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금요일(요한 18,1 - 19,42.)

2012. 4. 6. 오전 6:48:02

글자
                                         
오늘은‘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돌아가시고 묻히셨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께서 죄인들 손에 죽임을`당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고통에 함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통에 함께하는 길은 우리가 지은 죄를 뉘우치며 아파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희생을 기억하며 주님 수난 예식을 시작합시다.

주님 수난 예식

1. 이날과 다음 날에는 오랜 관습에 따라 교회에서 모든 성사를 거행하지 않는다.
2. 제대는 십자가도, 촛대도, 제대포도 없이 벗겨 둔다.
3. 사목의 이유로 좀 더 늦게 할 수도 있지만 오후 3시경에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이 예식은 말씀 전례, 십자가 경배, 영성체, 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날 영성체는 예식 중에만 하지만, 병자 영성체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다.
4. 사제와 부제들은 미사 때처럼 붉은색 제의를 갖추어 입고 제단 앞으로 나가 경의를 표한 다음,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는다. 모두 잠시 침묵 가운데에 기도한다.


2012년 4 6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요한 18,1 -19,42)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전한다. 그 종은 고통과 멸시를 받으며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고 간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 없이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주님께서는 그를 속죄의 제물로 내어놓았다(제1독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처지를 아시고 눈물로 탄원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고난을 받으셨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시며 숨을 거두신다. 이로써 예수님의 긴 수난의 고통도 끝이 난다. 온 생애를 걸쳐 온전히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완성하셨다(복음).

오늘의 묵상

 

그 모습 보입니다. /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처절히 찢긴 몸 / 헐떡이는 목숨 하나 걸려 있습니다. / 허허한 하늘 지푸라기처럼 잡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 들립니다. /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고통의 신음 소리 / 핏빛 절규가 터져 나옵니다.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 바람 일고 / 그 목소리 흩어져 세상을 떠돌더니 / 2천년 역사를 넘어 여기, / 침묵 속에 잠깁니다.
세상의 실패는 골고타 언덕 조롱과 비웃음이 되고 / 세상의 절망은 십자가에 못 박혀 침묵이 되고 / 세상의 고통은 찢기운 살, 흐르는 피가 되더니 / 비로소 세상은 숨을 쉽니다.
골고타 언덕 그 목소리 / 생명을 건네 주는 펠리칸의 신음이며 / 피의 잔을 건네 주는 손길이기에 / 생명은 고통의 심연에서 차오르고 / 세상은 그 살과 피를 먹고 부활합니다. / 가슴 벅찬 사랑으로 부활합니다.

 

☆☆☆

오늘 우리는 장엄한 수난 복음을 읽었습니다. 무죄한 분이 억울한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길을 가시는 장면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분께서 맞이하시는 죽음의 의미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류의 죄 때문에 그 길을 가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느낌은 어떠합니까?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여 예수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미 보았던 영화를 되풀이해서 보는 기분으로 수난 복음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인류를 위하여 죽는 삶을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거창하다면 나에게 가까운 사람을 위하여 희생할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던 예수님께서는 키레네 사람 시몬을 만나십니다. 베로니카와 예루살렘 부인들도 만나십니다. 당신을 비웃던 청중들과 죽음의 길을 재촉하는 병사들도 만나십니다. 그분만이 그들을 만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길을 가다 보면 우리 역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요한 18,1 - 19,42.)

서 공석 신부

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사람들이 그들이 믿던 바를 기록하여 남긴 문서입니다. 복음서들 간에 차이가 있는 것은 그것을 기록한 공동체가 다르고, 각 공동체가 조명하는 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이 복음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강생하여 예수라는 사람이 되었고, 그분은 하느님의 뜻을 땅에서 다 이루고, 하느님에게로 돌아가신 사실을 특별히 조명합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사명을 다 한 예수님이 때가 되자, 당신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에게로 개선하는 장엄한 행보와 같이 수난사를 기록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13,1), 제자들과 이별의 만찬을 하셨다는 말로 이 수난사는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체포되는 장면에서도 그분의 당당하신 모습을 보도합니다. 군인들이 그분을 잡으러 접근하였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그들의 대답에, 예수님은 ‘나다’라고 거침없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군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집니다.’
예수님은 체포되면서도 그 장(場)을 주도하는 당당한 주인공이십니다. 무장하고 그분을 잡으러온 군인들이 그분 앞에 오히려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이 또 물으십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요.’라는 그들의 대답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 현장에 능동적인 사람은 잡으러 온 군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양떼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순간에도 제자들의 안전을 도모하십니다.

대사제인 한나스의 심문에도 예수님은 의연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심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이야기 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 보아라.’ 한나스는 전임 대사제이고, 당시 대사제인 가야파의 장인입니다. 예수님은 막강한 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연하십니다.

