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1-35

2009. 3. 17. 오전 10:40:46

글자
 

3월 17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 마태오 18,21-35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25.34-43
그 무렵 25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34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35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36 당신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7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38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39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40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41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42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43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오늘의 묵상
 
복음의 종은 매정했습니다. 임금의 탕감을 받았다면 친구의 애원을 그렇게 처리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정상으로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죽했으면 다른 친구들이 그를 고발했을까요? 소탐대실(小貪大失)입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없는지요? 복음 말씀은 이 점을 돌아보게 합니다.
남이 나를 ‘섭섭하게 했던 일’은 좀처럼 잊지 못합니다. 하지만 남이 나를 ‘고맙게 했던 일’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삽니다. 내가 남에게 ‘뭔가를 베풀었던 일’은 오래도록 기억합니다. 하지만 내가 남에게 ‘상처 주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남에게 도움 받았던 일은 되도록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잊지 않고 살면 감사하는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도 적어집니다. 그만큼 삶은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누군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고마운 일만 기억하고 살기에도 짧다.”
세상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달라져도 사람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속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의탁하고 맡겨야 합니다. ‘미운 마음’ 역시 그렇게 맡겨야 합니다. 붙들고 있을수록 마음은 차가워질 뿐입니다. 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것이 용서의 출발입니다.
 

사순 3주간 화요일 - 용서는 기적이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설득하려했지만 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도 죽어 마땅한 사람임도 알고 있지만 자신을 고발한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브라디의 눈빛이 빛났고 수녀는 조용히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를 기회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더해갑니다. 정말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녀는 정중하게 문의했고 브라디는 제법 대견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안 되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생활도 그만 두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러지 마시오. 용서할 수 있도록 좀 더 힘쓰셔야죠!"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 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던 것입니다. (디럭스 바이블 예화에서 발췌)

 

저도 종부성사를 줄 때 항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게 됩니다. 특별히 남편의 외도로 병이 든 자매들은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남편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매님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하라고 하면 눈물을 흘리시며 용서한다고 하십니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한 명쯤 미워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면 정말 괴로운 것을 알지만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안 되는 것’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용서해야 되는 걸 누가 모릅니까?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것도 나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용서는 하나의 기적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혼자 힘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자매님에게 외도하는 남편을 위해 하루에 성체조배 한 시간씩 하라고 했더니 일 년이 지난 뒤 저에게 와서 이제는 남편이 오랜만에 들어와도 식사도 차려주고 이부자리도 깔아주는 등 자신이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외도하는 남편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에 의한 기적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면 하느님께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란 우리나라 돈으로 수조원에 해당하는 액수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짓는 잘못이 하니라 하느님께 짓는 죄를 나타냅니다. 이 액수가 바로 예수님의 피 값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이웃이 나에게 잘못 한 액수인데 이는 수백만 원에 해당합니다. 수백만 원도 탕감해줄 수 없는 사람에겐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인한 죄의 용서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내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를 내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내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나에게 죄가 있음을 먼저 깨달아야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죄가 없으셔서 누구도 미워하시지 않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 핑계를 대며 미움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용서는 내 자신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화에서 보았듯이 다른 사람도 변화시키는 기적의 힘이 있습니다. 기적은 나도 살리고 다른 사람도 살립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고 기적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노력하지 않으면 누구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누가 미워집니까? 먼저 나의 죄를 찾아 반성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십시오. 용서의 기적을 체험하실 것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순간>


   누군가가 내 가슴에 찌르고 간 비수 같은 한 마디 말을 도무지 용서하지 못해 새벽녘까지 밤잠을 설친 적이 있으십니까? 내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연 많고 풍파 많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몇 번씩 그런 체험을 하게 되지요.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순간,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순간, 분노로 치가 떨리는 순간,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은 사실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순간’입니다. 끝까지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사실 지옥은 누군가가 우리를 보내서 가게 되는 그런 장소이기보다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장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랑이 미움 앞에서 무력하게 사라지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그 상처를 안고 숨죽여 울 수밖에 없는 순간, 우리 스스로 그 죽음과도 같은 증오의 감정을 안고 끝도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 세상은 온통 회색빛입니다. 분노가 지속되는 만큼 건강도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명치가 답답해져옵니다. 속에 큰 돌덩어리가 하나 들어앉은 기분입니다. ‘그 인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확확 달아오릅니다.


   어렵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 수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정말 힘겨운 일이겠지만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있는 ‘그 인간’을 한시라도 빨리 내 속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비워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언젠가 저도 너무나 용서가 힘들어서 몇 날 밤을 꼬박 지 샌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그 인간’이 내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는 말을 했을까, 도무지 용납이 안됐습니다. 마음속에 삭여지지 않는 큰 돌덩어리가 하나 들어있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더군요.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용서가 없으면 고통이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짓누를 것이고, 기도생활, 영적생활, 인간관계, 건강 등 우리 삶 전체를 파괴할 것입니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실감났습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가 살길이더군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습니다. 최대한 마음을 크게 먹었습니다. 죽기보다야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 인간’에게 갔습니다. 이유도 모르면서 무조건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더군요. 이유도 없이 사형판결을 받고, 그리도 무참히 십자가형에 처해진 무죄하셨던 예수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인간’의 얼굴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고”로 시작된 ‘그 인간’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노라니 조금씩 오해가 풀리기 시작했고, 꼬였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건을 마무리 짓던 그 밤은 바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비상하던 축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용서의 주님이셨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배반자 베드로를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계시던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과 발에 대못을 쾅쾅 박는 잔악한 무리들을 용서해주시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은 철부지들입니다.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개념 없는 인간들입니다. 부디 저들의 죄를 묻지 말아주십시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회개하는 한 인간(우도)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에게 천국 낙원을 보장해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시길 바라시는 용서의 주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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