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객기를 부리며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합니다.
‘지금은’이란 표현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그분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나약한 제자들로 대변되는 현재의 순간을 말합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런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지금은’ ‘나중에는’ 모두 우리네 모습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할 몫이지요.
우리가 갈 길은 오직 화해와 평화의 길뿐 !
- 김정택 목사-
예수님의 길은 오직 화해와 평화의 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길이 십자가형으로 직행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아직 이 길을 걸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 목사로서 북한 주민에 대해 항상 참회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 말씀을 회복하기 위해 그 리고 자신의 미움을 치유하기 위해 참회하는 마음으로 북한 주민의 굶주림에 응답해야 합니다.
2009년 가을부터 우리나라 쌀값이 엄청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매년 40만 톤씩 북한에 보내던 쌀을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농민은 보수나 진보를 따질 것 없이 북한에 쌀을 보내라고 성명도 발표하고 시위도 했습니다. 정부는 사료로 돌리는 방안과 가난한 나라에 원조하는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2010년 가을, 저는 인천지역에서부터 종교인 · 보수 · 진보를 떠나 북한 형제의 굶주림에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모든 종교계 · 문화언론계 · 노동계 · 여성계 · 시민사회단체 등이 참여해 ‘북한 수재민을 위한 인천쌀 보내기 운동본부’ 가 결성되어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평도 포격사건’ 이 터졌습니다. 곧바로 전쟁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모금을 나갔다가는 몰매 맞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화해와 평화이고, 먹을거리 평화입니다. 입에 풀칠을 해야 북한 주민이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순식간에>
언젠가 한 본당에 특강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따라 성당이 꽉 찼습니다. 감사하게도 다들 초롱초롱한 눈으로 시종일관 부족한 제 강의를 경청해주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없던 힘까지 생겨 정말 열심히 강의를 펼쳐나갔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정말 잘 됐습니다. 우레 같은 박수갈채 속에 강의 끝나고 나오는데 몇몇 신자 분들은 따라오시면서 그러셨습니다. 신부님, 강의 너무 좋았습니다. 신부님, 내년에도 또 오세요. 신부님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젊으세요. 신부님 여기 싸인 좀 해주세요.
그런 신자들의 반응에 저도 모르게 갑자기 우쭐해졌습니다. 기분도 아주 좋아졌습니다. 마치 잘 나가는 연예인이라도 된 듯 어깨에 잔뜩 힘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봉고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순간, 상황은 사뭇 달라졌습니다. 시간이 벌써 밤 10시가 다되어가는데, 저녁도 아직 못 먹었으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일한 생각 한 가지, ‘빨리 고속도로 휴게소 도착하면 맛있는 우동 한 그릇 사먹어야지.’
그러나 그것도 그날따라 여의치 않았습니다. 가끔씩 문제가 생기던 봉고차가 그날따라 무슨 심통이 났는지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멈춰서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겨우 갓길에 섰습니다. 긴급 출동 서비스를 불렀습니다.
불과 한 시간 전, 잘 나가던 제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 순간에 저는 완전히 찌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껌 짝짝 씹는 노란머리 출동 서비스 청년이 운전하는 견인차 조수석에 벌 서는 학생처럼 쪼그리고 앉아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하며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 역시 제가 했던 경험과 비슷한 상황을 맞이합니다. 예수님께서 활기차게 공생활을 펼쳐나가시던 시절,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까지 덩달아 잘 나갔습니다. 자부심도 대단했고, 그야말로 기고만장했습니다. 스승을 향한 믿음, 의리, 신뢰심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하는 말 좀 들어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그러나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열렬했던 베드로의 믿음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예고하신대로 닭이 울기 전, 그 짧은 시간 안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치욕적인 배신행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부족한 우리네 인생, 그야말로 순식간입니다. 단 한치 앞도 예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꽤나 잘 나간다고 자부심이 대단하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 못하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오늘 내가 두발로 힘차게 거리를 활보하지만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 못합니다.
베드로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한 하루 앞의 일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작업을 하시는데, 바로 바닥으로 내려 보내기 작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고만장해있던 베드로의 기를 제대로 꺾어놓으십니다. 스승을 떠나서는, 스승이 아니라면 베드로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하시려고 ‘수제자 배반사건’을 통해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 보내십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적나라한 실체, ‘아무것도 아님’을 온 몸으로 파악하게 하십니다. 이런 쓰라린 작업을 통해 베드로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부터 다시 한 번 스승과 제자 사이의 참다운 영적 여정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지속적인 겸손입니다. 나 자신의 실체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하니, 내가 이렇게 죄인이니, 오직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지속적인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 구인회-
오늘 복음을 읽으면, 마치 확고한 신앙 안에 산다고 믿는 우리도 혹시 일상에서는 자주 예수님을 잊고,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유다처럼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36절) 하고 묻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며, 지금은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이 올 수 없지만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다고만 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죽음을 거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에게 오늘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분을 향해 다가가는 하루하루를 기쁜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씨를 뿌리고 가꾸며 노고를 바쳐야 할 때는 자비를, 열매를 거둘 때는 찬미와 감사를, 혹여 오늘 이루지 못한 성과는 다음 기회가 허락될 것이라는 희망을 두고 기다림의 덕을 쌓아가며 그분이 가신 길을 잘 따라갈 수 있어야겠다.
"Master, who is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