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7일 부활 성야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마르코 16,1-7)

부활 성야 미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밤 미사로서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교회는 죄와 죽음을 이기시어 인류에게 참된 해방과 승리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장엄한 전례로 기념한다.
말씀의 초대
부활 성야 미사의 말씀 전례는 일곱 개의 구약 성경 말씀과 신약 성경의 서간과 복음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서 말씀은 하느님께서 긴 세월 동안 행하신 인류 구원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특히 오늘 듣게 되는 탈출기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과정을 전한다. 이 해방의 파스카 사건은 부활 성야 미사의 의미를 잘 전해 준다(독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또 다른 마리아가 이른 아침 예수님 무덤을 보러 간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한다. 그들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가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맞이하여, 고 구상(具常) 시인의 “그분이 홀로서 가듯”이라는 시로 묵상을 대신합니다.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서 무력(無力)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敗北)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正義)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英雄)적 기색(氣色)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신스런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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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부활 사건을 마리아 막달레나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무덤에서 만난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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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하늘이 내린 천재 화가였습니다. 스물일곱에 미술을 시작해 서른일곱 살로 죽을 때까지 850여 점의 작품을 남긴 분입니다. 하지만 자살합니다. 무엇이 이 천재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요? ‘삶의 두려움’입니다. 그는 평생 불안과 고독 속에 살았고, 마침내 정신병을 얻게 됩니다. 병에 지쳐 희망을 접었기에 자신에게 권총을 쏘았고, 이틀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생전 그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그림도 단 한 점만이 팔렸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라도 그의 작품을 한 번 이상은 접하게 됩니다. 그는 새로운 ‘고흐’로 분명 다시 살아났습니다.
부활은 역전입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의 ‘반전’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가끔씩 체험합니다. 부활의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들도 그렇게 은총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무덤에 계신 주님께로 갔습니다. 스승님이 보고 싶어 그냥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를 만난 것입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놀란 눈으로 천사를 보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렵고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지요? 생활 속의 고통은 글자 그대로 ‘고통스러운 현실’이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참으로 부활의 은총이 기다려집니다. “놀라지 마라.” 하고 외치는 천사의 모습이 진정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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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비유가 있습니다. 40-45억 년 전에 이 땅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구가 생겨난 것을 1월 1일로 계산하자면, 4월 1일쯤에 생명체가 출현하고, 11월 27일쯤에 물고기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월 12일쯤에는 공룡이 생겨나고, 12월 27일쯤에 포유류가, 12월 31일쯤에 마침내 인간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과 인류의 마지막일 것 같은 이 시점에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뛰는 파스카가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입니다. 혹자는 주님의 부활을 두고 제8일의 창조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놓치게 된다면 이보다 더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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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양승국신부-
<텅 빈 공간>
형제들과 함께 둘러앉아 이런 저런 농담 끝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수도원 원장으로, 또는 양성을 책임지는 수련장으로 어떤 성향의 인물이 좋겠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결론은 이랬습니다. 책임 맡은 사람이 너무 똑똑해도 안 된다. 너무 잘생겨도 안 된다. 너무 완벽해서도 안 된다. 너무 책임감이 강해도 안 된다. 가끔씩 회의나 업무 차 자리를 비우기도 해야 되지 너무 수도원에만 붙어있어도 안 된다.
그 대신에 약간 부족한 구석이 있으면 좋다. 가끔씩 실수도 하는 사람이면 좋다. 이왕이면 출장도 자주하면 더 좋다.
요즘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여러 리더십 가운데 ‘없음의 리더십’이라고 들어보셨나요? 혹은 ‘부재(不在)’의 리더십.
무슨 말인가 의아해 하실 텐데, 리더가 모든 권한이나 결정권을 다 자신의 손에 넣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리더십과는 정 반대되는 개념의 리더십입니다.
원장이 공동체 안에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리더십입니다. 때로 없는 것 같지만 있고, 있는 것 같지만 없고...좀 알쏭달쏭한 리더십입니다.
