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4일 성주간 수요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14-25)
"Surely it is not I, Lord?"

말씀의 초대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는다. 주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주님께서 곁에 계셔서 도와주시니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다는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오히려 되묻는다(복음).
오늘의 묵상
지난해 연말, 어느 기업 회장이 타계하기 전에 종교에 대한 질문을 한 내용이 한 일간지에 나왔습니다. 그가 남긴 여러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께서는 왜 악인을 만드셨는가?”라는 것입니다. 살면서 우리도 가끔 던지는 물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히틀러와 같은 악인을 만드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왜 유다와 같은 배신자를 제자로 삼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매우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주시려는 대상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신 까닭에 인간에게 ‘자유 의지’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식칼을 만든 사람은 사람들이 그 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 칼은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칼을 만든 사람의 바람대로 사용되어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는 데 쓰입니다. 그러나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칼을 만든 사람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채 사용되어 사람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이 악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자유 의지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을 남용한 유다는 결국 죄의 노예가 되어 영원히 자유를 잃고 맙니다.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 의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왜 제자로 부르셨을까요? 뻔히 배신할 줄 아시면서 유다 같은 사람을 왜 제자로 삼고 발을 씻어 주시고 빵을 함께 나누셨을까요?’ 누군가 불만스러운 듯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해 왔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따지고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를 부르실 때 따지고 계산해서 그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어부면 어부인 대로, 세리면 세리인 대로 사랑은 존재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어쩌다 그들이 나중에 당신께 침을 뱉고 돌아서도, 값을 매겨 짐승처럼 당신을 팔아넘겨도 있는 그대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로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되었지만 우리 또한 얼마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삽니까? 그래도 우리를 불러 주시고 사랑하시는 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유다 모두 배반자로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라도 가겠다고 큰소리치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문지기 하녀 앞에서도 쩔쩔매며 예수님을 배반합니다(루카 22,33; 마태 26,69-70 참조). 그런데 유다와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배반을 했지만 먼발치에서라도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반대로 유다의 시선은 끝까지 자신에게 가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보지 못하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자살을 하고 맙니다.
우리가 같은 죄의 어둠 속에 있어도,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스러운 어둠’이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새벽을 기다리는 어둠’이 됩니다. 우리 모두 늘 주님을 배반하며 사는 죄인이지만, 그리고 미사에 참례하고 같은 빵을 나누며 살지만, 베드로와 유다처럼 다른 운명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안에 갇혀 있느냐, 주님을 향해 열려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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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스승님을 팔아넘기는 대가로 ‘은돈 서른 닢’을 받습니다. 그가 먼저 수석 사제들에게 제안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정말 돈 때문에 그랬을까요? 배신의 원인이 돈이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삼 년을 제자로 있던 사람이 다만 돈 때문에 돌아섰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돈 때문에 망치고 있는 이들을 봅니다. 돈 빌린 사람이 ‘갚지도 않고’ 성체를 모신다고, 성당에 안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거래 때문에 ‘대부 대자’ 관계인 사람들이 법정에 서는 것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가 ‘멍든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보다 돈을 먼저 생각한 결과입니다.
유다 역시 스승님보다 ‘다른 무엇’을 우선으로 여긴 것이 아닐는지요? 그러나 결과는 배신이었습니다. 그는 스승님을 배반하고 자살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용감한 일입니다. 하지만 내적 성찰이 따르지 않으면 ‘자신의 고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비장하신 말씀입니다. 그만큼 가슴 아프시다는 표현입니다. 이렇듯 스승님께서는 제자의 배신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자신의 십자가 길을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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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스승을 넘기는 대가로 ‘은전 서른 닢’을 받습니다. 그러고는 기회를 엿봅니다. 예수님의 암시에도 그는 시치미를 뗍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유다의 이중적인 모습입니다. 본마음을 감추고 겉모습만을 포장한 그의 ‘두 얼굴’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가슴 아픈 지적을 하십니다. 이중적인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 인생인지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일면성을 지니도록 애써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밝은 모습이면 자신에게도 떳떳한 모습입니다.
유다는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힘과 기적을 이용해 이스라엘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저항 없이 죽음의 길을 가려 하십니다. 유다는 주사위를 던진 겁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인지 자신에게 도박을 걸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선택은 결국 비극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개인 집단’을 위해 주님의 능력을 모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근시안적인 민족주의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을 위해 오신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유다와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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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유다는 스승을 외면합니다. 스승을 떠날 결심을 합니다. 정말 돈 때문에 그랬을까요? 배신의 원인이 돈이었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는 그러한 일들이 자주 생깁니다. 한몫 챙기려고 정보를 빼내 팝니다. 공금을 유용합니다. 모두가 유다의 행동인 셈이지요.
