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간 화요일]권위와 힘을 가지고 (루카 4,31-37)

2018. 9. 4. 오전 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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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화요일]권위와 힘을 가지고 (루카 4,31-37)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다고 한다.(1코린 2,10ㄴ-16)
10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1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2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13 우리는 이 선물에 관하여,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것을 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15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16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시어 마귀를 몰아내신다.(루카 4,31-37)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1코린2,10ㄴ-16)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10ㄴ)


원문에는 원인인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가 포함되어 있어, 본문은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의 비밀스런 지혜를 열어 보이실 수 있는 이유 및 근거를 제시하고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하느님의 지혜를 보이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 곧 하느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통찰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통찰하십니다' 로 번역된 '에라우나'(erauna)는 '탐색하다', '주의깊게 조사하다',  '탐구하다' 를 뜻하는 '에류나오'(ereunao)의 현재형이다. 이 동사는 고대 검사관의 보고서에 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 파생된 '에라우네타이'(eraunetai)가 바로 세관 업무를 보는 '검사관들' 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로마서 8장 27절에서는 바로 이 동사가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까지 살펴 보신다' 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것을 완전하게 아시는 분이심이 분명하다. 여기서 바오로는 이 동사를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시제인 현재형으로 씀으로써 성령께서 통찰하시는 그 일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바오로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비밀' 까지도 통찰하신다. 여기서 '깊은 비밀' 이라고 번역된 '바테'(bathe)는 '깊이', '깊음'(로마8,39) 혹은 '충만'(2코린8,2)을 뜻하는 '바토스'(bathos)의 목적격으로,  인간이 감히 예측할 수 없는 깊고 풍성하신 하느님의 비밀을 의미한다.(묵시2,24 ; 로마11,33 비교)

바오로는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심오한 뜻과 속성, 하느님의 구원과 은총의 계획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계시므로,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본문은 하느님의 오묘하신 뜻과 섭리는 제3위 하느님으로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되시는 성령만이 알 수 있고, 또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영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11)

바오로는 여기서 사람의 속사정을 그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알 수 없다는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의 생각도 그 분의 영인 성령 외에는 알 수 없다는 사실, 곧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신다는 10절의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 있는 영' 이란 말은 물론 인간의 육체와 구별되는 영혼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는 보편 인류 속에 존재하는 자아 의식으로서의 영혼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 위에는, '사람의 영' 과는 달리, '사람의 영' 을 수식하고 있는 '그 안에 있는' 이라는 뜻의 '엔 아우토'(en auto; with him)가 빠져 있다. 이 점에서 '하느님의 영' 은 단순한 그분의 자아 의식이 아니라 독립된 개체란 점이 드러난다. 성령께서는 성부 하느님과 관계하시는, 또 다른 제3위 하느님으로서 '인격적인 분' 이시다.

'사람들의 것들은 사람의 영이 알고, 하느님의 것들은 하느님의 영이 안다' 라는 표현같은 어법은, '같은 것은 같은 것에 의해 알려진다' (like is known by like ; Gleiches durch Gleiches)는 일반 원리를 바오로가 차용한 것이겠지만, 하느님의 영과 인간의 영에 대한 바오로의 유비에 있어서는, '엔 아우토'(en auto ; with him)라는 표현의 사용 유무에 따라서 인간의 영과 철저히 구분되는 성령의 독자성을 부각시킨다.

한편, 바오로는 '마찬가지로'로 번역된 '후토스'(hutos)로 대변되고 있는 이런 유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인 성령께서 코린토 전서 2장 6-10절에 선포된 하느님의 지혜를 나타나시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점 나타내었다.(로마11,34)

바오로가 하느님의 지혜인 복음이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진다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받은 이 복음의 진리가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시는 분, 곧 성령의 증거에 의한 것이므로 견고하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바오로는 이처럼 구원의 진리는 성령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함으로써 인간적 요소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교회가 하나로 뭉쳐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15)

'영적인 사람'으로 번역된 '호~프뉴마티코스'(ho~pneumatikos)14절에서 '현세적 인간'으로 번역된 '프쉬키코스'(psychikos)와 대조되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영적인 사람','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사람' 뜻한다.

이 사람은 모든 영적 진리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에 속한 사람은 깨우쳐지고 밝혀진 마음의 눈(에페1,18)을 갖고 있어 더 이상 이 세상의 신(2코린4,4)에 의해 유혹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의 영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구원의 진리에 입각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영적인 사람이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성령을 소유한 사람의 특권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현세적 인간'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고 판단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영적인 사람' 구원에 관해 계시된 모든 것을 성령의 조명을 통해 알지만, '현세적 인간'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세적 인간' '영적인 사람' 판단할 수 없으며, 반대로 '영적인 사람' '현세적 인간' 의해서 판단받지 않는다.