바꿔 말하면 가정이나 수도원의 중심에 ‘텅 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장이나 가장이 중심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이 가정이나 수도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공동체 작은 일에 까지 일일이 개입하는 과도한 현존(現存)보다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활발히 움직이도록, 또 하느님께서 활발히 역사하시도록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리더십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 모두가 나름의 영역을 계속 확장시켜 나가기만 할 때, 그래서 제3의 지대, 여유로운 공간이 조금도 없게 될 때, 그 공동체의 삶은 팍팍하기만 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공동체가, 우리 수도공동체가, 우리 본당공동체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고 그 안에서의 삶이 힘겹기만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각자가 솔직히 별것도 없으면서 너무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기 때문이 아닐까요? 모두들 각자의 영역확보에만 혈안이 되어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 공동체가 살아나기 위한 방법은 이렀습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괴롭지만 자존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기를 쓰고 확보해놓은 내 영역을 기쁘기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깨끗하게 비울 때, 우리가 죽기보다 싫지만 기쁘게 자신을 죽일 때, 그 빈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부활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죽으셨습니다. 물러나셨습니다. 크게 비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크게 비운만큼 크게 부활하실 것입니다. 많이 물러난 만큼 많이 행복하실 것입니다. 송두리째 버리면 더 큰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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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반전
-남상근 신부-
십자가의 처형은 마치 예수님의 삶 전체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것이, 수많은 이들을 병고에서 치유하셨던 일이, 사랑의 말씀으로 지친 영혼들을 불러 세우셨던 것이 결국은 다 무위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 확신이 헛된 부르짖음으로 흩어지고 텅 빈 노력으로 전락한 것으로 단정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새벽녘에 여인들이 놀라운 일을 체험합니다.
더 이상 무덤 안에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는 천사의 선언을 듣게 된 것이죠.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가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틀렸다고 단죄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이야말로 옳았으며, 그의 삶 전체가
아버지 당신께 속한 것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주님의 부활로 이제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진리를 걸어가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나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신 길입니다. 자기 잇속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남을 위해 바친 목숨이야말로 가장 영광스럽습니다.
옳고 거룩한 삶을 사는 인생은 하느님의 급반전을 선물로 받습니다.

사오정 수녀님
- 양옥자 수녀-
사태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일컬어 ‘사오정’이라고 하는데, 우리 수녀원에도 사오정 수녀님들이 몇 있어 황당한 에피소드로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한다. 한 사오정 수녀님이 분교 앞에 적힌 ‘현서 분교장’이라는 이름을 보고, 요즘에는 교장 선생님 이름도 이렇게 적어놓는다면서 신기해했다. 그 수녀님은 ‘현서분 교장’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이 사오정 수녀님뿐이랴.
지난해 선교지에서 귀국 후, 나의 내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자유 같기도 하고, 평화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분의 현존의식에 대한 강한 확신에서 비롯된 느낌이었다. 그것이 내가 암담하고 열악한 상황에 있는 그들을 더 사랑하려고 고투했던 그 사랑을 밑거름 삼아 그분이 주고 계시는 은총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나는 그저 헛수고 같기만 했던 그 아픔 가운데서만 주님을 찾으려고 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향료를 바르기 위해 주님의 무덤을 찾는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듣고 그 흔적을 보기까지, 그들은 다만 죽은 예수님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세 여인이나 나나 주님을 찾기는 찾았으나, 그것이 상처든 주검이든 지나간 것에 집중해 있을 때는, 이미 우리 삶에서 시작된 부활의 은총에 한 박자 늦게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이라는 좁은 현실 속에서만 그분을 찾으려 한다면, 이미 부활하신 분을 두고 빈 무덤만 두리번거리는 사오정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비록 절망과 아픔, 죽음 같은 사실뿐일지라도 그분은 우리가 지향하는 겨자씨만 한 보잘것없는 사랑 그 옆에 부활의 씨앗을 몰래 심고 정성을 다해 키워 주신다. 이를 믿는 희망 속에, 사오정이라는 딱지를 떼고 부활하신 그분을 삶 속에서 다시 만나는 지혜로운 제자가 되어보자.