아무튼 유다는 수석 사제들에게 스승을 넘길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줍니다. 당시 은돈 서른 닢은 노예 한 사람의 시세였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노예가 황소에게 받혀 죽었을 때 받는 보상금에 해당합니다. 유다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얕잡아 보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스승은 제자의 배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13,27) 하고 말씀하십니다. 배신을 받아들이신 겁니다. 철저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배신을 만납니다. 아무리 가슴 아프더라도 이제는 십자가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 수난의 길을 시작하셨습니다. 제자의 배신을 받아들이심으로써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먼저 지신 겁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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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는 선과 악에 대한 긴장을 늘 심하게 느끼며 산 사람으로 보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유다는 자신의 인간적 욕망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고 짐작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가능성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공생활 내내 그분과 함께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함께 생활해 온 유다에게서 다른 제자들은 전혀 그 내면의 탐욕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유다의 마음이 악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께서 복음을 전한 3년간의 세월을 결코 함께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다른 제자들 또한 그러한 유다의 면모를 능히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이루어진 제자들의 친밀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유대감으로 형성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해받는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려면 그분에 대한 강한 유대감과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 간에 서열 의식을 가지고 다투는 모습을 볼 수는 있을지언정(마르 9,33-35) 그들 스스로 분열하는 모습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유대감은 훌륭했을지언정 제자들 개개인이 예수님과 맺은 유대감은 서로 달랐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가 지닌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유다와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전적인 욕망의 그늘 아래 있었던 유다는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함께 체험하며 끊임없이 양심의 갈등을 느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이처럼 애초부터 있었다고 보기보다는, 자신의 비천함과 예수님의 거룩함 사이의 심한 괴리감으로 말미암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일부러 배신하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주님에게서 벗어나고 있는 자신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에는, 언젠가는 악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그 한계선을 넘어 버렸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양승국신부-
<관점>
유다라고 해서 처음부터 배반자의 길을 가겠노라고 마음먹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처음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고, 또 그분에 매료되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따라나섰을 때만 해도 유다는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했고, 신뢰했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내 인생을 걸만한 분이야! 내 삶을 송두리째 맡겨도 후회하지 않을 분이야!" 라고 생각했기에 최선을 다해 예수님과 제자단의 살림살이를 위해 헌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그런 열정과 적극성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추종의 대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성취의 도구,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여겼던 유다였습니다. 그러한 그릇된 관점과 노선이 어느 순간 수정되고 쇄신되었어야 했는데, 유다는 끝까지 자신의 노선을 버리지 못했기에 제자직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시절,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던 시절, 계속되던 치유와 기적의 시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던 해결사의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입고 수백 번도 더 감사의 인사를 하러오던 사람들, 덩달아 우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조차 다시 일으켜 세우던 시절, 끝도 없이 접수되던 기부금과 감사헌금, 군중들의 환호와 따뜻한 시선...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야말로 흠모와 투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 수난의 때가 다가오자 군중들의 환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설명하실까 예수님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더욱 한심합니다. 하신다는 말씀이 고작 "자신을 죽여라! 자신을 낮춰라! 서로의 발을 씻어줘라!"는 등 쓸데없는 말만 쏟아놓습니다.
전처럼 능력의 예수님, 힘 있는 예수님, 과감하게 적대자들을 물리치던 승리의 예수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죽음 앞에 피땀 흘리시며 번민하시는 약자 예수님의 모습만이 남아있습니다.
유다는 작정합니다. 이제 떠날 때가 왔구나. 더 이상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구나. 떠나는 길에 사업자금이라도 마련해야지 하면서 제자직을 접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더 이상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었기에 유다는 과감히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심각하게 점검해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도대체 왜 세례를 받았습니까? 왜 신앙생활을 지속합니까?
오로지 예수님을 내 인생의 만사형통을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머지않아 사라질 육신의 안위와 건강만을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내 가족의 창창한 앞날만을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머지않아 우리도 예수님을 떠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끔씩 만사형통도, 인간적인 성취도, 삶의 기쁨과 보람도 주시는 분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약속하지는 않으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던 그 모든 인간적인 것들, 육적인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진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웃사랑과 헌신, 희생정신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밤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하며 허겁지겁 음식을 먹으며 ‘서비스가 매우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본인은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여기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 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