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렙톤 두 닢 (루카21,1-4)

2024. 11. 24. 오후 1: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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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5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렙톤 두 닢 (루카21,1-4)

   


1독서<그들의 이마에는 그리스도와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묵시14,1-3.4-5)

나 요한이 1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화답송>시편24,1-2.3-4ㄱㄴ.5-6(6) 주님, 이들이 당신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주님의 것이라네, 온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온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그분이 물 위에 세우시고, 강 위에 굳히셨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그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얻으리라. 이들이 야곱이라네. 그분을 찾는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세대라네.

 

복음<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루카21,1-4)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묵시록14,1~3.4ㄴ~5)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7년 대환난을 다룬 전술한 내용(묵시록 12장과 13장)과 부조화를 이루는 듯한 내용들이 묵시록 14장의 초두에 등장한다. 묵시록 14장에서는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영광을 노래하는 내용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묵시록14,1-5).

 

그러나 이와같은 의외의 도입은 묵시록 6장 17절에서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라고 물은 후, 묵시록 7장 1-17절에서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을 묘사하고, 그들의 영광을 노래하는 패턴의 반복이다.

 

즉 사도 요한은 이와 동일한 패턴으로 묵시록 12장, 13장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두 짐승의 교회에 대한 핍박을 묘사한 후, 14장에서 그토록 철저한 사탄의 핍박 가운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교회를 보호하시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묵시록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사도 요한의 관심은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것이다.

 

묵시록 14장은 하느님의 인장으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시온산에서 부르는 노래를 다룬 1~5절,  세 천사 전하는 대바빌론의 멸망 및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 경고를 다룬 6~13절,  또 다른 세 천사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천사에 의한 마지막 수확(추수)과 심판을 다룬 14~20절로 구분한다.

 

본문에서 '어린양'으로 번역된 '토 아르니온'(to arnion ; the Lamb)은 묵시록 13장 11절에서

'어린양'으로 번역된 '아르니오'(arnio)즉 '땅에서 나온 뿔이 둘인 짐승'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어린양은 명백히 묵시록 5장 6절에서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어린양 즉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신 바로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은 '아르니온'(arnion) 앞에 정관사 '토'(to)가 선행하고 있다는 점 뿐 아니라, 그가 서있는(헤스토스; hestos; stood) 곳이 바닷가 모래 위가 아닌(묵시록12,18), 시온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입증된다.

 

시온산(토 오로스 시온 ; to oros Sion)은  본래 예루살렘 동남쪽 산등성이 즉 키드론과 티로페이온(tyropeion) 골짜기 사이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지만, 솔로몬이 거기에 성전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을 지배해 온 후로는 예루살렘 도성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으며, 상징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나타낸다(시편2,6; 50,2).

 

따라서 구약의 묵시 문학의 전통 속에서 이것을 새 예루살렘의 상징으로 이해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엘3,5 ; 이사24,23; 미카4,7). 여기서도 사도 요한은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 서 있는 종말론적인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히브12,22).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 명은 묵시록 7장 4절에서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보증하는 인장받은 자들의 수효이다. 이들은 결코 실수 차원에서 언급된 144,000 명이 아니다. 묵시록 7장 5~8절에 의하면, 이 수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뽑혀 12,000 × 12 = 144,000 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부터 산출된 144,000이란 수는 민수기 1장 19~46절에서 전투를 위해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도합  603,550 명으로,본문에 언급된 144,000 명과는 현격한 차이를 이룬다.

아울러 묵시록 7장 5~8절에 언급된 열두 지파에서 뽑힌 각각의 수는 12,000 명으로 모두 통일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도 요한이 특별히 정한 의미를 전달해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상징적인 수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런내다.

 

실제로 144,000 은 12 × 12 ×1000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백성(12)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12)의 수를 곱하고,  거기에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수(1000)를 곱한 것으로서, 전체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묵시록 7장 9절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와 분리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144,000이라는 '무제한의 제한'의 수를 통해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내포한 동일한 개념, 즉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묵시록 14장 1절에서 이들은 승리한 천상 교회의 상징  곧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묵시록 14장 1절에 언급된 144,000은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각각 세말에 맹위를 떨칠 적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를 상징하는 두 짐승의 악랄하고도 흉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 하느님의 교회가 승리함을 분명하게 천명한다. 하느님의 교회는 종국적으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서고야 마는 것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본문과 관련된 묵시록 7장 3절, 4절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거기에 언급된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힌 인장은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이다.