-문호영 신부-
오늘은 주님께서 죽음을 쳐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성토요일, 부활 성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전례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넘치고, 또 넘치는 것을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와 온 우주를 위해서였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써주님과 인간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고, 모든 피조물은 주님 부활의 생명 안에 완전히 젖어들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전례와 예식은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부활은 2천 년 전에 이뤄지고 끝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예수님의 사건이고 동시에 인간과 온 우주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알렐루야’로 환호하는 것은 그 부활이 바로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서 동시에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환호를 50일간 전례적으로 계속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환호는 50일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의 내면에서 계속되어야 하고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 세상 삶이 끝나는 날’까지 ‘인간의 신음’이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한마디로 평화입니다. 곧 주님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그런데 이 평화는 ‘세상의 신음’을 이기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기에 끊임없이 부활의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부활사건 안에서 우리를 끊임없는 부활의 삶으로 초대하고 계시고 동시에 이 초대에 응답하는 힘도 아울러 주십니다. 주님의 부활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고 그것이 바로 평화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주님의 평화 안에서 머물러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평화를 다른 이에게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햇님 달님의 부활이야기
'햇님 달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마실에 품팔러 나갔던 어머니가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납니다.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꼬셔서 어머니를 잡아먹고나서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 하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다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예수님을 몰랐던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삶 안에서 부활의 의미는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정네 없이 아이들 셋을 먹여 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되어 남의 집에 품팔며 사는 여인네의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을 겁니다. 호랑이가 어머니를 잡아 먹었다는 것은 어머니가 곧 호랑이로 변한 것입니다. 어머니 마음속에 쌓인 한이 호랑이로 둔갑한 것이지요. 결국 그 호랑이가 자신의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어른이 다 되어도 자식을 편하게 놓아주지 않는 호랑이 같은 어머니,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를 우리는 흔히 보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호랑이를 피해서 나무로 올라갑니다. 나무에 올라간 아이들은 땅에 있을 때와는 달라졌습니다. 맨날 어머니가 품팔아서 가져다주는 양식에만 의존해야되는 수동적인 아이들이었는데 이제는 호랑이라는 무시무시한 동물과 대적하면서 온갖 꾀를 낼 줄 아는 훨씬 성숙한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꾀에도 한계가 있어서 하늘에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온 누리를 비추는 햇님 달님이 되지요. 호랑이는 수수밭에 떨어져서 죽고요.
아이들이 온 누리를 비추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호랑이와 나무였습니다. 먼저 호랑이를 볼까요. 호랑이는 곧 어머니(혹은 아버지)입니다. 호랑이가 죽지 않으면 아이들이 부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른이 다 되어서도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완전히 떨쳐 내지를 못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분노 등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호랑이가 되어 늘 나를 쫓아다닙니다. 그 호랑이가 죽어야 아이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갔다는 것도 참 재미가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양이나 서양이나 나무는 '생명과 성장'을 상징합니다. 또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하구요. 나무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곳입니다.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나무에 달리셨기 때문에 온 인류를 비추어 주는 구세주로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아이들을 잡아먹는 부모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지만 나무 역시 부모의 모습입니다. 호랑이는 내가 극복하고 떨쳐 버려야할 부정적인 부모의 모습이지만 나무는 부모님과 화해하고 난 뒤에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애정이 새롭게 솟아나는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이야기의 형태로 두고두고 오늘날까지 내려왔을 테지요. 하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햇님 달님 이야기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조상들 중에 누군가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지혜를 후손에게 전해 주었겠지요.
옛날 이야기 속에서 부활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던 것은 결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나의 삶 속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조상들의 지혜를 빌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햇님 달님 이야기에서 눈여겨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호랑이도 죽어야 하고, 나무에도 올라가는 인간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 번 부활은 동아줄 잡고 햇님 달님되는 체험들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기환 요셉 신부-

제5독서 <나에게 오너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2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4 보라, 내가 그를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민족들의 지배자와 명령자로 만들었다.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르고,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너에게 달려오리니,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신 까닭이다.
6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이사 12,2-3.4ㄴㄷㄹ.5-6(◎ 3)
◎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보라, 내 구원의 하느님. 나는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를 구원해 주셨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 이름 높이 불러라. 그분 업적을 민족들에게 알리고, 높으신 그 이름을 선포하여라.” ◎
○ “위업을 이루신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이 하신 일 온 세상에 알려라. 시온 사람들아,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 ◎
27. 제5독서 후(모든 이에게 거저 주신 구원)
+ 기도합시다.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신 하느님, 예언자들의 가르침으로 현세의 신비를 밝혀 주시니, 너그러이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하며, 주님의 이끄심으로 저희도 가진 바를 나누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6,3-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서간을 봉독하고 나면 모두 일어선다. 사제는 성대하게 알렐루야를 시작하고 모든 이가 되풀이한다. 때에 따라서는 성가대원이 사제 대신에 알렐루야를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성가대는 시편을 노래하고 교우들은 알렐루야로 화답한다.
화답송 시편 118(117),1-2.16-17.22-23
◎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7
1 안식일이 지나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리고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고 서로 말하였다.
4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것은 매우 큰 돌이었다.
5 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6 젊은이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보아라, 여기가 그분을 모셨던 곳이다.
7 그러니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 ‘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