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 마르코 12,28ㄱㄷ-34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를 칭찬하십니다. 그의 순수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 역시 큰 감명을 받습니다. 실타래 같은 율법을 그토록 쉽게 해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좋은 만남은 ‘눈을 뜨게’ 해 줍니다. 그러니 늘 자신을 가꾸고 다스려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먼저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봄철엔 바람이 많습니다. 바람이 자주 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무는 가지마다 새싹을 틔우려 합니다. 그러려면 그곳까지 물을 끌어 올려야 합니다. 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이 작업을 도와줍니다. 그래서 봄철에는 바람이 많다고 합니다. 신비스러운 자연 현상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씩 선한 감정과 아름다운 느낌에 휩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봄바람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촉촉하게 하라는 그분의 배려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율법 학자의 외침 역시 신선한 봄바람입니다.
사순 3주간 금요일 - 미사의 가치는 자신이 만든다
며칠 전 논문 지도 교수님이 수업을 하시면서 공의회 이전 미사가 어땠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시 전 세계가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기 때문에 미사 때 못 알아들으니 그냥 앉아서 묵주기도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하면 성변화 하는 것만 보고 돌아가도 미사를 드린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답니다.
한 번은 아씨시에서 미사가 있어 복사를 서기위해 갔는데 한 성당에서 스무 명이 넘는 사제가 벽에 붙어있는 각자의 제단에서 동시에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변화 하는 시간이라 이쪽에서 성변화 때 종을 땡 치면 그 쪽을 향해 인사하고 저 쪽에서 종을 치면 그 쪽을 향해 인사하고 그렇게 수물 몇 번을 제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며 인사하면서 미사를 수물 몇 대를 드린 것으로 간주되었답니다.
이런 전통은 미사가 하나의 ‘희생제사’로 여겨지기 때문에 오는 오류들입니다. 미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은 맞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제사는 참여해서 그 예식만 하면 그것으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사 자체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주님의 눈에 수천 번의 미사를 드리는 것이 한 번의 미사를 드린 것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더 많은 공로를 주시기 위해 미사를 더 일찍 제정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때 단 한 번의 미사만을 하셨습니다.
구약의 전통에서도 하느님께 제물을 얼마나 바치고 얼마나 예식에 잘 참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거룩함이 평가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이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가장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서민들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일 년에 세 번씩 비싼 여행비용을 대고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전례의 참여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하시지 않고 다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우리가 들으면 아주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면 돈이 없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사제들이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보다 더 거룩해 질 수 있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도 이것을 이해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이 율법 학자들도 전례에만 열심히 참여하면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이 싫었는지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미사에 수천 번 참례한다고 그만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이라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이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증가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거룩한 전례일지라도 교만만 증가시키는 안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미사에 참례하면서도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그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실현되고 있는지 항상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수도자로 양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형제들에게 요구하는 몇 가지 작업이 있습니다. 그 가운에 하나가 ‘영적자서전’입니다. 지금까지의 내 삶 안에서 펼쳐져왔던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것입니다.
영적자서전을 다 쓰고 난 한 형제가 이런 이야기를 나눠주었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길이었지만, 돌아보니 굽이굽이 어느 한곳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는데,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로지 그분 사랑 때문에 지금 내가 여기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형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저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은 오로지 나의 역사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 인생은 가만히 분석해보니 ‘하느님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철저하게도 부족한 나, 정말 보잘 것 없는 나, 쥐뿔도 내세울 것이 없는 나, 너무도 부당한 나임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주신 하느님 사랑의 역사가 제 지난 삶이었습니다. 그분 자비가 아니었더라면, 그분 연민의 눈길이 아니었더라면, 그분 사랑의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단 한 순간도 서있을 수 없었던 날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일생일대의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우리를 향한 그분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가늠해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면서, 정확한 실체도 파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을 안 만큼, 이해한 만큼 더 그분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더 알게 되는 그 순간, 그분의 정체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 순간,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더 한층 깊어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하느님 사랑을 파악한 사람만이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 그 사랑이 용광로보다 더 뜨겁고 강렬합니다. 때로 너무나 절절합니다. 때로 눈물겹습니다.
그러나 때로 필요한 순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차가운 사랑, 냉정한 사랑도 보내십니다. 때로 우리가 교만의 늪에 빠져있을 때, 때로 우리가 착각 속에 기고만장해있을 때, 때로 우리가 나태해져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고통이라는 사랑의 매를 드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이 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다양한 순간들이 우리 삶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성공의 순간, 기쁨의 순간, 환희의 순간... 그러나 때로 실패의 순간, 슬픔의 순간, 절망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