한편, 본절을 결코 소위 '영적인 사람'들이 모든 것에 대한 유권적 해석을 독점하고, 어떤 사람의 징계나 권면에 의해서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러한 해석은 코린토 교회를 향해 바오로가 책망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으로 회귀할 위험을 내포한다.

바오로가 여기서 '영적인 사람' 모든 것을 판단하고,'현세적 인간' 의해 판단받지 않는다는 지적한 것은, '영적인 사람'이 모든 일에 있어서 결코 실수나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사실 성령을 받은 코린토 교인들도 여러 가지 실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듯이, 성령을 받은 '영적인 사람'들 역시 실수를 범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바오로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관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반면, '영적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복음(루카4,31~37)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4)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드러나신 후에 출신지인 나자렛도 존귀한 지명이 되었다(사도3,6).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활동이 드러나지 않았던 때에  나자렛은 유대인에 의해 경멸받던 지명이었다(요한1,46).


따라서 마귀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크게 떠든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실추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한 것이며, 이것은 갈릴래아를 대표할 수 있는 큰 도시였던 카파르나움 고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간교하고 사악한 방법이었다.


'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귀들린 사람의 화두에 있는 감탄사 '에아'(ea; Ah!)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유일하게 쓰인 독특한 용어이며, 두렵고 위협적인 존재이신 예수님의 출현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게 된 마귀의 놀라움과 두려움, 혐오감과 적대감 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원문의 '에아, 티 헤민 카이 소이'(ea, ti hemin kai soi)'Ah, what do you want with us?'(당신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는 뜻이며, '에아'(Ea; Ah!)를 굳이 번역하자면 '우리들을 홀로 두소서'(Let us alone)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더러운 마귀의 영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뜻이다(여호22,24; 판관11,12; 1열왕17,18).


또한 여기서 더러운 마귀의 영은 자신들을 가리켜 '저희'(우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 표현에 대해 마귀가 마귀들린 자와 자신을 복수 위격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고, 마귀의 영에 들린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는 마귀가 하나가 아닌 여럿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이것은 문법적으로 의문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조롱하며 자신을 방어하는 투의 문장으로 보아야 한다.


영적으로 상당한 지력을 지녔던 마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탄의 권세를 꺾어서, 죄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당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마르코2,10; 1요한3,8).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메시야가 오면 모든 악한 영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여기에 해당하는 '호 하기오스 투 테우'(ho hagios tu theu; the Holy One of God)33절'더러운 마귀의 영'('프뉴마 다이모니우 아카타르투'; pneuma daimoniu akathartu; an unclean devil spirit)대조되는 개념으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정학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하느님께 대해 사용'거룩하신 분'(이사40,25; 57,15) 이라는 표현과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께 대해서 사용'거룩하신 이' (사도21,27; 3,4; 4,27)라는 표현과도 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영적 지각력을 갖추었던 마귀들은 이미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 앞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자는 예수님을 '안다'고 소리친다. 여기서 '압니다'에 해당하는 '오이다'(oida; I know)능동태 완료 동사이다.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마귀는 예수님을 알되, 예전부터 그리고 능동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영적 존재인 마귀는 예수님께서 육화(강생)하시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자신의 직접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그 지식에 기초하여 정확한 고백은 했지만, 본질적으로 부정하고 더럽고 악한 존재인 마귀는, 거룩하시고 정결하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순종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오늘날도 적지 않은 신학자들을 비롯해서 많은 신앙인들이 이러한 마귀의 지식과 유사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연구와 배움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지식이 어떻게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며 영신적 유익을 주겠는가? 야고보서 2장 19절에는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라고 나온다.


그리고 잠언 1장 7절에도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 교훈을 업신여긴다."라고 나온다.


우리는 신앙이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고, 주님을 경외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과 앎을 기초로 해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며, 영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17년 9월 5일 가해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반영억라파엘신부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 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오늘 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 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늘의복음]연중 제22주간 화요일(9/02)


오늘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더러운 영이란 악한 세력을 말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하느님을 올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마음이 더러운 영이 들린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오늘날에도 악한 세력은 많습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누구와 가장 대립하셨는지를 보면 알게 됩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기득권층입니다. 그들은 율법과 계명을 빈틈없이 지키며 스스로 거룩하고 권위 있는 것처럼 처신하였지요.
반면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사람들은 많은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하기에 자신들은 하느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긴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을 독점하고는 율법과 계명을 잣대로 하여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더 가까이하셨습니까? 하느님을 절실하게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더러운 영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땀 흘려 일하는 직장에 있었습니까, 회당에 있었습니까? 오늘날 거룩한 성전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은 형태의 신앙심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동하지만, 실상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당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며 우리의 신앙심을 정화해 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참된 본질을 깨닫고, 그 뜻을 실천함으로써 언제나 거룩한 영으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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