 

히브리 관념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름'으로 번역한 '오노마'(onoma)는 존재와 인격이란 의미를 창출한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명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인격에 동참한 자들, 곧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이다(묵시록14,3).

 

'적혀' 로 번역된 '게그람메논'(gegrammenon ; written)은 '기록하다' 라는 뜻을 지닌 '그라포'(graph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느님의 백성이 자력으로 스스로 인을 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께서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보증으로 해서, 그들에게 인을 치셨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완료 시제가 사용된 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이와같은 인장 받음의 효력이 소멸되지 않고 계속 유지될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묵시록 7장 2절을 보면,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진 주체가 천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천사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권위에 순명하고, 그분의 권위를 대행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십사만 사천명 곧 천상의 승리한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인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본절에서 '있었습니다' 로 번역된 '에쿠사이'(echusai)는 '소유하다' 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 have)의 현재 분사형이란 점 역시, 천상의 승리한 교회가 어린양과 하느님의 이름을 현재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어린양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과 짐승의 표를 받고 그에게 경배하는 땅에 거하는 자들의 운명은 완전히 상반되게 갈라진다(묵시13,16.17).

즉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십사만 사천명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속주 어린양의 소유로서 시온 산위에 서 있지만,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는다(묵시14.10).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어떤 빈곤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켜보십니다.

물론 부자들이 넣는 돈과 비교해서 보잘것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칭찬을 단순한 금액의 비율로 평가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빈곤한 과부가 놓인 현실을 외면해 온 공동체의 책임에 대한 비판이 숨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고아나 떠돌이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대표로 과부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부름 받은 모든 이의 어느 지체도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와 주권을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라졌고, 세속적 욕망이 이웃 사랑에 대한 원칙을 넘어서면서 경제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빈곤한 이들에 대한 연대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이유는 자신이 얻은 수익이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하느님의 돌보심과 이웃의 희생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는 순수한 종교적 행위입니다.

물론 그 헌금이 성전을 관리하고 교회의 사제들의 삶을 위하여 쓰인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원칙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는 어쩌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약자 보호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유다 사회에 대한 강한 질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오늘날 돈과 권력이 갖는 속성을 꿰뚫어 보시고 제자들에게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새로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도시는 사람들이 높이 세운 건물 때문에 아침에 떠오르는 빛과 저녁에 지는 노을빛의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 그 빛의 의미를 못 보고 깨닫지 못하게하는 세상이다.

  

(묵시14,1-3.4ㄴ-5)

1 요한이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 어린양 예수님의 12사도와 하느님 아버지의 12지파 12☓12=144, 그리고 하늘의 충만의 숫자1,000☓는 144,000. 하느님의 구원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루어지는 그 완전한 자비와 사랑을 입은 구원 받은 사람들을 뜻하는 숫자이다.

 

2 그리고 큰 물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 하느님의 크시고 위대한 빛의 말씀,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쁜 노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 새 노래는 땅의 오래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 땅에서 해방된 이들만 부를 수 있는 하늘의 노래인 것이다. 감사해서, 기뻐서, 행복해서 나오는 것이 노래다. 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노래라는 것이다. 

사람의 욕망과 시기와 미움, 그 죄악 때문이다. 그 모든 죄악들이 그리스도의 대속, 속량으로 다 씻기어 새 생명을 얻어 기뻐하는, 그 성도만이 부를 수 있는 새 노래라는 것이다.

 

(시편40, 3-4) 3 나를 멸망의 구덩이에서, 오물 진창에서 들어 올리셨네. 반석 위에 내 발을 세우시고 내 발걸음을 든든하게 하셨네. 4 내 입에 새로운 노래를, 우리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담아 주셨네. 많은 이들은 보고 두려워하며 주님을 신뢰하여라.

