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나를 따르라. (마태4,18-22)

2024. 11. 29. 오전 11: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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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일 토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나를 따르라. (마태4,18-22)

 


1독서<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9-18)

9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화답송>시편19,2-3.4-5ㄱㄴ(5)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복음<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4,18-22)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제1독서(로마10,9~18)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9-10)

 

로마서 10장 9절과 10절은 믿음의 의로움, 즉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거듭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하고'로 번역된 '호몰로게세스'(homollogeses)의 원형 '호몰레게오'(homollogeo; confess)는 '함께', '동시에'란 뜻을 지닌 '호무'(homu)와 '말함' 이란 뜻이 있는 '로고스'(log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함께 말하다', '동시에 말하다'라는 뜻이 있고, 실제로는 주로 법정 서약과 약속 혹은 고백 행위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이러한 고백은 공개적 성격을 갖는다.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서원하다'라는 뜻의 '나다르'(nadar), '맹세하다' 라는 뜻의 '샤바'(shaba)등의 역어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호몰레게오'(homollogeo)를 '공개적으로 고백 또는 진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9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하고 진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이 가지는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으로 번역된 '퀴리오스'(kyrios)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퀴리오스'(kyrios)는 일반적 경칭으로 영어의 'sir'이나 독일어의 'herr' 의 의미가 있다.

 로마 황제의 일반적 호칭이었다. 즉 황제를 신으로 여기고 숭배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③ 그리스 신들의 이름 앞에 붙여, 인간과 다른 영역에 있는 신을 나타낸다.

 히브리 성경의 그리스어 70인역(lxx)에서 하느님의 명칭인 야훼의 역어로 사용되어 유일신을 지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누가 예수님을 '퀴리오스'(kyrios)라고 공적으로 진술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황제, 더 나아가 신적 존재 혹은 유일신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자신의 삶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그분께 드리는 것이 된다.

즉 이러한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 주권(主權)을 인정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을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믿음의 시금석인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dominus)로 시인할 때, 우리는 그분의 신성(神聖)과 존귀하심,  그리고 믿는 자 자신이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 사이에 이것은 신앙 고백의 신조(credo)로 사용되었고, 세례의식에서 고백의 문구로 사용되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또 한 가지의 조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공개적 진술과 함께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을 얻는 데에 두 가지 모두 필수이지만, 굳이 논리적 순서를 따진다면 '믿음'이 '고백'에 우선한다.

 

여기서 '믿으면'으로 번역된 '피스튜세스'(pisteuses)는 '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이다. 특히 여기서 과거의 일회적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시제인 부정 과거형을 사용하여 그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 믿음임을 보여준다.

이 믿음은 앞에 나온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는 신앙 고백의 근거가 된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에서 요구되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단정짓는데, 이 부활에는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 모두를 믿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써, 영원한 구원을 보증해 주셨다는 확고한 확신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서약이기도 하다.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10) 

 

로마서 10장 10절은 로마서의 주제인 믿음으로 의로움(구원)에 이르는 원리  가장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고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이다.  9절의 말씀이 순서가 바뀌어 서술되고 있고 9절 내용의 반복이다.

인간 구원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회복하고 내면에서부터 변화되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며, 거기에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일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음으로'로 번역된 '카르디아'(kardia; heart)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흔히 '마음'으로 번역하는 이 단어는 고전 그리스어 문헌에서 인간 전체의 지적, 영적 중심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그리스어 구약 성경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히브리어 '레브'(leb) '레바브'(lebab)의 역어로 나온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러한 단어는 인간의 영적, 지적 생활의 자리, 곧 인간의 내적 본성이며, 책임의 자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마음에서 나온 것 틀림없이 그 사람 자신의 내면 전체의 인간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카르디아'(kardia) 하느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자리이며, 그곳에서 맨 처음에 하느님께 순종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의 문제가 결정된다. 그것은 불신앙의 자리도 되고, 신앙의 자리도 되는 것이다.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 믿음은  감상적 충동이나 추상적 사상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믿음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믿음의 고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10절에서 그 결과로 제시하고 있는 '의로움'과 '구원'은 동일한 의미이다.