로마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그를 가르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부하들이 싸우고 죽이고 빼앗아서 옹립해 주는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그분은 전혀 다른 질서를 지닌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빌라도가 반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천하를 호령하는 빌라도이지만, 그 진리를 모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셨고,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 나라의 기본질서가 되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을 세상의 통치자들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 진리를 증언하려고 오셨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8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여인을 율법의 이름으로 돌로 치려하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들의 손에서 살려내고, 그에게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8,29).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이고, 예수님이 왕이신 것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 나라의 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배우고 알아야 하는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거론하신 진리는 바로 이 용서하고 살리는 진리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으로 무장하여 강자로 군림하는 빌라도가 모르는 진리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비겁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기 일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처하였다는 군중의 말에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이 들어 예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 엄밀히 묻습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다가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빌라도는 심문을 끝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라는 군중의 협박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권력자들은 이렇게 소신이 없습니다. 군중은 이유 없이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여 이성을 잃었습니다.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라고 그들은 외칩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처형 당하셨고, 군중은 유대교 지도자의 선동으로 이성을 잃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고, 황제의 백성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수난사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 어머니와 당신이 사랑하시는 제자를, 어머니와 아들의 인연으로 맺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성모 마리아는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이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마리아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각별한 마음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유지였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신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어느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요한 4,7). 그 여인과의 대화중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샘이 되고 거기서 물이 솟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여기서 이 복음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샘”은 성령입니다. 오늘의 수난사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목마르다.’라는 말씀으로 당신의 죽음 후에 성령이 오실 것을 예고하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14,26)라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미 말한 일이 있습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성령이 오시고, 동시에 신앙공동체가 발족하여 그들 안에 예수님의 삶이 나타나고, 그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사명이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성령이 오시고 교회가 출현하면서 예수님의 사명은 다 이루어 진 것입니다. ◆ 


“다 이루어졌다.     -양승국신부-

 <종결자 중의 종결자, 죽음>

아직 떠나기엔 이른 선배 사제가 아쉬워하며 세상을 떴습니다. 아직 노모도 살아계시는데, 아직 하고 싶은 일이 그리 많았는데, 아직 작별하기에 아쉬운 인연들이 저리도 많은데...

보는 사람들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예술적인 ‘끼’가 많았는데, 시며, 그림이며, 다양한 아이디어며...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하고 싶은 미술공부 제대로 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행복해했었는데, 사람을 그리 좋아해 늘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게 행복해보였는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했었는데, 예술과 인생과 삶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가 얼마나 많았는데...

마치 꽃잎 하나 떨어지듯 너무나 쉽게, 너무도 빨리 떠나버려 황망한 마음을 추스르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이럴 때 제일 힘든 게 밥숟가락 뜨는 일이더군요. 밥알들이 마치 모래알 같습니다.

참으로 아쉽고, 때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 죽음이 분명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길을 걸어갔고, 갖은 희로애락을 나누던 사람이었는데, 더 이상 그란 존재가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더 이상 그 다정한 눈빛, 그 환한 미소, 그 타오르던 열정을 이 세상 그 어디서도 볼수 없다는 것, 참으로 너무나 큰 상실이며 슬픔입니다.

그러나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죽음이야말로 해결사중의 해결사이더군요. 요즘 즐겨 쓰는 단어 ‘종결자’가 분명합니다.

선배 사제는 죽음을 통해 그 끔찍하던 통증에서 완전한 벗어났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생로병사의 사슬을 끊고 한 인생을 종결지었습니다. 이제 그는 편안한 얼굴로 우리 앞에 누워있습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자비의 품에 편안히 안겨있습니다.

오늘 성 금요일,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끔찍하고 혹독한, 그래서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예수님의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예수님께 주어진 마지막 사명이었기에,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에 담긴 큰 의미를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큰 고통을 통해 우리의 작은 고통을 없애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작은 십자가를 가볍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끔찍한 죽음을 통해 우리 죽음의 고통을 경감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죽음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 이전까지 죽음은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 그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세계까지 내려가신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으로 그 죽음을 쳐부수셨습니다.

영광스런 당신의 부활을 통해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아니요, 하느님 영광에 참여하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죽음은 이제 어둠의 땅에서 광명의 땅으로, 눈물과 슬픔의 땅에서 하느님 아버지 땅으로 건너가는 사다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죽으셨지만 부활을 통해 우리 안에 생생히 살아계시듯 우리보다 먼저 떠난 사랑했던 형제자매들 역시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영광된 부활의 삶에 참여하게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요한 18,1 - 19,42.

예수님의 죽음은 삶의 결과입니다.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예수님은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고 아버지의 뜻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요한15,13-15)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쳐났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못하고 권력에 맛들인 이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높이 달려야 했습니다.

 앓는 이들을 고쳐주시고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고발한 사람들에게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8,8) 하시며 용서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요한13,5) 겸손과 봉사, 참된 사랑의 본을 보여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5)하시며 사랑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운데에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간청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은 선을 낳고 악은 또 다른 악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차마 십자가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악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오직 사랑밖에 없기에 기꺼이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결국 일상의 삶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이었기에 그 삶의 결과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고통이 아니라 그 큰 사랑을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큰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곧 드러내시길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 했듯이 우리도 사랑 때문에 죽게 하시고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이세상의 삶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의 결과이듯 우리의 죽음도 사랑의 삶의 결과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하고 콜로사이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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