= 흙, 그 죽음의 존재가 반석이신 그리스도(빛)의 속량으로, 그분 위에 세워져 하늘의 존재가 되어 감사와 기쁨의 새 노래를 부를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4ㄱ 그들은 동정을 지킨 사람들로서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 여자와 더불어~ 곧 세상의 가르침을 진리로 사는 음녀(묵시17,2~), 그리고 그 세상을 받아들인 교회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타락한 예루살렘(타락한 교회)을, 그리고 시온을 여자라 하시는 이유다.(예레30,17)

(앞12,1~6의 여자 또한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승천 후 사탄의 핍박을 피해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 할 교회인 것이다.)

  

4ㄴ 또한 깨끗함을 지킨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 사람들의 말, 가르침을 믿고 따랐던 구원의 헛된, 그 거짓 된 것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 졌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그러니 흙, 사람들의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그 자기 부인, 버림으로 사람들의 말, 욕망과 헛된 희망을 주는 그 거짓 수렁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마태6,23)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오늘복음에서 자신을 깨닫고 보고 버리라 하신다.

(루카21,1-4)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궁핍한 과부가 생활비를 다 넣었다고 좋아하실 주님이실까? 肉의 부모도 가난한 자식이 생활비를 다 털어 용돈을 준다면 마음이 아파, 받을 부모 없다. 그렇듯 가난한 당신의 자녀가 생활비를 헌금으로 다 넣었다고 칭찬하시는 주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문 1절을 다시보면,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 이 부분에서 ‘눈을 들어’~를 빼고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로 하셔도 어색하지 않다.

요점은 헌금을 하는 사람의 눈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관점으로 보셨다는 것이다. 헌금은 내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셔서 나를 살리신 그 예수님의 죽음, 그 사랑이 감사해서 내 목숨과 같은 돈을 드리는 것이 헌금이다. 죄의 나(목숨)는 죽었습니다, 버립니다. 라는 신앙 고백인 것이다.

과부의 생활비, 곧 자신의 목숨을 다 버린 것을 칭찬하신 것이다. 부자들은? 자신의 목숨, 돈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곧 감사의 헌금이 아닌 자신들의 의로움을 위한 예물로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 십자가로 죄의 용서, 의로움을 위한 예물이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히브10,18) 18 이러한 것들이 용서된 곳에는 더 이상 죄 때문에 바치는 예물이 필요 없습니다.

= 그들은 제사와 윤리의 그 자기 의로움이 컸기에 그리스도의 대속, 그분의 의로움으로 받는 구원의 의미, 필요성, 간절함이 없기에 자신들의 의로움, 자신의 목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그 빛이 어둠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헌금을 감사의 새 노래로 드릴 줄 모르는 형식과 의무로만 했던 것이다.

그들의 예물이 그들 자신을 위한, 그 자신을 더 믿는, 그래서 버리지 못하는 그들의 속셈, 위선을 주님의 눈이 보신 것이다.

 

(루가9,23)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16,25) 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아멘!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21,1-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4)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사제들의 뜰 이렇게 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방인의 뜰은 성전의 마당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실 때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셨던 곳으로 이방인들도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고, 여인의 뜰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의 홀에 해당하는 곳으로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여인들의 장소이며, 이스라엘의 뜰은 성전 안의 회중석에 해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며,  사제들의 뜰은 성전 안의 제단에 해당하는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이들 성전의 네 지역에서 헌금함 바로 여인의 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시다가 갑자기 헌금하는 가난한 과부가 당신의 시야에 들어와 보시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는 13개의 나팔 모양을 한 헌금함이 있었으며, 각각의  용도와 지향이 그 위에 기록되어 있다.

 

13개의 헌금함 중에 한 개는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이었다. 아마도 빈곤한 과부는 일반인들을 위한 자발적인 기부금을 모으는 헌금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다고 본다.

 

여기서 '빈곤한'으로 번역한 '페니크란'(penichran; poor)의 원형 '페니크로스'(penichros)는 극도로 가난한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이며, 당시 '과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경제적 활동이 극히 제한을 받았던 가장 가난한 계층의 사람으로서 늘 구제의 대상이 된 신분이었다.

 

그리고 '두 렙톤'으로 번역된 '렙타 뒤오'(lepta dyo; two mites)에서 '렙톤'은 유대 화폐의 최소 단위로서 로마 화폐 과드란스의 2분의 1에 해당한다(마르12,42).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던 데나리온의 128분의 1에 해당된다.