 

또한 여기서 '믿어'에 해당하는 '피스튜에타이'(pisteuetai)나 '고백하여'에 해당하는 '호몰로게이타이'(homollogeitai)가 모두  현재 수동태 3인칭 단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3인칭 단수형은 믿고 고백하는 주체가 각 개인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재형이란 사실은 이러한 믿음과 고백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또한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믿음과 고백의 주체가 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일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개인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신적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은총의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아 ‘믿음과 선포’라는 주제를 묵상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는 장면이 소개되는데,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어부였습니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베드로에게 와서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전합니다(1,40-41 참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믿음 선포로 예수님을 만난 뒤 그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베드로에게 믿음을 전하며 주님을 믿도록 초대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무엇을 믿으려면 먼저 믿음의 내용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듣지 않고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데, 선포의 내용은 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복음을 선포하고 믿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사로운 내 생각이나 견해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회 공동체의 공적인 믿음의 내용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을 전해 준 신앙의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우리도 후손들에게 믿음을 전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탁월한 복음화의 방법은 삶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김상우 바오로 신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예수님의 길을 진리로 믿는 것’

 

(로마10,9-18. 21)

9 형제 여러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우리(내)의 속죄 제물로 이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셨고, 죄인인 우리(나)를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셨음을 마음으로 믿어 받는 구원이다.(로마4,25참조)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시며, 내 생명의 주인이시며, 내 모든 것의 주인, 곧 주님임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1,4)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 믿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기에 보이는 현상, 곧 기적(奇蹟), 발현(發顯)등을 보고 믿는다는 것은 거짓된 믿음으로 구원의 힘, 능력이 없다. 의로움 또한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사도는 사람의 규정과 교리, 계명을 열심히 지킨 자기 의로움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함을 앞 1-3절에서 말했고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힘, 능력이 있는 의로움이어야 한다.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의로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로마3,20-24참조)

 

11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12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13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이름~ 주님의 생각, 뜻, 주님께서 가신 그 대속의 길이 참 진리임을 믿고 따르는 삶, 그래서 세상 가치관으로 살았던 나를 否認하는 삶, 그것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드리는 것이다.

 

*오늘복음에서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의 삶, 생명이였던 배와 그물, 아버지까지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고 곧바로 따랐다고 성경은 전한다, 오늘 그 한 부분만 보고 그들을 본받자 하면 안된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위해 곧바로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달픈 삶을 버린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현재의 것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속셈을 드러낸다.

 

(마르10,37. 41) 37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41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을 불쾌하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 모두 자신들의 뜻을 위해 따랐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들을~ 주님은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배우는 것이 신앙의 일이다. 제자들을 본받자  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 그 길을 배우는 것이 신앙이다. 곧 성경속 인물들의 잘못, 죄성을 보고(아브라함, 야곱, 다윗, 솔로몬 등) 그들의 그 죄들을 주님, 당신의 죽음으로 대속 하셔서 그들을 善(구원)으로 이끄시는, 죄인인 우리(나)를 용서하시는 그 주님의 십자가의 사람을 배우고, 그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감사의 예배의 삶을 드리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요한4,21-24참조)

 

(마르10,45) 45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14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사실 이사야도 “주님, 저희가 전한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합니다.

= 태워버리는 불을 보면 모두 도망가지만 달려드는 나방도 있다. 곧 십자가의 의로움, 그 기쁜 소식을 듣고 자기 의로움이 부인당해도, 다 타버려 없어져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핍박하며 도망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히브12,29) 29 우리의 하느님은 다 태워 버리는 불이십니다.

 

(1코린1,23)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 구약의 하느님이 아닌 신약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넘겨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 것을, 완성하실 것을 이미 창조 이전에 계획하셨기 때문이다.(에페1,4~)

그것은 땅, 흙인 인간은 스스로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없기에, 하늘이 흙에 들어가 죽어, 그 흙과 하나 되어 그 흙의 사람을 하늘의 존재가 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 자비의 구원의 계획, 그 뜻인 것이다.

유대인들도 이슬람도 하느님을 믿는다. 그러나 그 대속의 그리스도는 믿지 않기에 그들에게 완성된 구원이 없는 것이다.

 

18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들이 들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들었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 오늘도 말씀이 찾아 오셨다. 그리고 기다리신다. 자신의 길(말)을 버리고 주님의 길, 그 말씀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신다.

 

21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아멘.

 

 


 

 

 

20241130일 토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성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며, 베드로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가장 먼저 받은 제자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따랐다고 소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라 하루를 함께 보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복음을 전한 사도입니다(요한 1,41 참조).

안드레아 사도가 보인 행적의 특징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 때에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6,8-9 참조), 예루살렘 입성 뒤 몇몇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바라자 그 말씀을 예수님께 전하였습니다(12,20-22 참조).

이처럼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사람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주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지만, 주님을 차지하려 하거나, 적어도 가장 먼저 부름받은 지위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었으며,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안드레아 사도처럼 세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스스로 주님보다 더 중요해져서는 안 되고, 세상에서 교회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주님 말씀의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거나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가 아니라,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는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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