 

그리고 당시의 성전 규정상 한 렙톤을 헌금하는 것은 금지되었기에, 두 렙톤은 당시 헌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액수의 헌금이었다.

 

이것은 여기에 등장하는 빈곤한 과부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통찰력으로 두 렙톤이  그 과부의 생활비 전부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음을 아셨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21장 4절에서 그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판정하신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

 

예수님께서 판정을 내리는 두 대상의 형편과 관련된 두 단어가 나온다. 

하나는 '풍족한'으로 번역된 '페릿슈온토스'(perisseuontos; abundance; wealth)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hysterematos; penuary; poverty)이다.

 

'페릿슈온토스'(perisseuntos)의 원형 '페릿슈오'(perisseuo)는 '양과 수를 초과하다'(exceed)는 뜻으로 어떤 것이 풍부하여 흘러 넘치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부자들의 경제적인 상태가 흘러 넘칠 정도로 풍부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들은 이렇게 흘러 넘치는 재물 중에 일부를 하느님께 바쳤다.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궁핍한'으로 번역된 '휘스테레마토스'의 원형 '휘스테레마'(hysterema)는 '부족', '모자람'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물질이 부족해 기본적인 필요조차 채우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과부의 철저하게 빈곤한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단어이다. 모든 것이 부족한 과부는 너무나 빈곤한 가운데 헌금을 바쳤는데, 그것은 과부의 생활비 전부였다.

 

여기서 '생활비'로 번역된 '비온'(bion)의 원형 '비오스'(bios)는 '삶', '생명' 자체를 가리키거나, 또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 과부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마저 모두 바쳤고, 이것은 그녀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음을 가리킨다.

 

이렇게 과부는 양적인 면에서 부자의 헌금에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은 금액을 하느님께 바쳤지만, 그것의 가치는 절대적 양의 개념에 있어서 흘런 넘치는 부자의 헌금보다 더 귀한 것을 바치는 자들의 마음과 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인간의 겉이 아니라 속 마음을 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부자한테는 있으나마나한 헌금과, 과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헌금의 가치를 절대적 양의 개념으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그 바치는 자의 마음을 기준으로 평가하신 것이다.

 



 

2024년 11월 25일 월요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 신부)


인간은 자신이 더 많은 정성을 들인 것일수록 더욱 큰 애정을 느낍니다.

어떠한 것이든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많이 들일수록 그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며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것을 더 많이 내놓았을 때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은 사람만이 그 결과에 만족할 줄 알고다른 사람의 결과를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얼마간만 사용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노력을 과소평가하고다른 사람의 업적을 진심으로 칭찬할 줄 모릅니다.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만이 성실함과 노력의 진가를 알고자신의 부족함을 알아 참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적은 노력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효율성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노력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진정한 겸손을 알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을 때많은 은총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와 봉사 등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을 때더 많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한 신앙인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존중하고 경탄할 줄 압니다.

내가 가진 일부를 봉헌하는 것과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은 그 체험하는 바가 다릅니다.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 남는 것 얼마를 주는 것보다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떼어 나누어 줄 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궁핍한 가운데 모든 것을 봉헌한 과부가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예물을 바친 부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듯 말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2024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헌금(獻金)은 나를 드리는 것.

 

복음(루카21,1-4)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 주님은 헌금을 준비하는 속마음을 아신다. 어떤 마음, 어떤 정성으로 준비하는가를...

 

(요한2,25)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 렙톤 두 닢-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 렙톤은 한 데나리온의 144분의 1의 작은 돈으로 오늘날로 계산하면 하루품삯을 10만원이라 할 때 렙톤 한 닢은 700원정도로 과부가 헌금 함(獻金函)에 넣은 돈은 겨우 1,400원정도이다.

 

3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 생활비를 다 넣었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소문으로 들은 예수님이 아닌 말씀 안에 머물며, 예수님이 구원의 진리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죄인이며 과부인 자신을 구해주실, 곧 새 생명이 되어주실 참 빛이신 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른 헌금함 곁에서 하신말씀으로~

(요한8,12.15.20) 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심판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20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곁에서 하신 말씀이다.

 

오늘 본문 앞 절로 가보면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하시면서~

(루가20,47) 47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 율법을 열심히 지키며 기도했던 자기 의로움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그 자신을 버려야(힘을 빼야) 생명의 빛이신 분으로부터 새 생명을 받는다. 오늘 과부처럼...

율법(제사와 윤리)의 의로움, 선과 악, 도덕과 윤리의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하늘의 용서, 의로움, 생명, 그 복음을 구원의 진리로 믿었을 때, 믿음을 빼앗기지 않고 지켰을 때다. 그렇게 오늘 과부는 새 창조로 새 생명을 얻었다.

 

(갈라6,15) 15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2코린5,17)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옛것은 지나갔습니다보십시오새것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다른 여자~

(마르14,3-5) 3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의 일이다마침 식탁에 앉아 계시는데어떤 여자가 *값비싼 순 나르드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그 옥합을 깨뜨려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4 몇 사람이 불쾌해하며 저희끼리 말하였다. “왜 저렇게 향유를 허투루 쓰는가? 5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러면서 그 여자를 나무랐다.

= 남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마태20,2) 이었으니까, 여자가 ‘300 데나리온’어치의 향유를 모았다는 것은 분명 여자의 전 재산 이었다는 것이다.

 

(마르14,6.8) 6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가만 두어라왜 괴롭히느냐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바른 것이다.

= 죄인인 자신에게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죄를 대속하실 그 예수님께(그것도 미리) 향유,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린(버린) 것이 죄인인 여자가 할 수 있었던 ‘좋은 일’인 것이다.

요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여자는 미리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나)는 성경을 통해 이미 다 이루어졌다 하신 말씀을 듣고, 알면서도 풍족한데서 얼마 씩 넣는 헌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활비를 다 넣자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은 그것 바라시지 않으신다. 어느 아버지가 자식이 생활비를 다 드리는 것을 좋아하시겠는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희생하며 자신을 키워주신 그 사랑을... 그리고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감사하며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형제(이웃)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이웃은 나를 힘들게 하는 웬수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그 웬수를 나 자신처럼 사랑할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곧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의 속죄제물로 내주신 그 이타의 사랑을 주는, 서로 나누는 그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미워하는 사람이나 차별 없이, 특히 원수 같은 사람에게 자존심을 죽이는, 그 나를 죽이는 그 죽음으로 구원의 진리, 새 계약인 십자가의 복음을 주는 그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그 모든 것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할 수 있는 좋은 일인 헌금이다.

그렇다보면, 곧 하느님께 받은 의무, 직분으로 하다보면(기도와 함께) 진심에서 나오는 시간(생명), 재물 등을 정성된 헌금으로 하느님께 드릴 수 있게 되고 이웃과 나누는 형제 사랑도 하게 된다.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빠진 부분을 보면~

(다니엘1,7. 19-20) 7 내시장(內侍長)은 그들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 주었다곧 다니엘은 벨트사차르하난야는 사드락미사엘은 메삭아자르야는 아벳 느고라고 지어 주었다.

= 히브리 이름을 바벨론의 이름으로 바꿔준 것이다.

 

19 그런데 (바벨론)임금이 그들과 이야기를 하여 보니(세상모든 젊은이 가운데에서 다니엘하난야미사엘아자르야만 한 사람이 없었다그리하여 그들이 임금을 모시게 되었다.

= 성경은 히브리 이름을 강조한다.

 

20 그들에게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그들이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는 것을 임금은 알게 되었다.

= 궁중음식과 술, 곧 우상을 섬기는 이방(세상)의 최고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자신들이 더렵혀지지 않게 해 달라고 감독관에게 간청했던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 감독관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다니엘과 친구들의 청을 들어주게 하셨다. 곧 사람의 최고의 음식(말)보다, 하느님의 양식(말씀)을 먹었을 때 세상에 그 어떤 이들보다 지혜롭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영혼의 구원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니 그 말씀을 먹기(채우기)위해, 육의 만족을 위한 사람의 말, 가르침과 행위를 버리는 것, 곧 자기를 비우는 것, 그것이 헌금의 삶이다.

 

보호자 성령님오늘 깨닫게 하신 자신을 버리는(죽이는그 헌금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주소서천주의 성령님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해 간구해 주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우리)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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