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월요일]완전한 사람 (마태19,16-22)

2018. 8. 20. 오전 8:34:50

글자


[연중 제20주간 월요일]완전한 사람 (마태19,16-22)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아내의 죽음을 예표로, 이스라엘의 성전이 더럽혀져도 슬퍼하지도 울지도 못할 것임을 알려 주신다. (에제 24,15-24)
15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6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17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
18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 나는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
19 그러자 백성이 나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일러 주지 않겠습니까?”
20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나에게 내리셨습니다.
21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온 너희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22 ─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한 것처럼 하게 될 것이다. ─ 콧수염을 가리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23 머리에는 쓰개를 그대로 쓰고 발에는 신을 그대로 신은 채, 슬퍼하지도 울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죄 때문에 스러져 가면서 서로 바라보며 한탄할 것이다.
24 에제키엘이 이렇게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하신다. (마태19,16-22)
그때에 16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18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9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20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21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제1독서(에제24,15~24)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코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그다음날 아침에 나는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   그러자 백성이 나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일러 주지 않겠습니까?""(16~19)


새 성경은 에제키엘서 24장 15절을 시작하면서, '아내의 죽음을 상징으로 삼다'로 제목을 달았다. 그러니까 예언자 에제키엘의 아내의 죽음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면 오늘 말씀을 알아 듣게 된다.


15절에 '네 눈의 즐거움' 21절의 예루살렘을 의미하는데(21절), 그것이 또한 에제키엘의 아내로 상징되었다(18절). 

여기서 '즐거움'(기뻐하는 것)으로 번역된 '마크마드'(maqmad) '원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의 그리움''마음에 아끼는'이란 뜻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힘의 영광이요, 그들의 눈에 원하는 바요, 그들의 마음에 아끼는 하느님의 성소, 곧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실 것이며, 그들이 버려둔 자녀들을 칼에 맞아 엎어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의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온 너희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21)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18)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17)는 것은  장차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환난이 거족적으로 일어날 것이니, 그때에는 죽음도 너무 흔하기 때문에, 누구나 그 죽음을 하나하나 애곡할 처지가 못되며, 그뿐만 아니라 그 환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만큼, 조의나 슬퍼할 필요조차 없는 심판인 것이다(예레 16,1~9 참조).


'이튿날 아침에 내가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다. 그다음날 아침에 나는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18)에서 나타난 것처럼,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대변자였기에,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시는데로 순종할 따름이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대로 가감없이 그대로 백성에게 전하였으며, 예언자의 아내의 죽은 것은 예루살렘의 죽음을 상징한다.


여기서 보면, 예언자의 가족은 하느님의 일을 위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진리도 나타난다. 하느님의 종은 인정과 육정에 끌리지 말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그 가족을 아주 내 버린 것과 같은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한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외아들 이사악을 모리야 산에서 바쳤다.   


"그러자 백성이 나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일러 주지 않게씁니까?'"(19)

유대인들이 에제키엘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남부 유다 백성을 살려 보려고 예언자의 아내가 죽게 되었다. 하느님의 지시와 명령으로 인한 그 사건에 대한 에제키엘의 순종이 있었다.하느님께서는 남부 유다 백성으로 하여금 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까지 사건을 발생시켰다.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의 자랑스러운 힘이고 너희 눈의 즐거움이며  너희 영의 그리움인 나의 성전을 더럽히겠다. 너희가 두고 떠나온 너희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질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한 것처럼 하게 될 것이다~ 콧수염을 가리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머리에는 쓰개를 그대로 쓰고 발에는 신을 그대로 신은 채,  슬퍼하지도 울지도 못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죄 때문에 스러져 가면서 서로 바라보며 한탄할 것이다. 에제키엘이 이렇게 너희에게 예표가 되고, 그가 한 것처럼 너희도 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21~24) 


에제키엘이 하느님께 순종한 것처럼,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의 멸망과 환난 가운데서 울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곧 그때에는 죽는 자들이 너무 많으니 만큼, 누구든지 그 죽은 자들을 하나하나 조의를 표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콧수염을 가리지도 못하고'(22)

유대인들은 슬퍼하는 표로 수염을 가리우는 풍속이 있었다. 수염을 가리우게 되면 입을 가리우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슬퍼하는 표적을 나타내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도 못할 것이다.' 곧 조객들이 가져오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뜻이다. 조상(弔喪)을 받지 말라는 뜻이다. 

'머리에는 쓰개를 그대로 쓰고'(23) 슬픔을 당한 자는 원래 쓰개를 푸는 것이었다. 

'발에는 신을 그대로 신은 채' 그 당시 슬픔을 당한 자는 맨발로 다니는 풍속이 있었다.

'너희는 죄 때문에 스러져 가면서 서로 바라보며 한탄할 것이다.' 그들이 죄악으로 단하는 환난 때문에 쇠약해짐을 말한다. 그들은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탄식할 뿐이고 울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24)

예언자의 예언이 성취된 뒤에는 백성들이 그가 누구였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제키엘은 하느님의 주권으로 소명을 받았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모두 '표징', 곧 하느님의 기이한 역사하심이란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예언의 성취는 위대한 일 중의 하나이며, 이같은 예언의 성취를 보는 자는 그 예언이 참되다는 것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제키엘서 24장 <가마솥의 비유>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정결함을 원하신다. 하느님께서는 피흘린 도성, 녹슨 가마를 진노하셨다. 남부 유다의 죄악은 음란함이었다. 우리는 영적이든지 육적이든지 음행을 버려야 한다 (로마 1,24.26; 1테살 4,3-5; 잠언 5,18-21참조).

육적 음행은 영적 음행과 같이 간다. 하느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는 그의 계명도 지킬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꺽고, 하느님께 절대 순종해야 하며, 육적, 영적 음행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불결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빼앗으실 것이다.하느님께서는 남부 유다 백성이 사랑하며 아끼던 예루살렘 성전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왜 그가 그 영광스러운 성전을 파괴시키실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죄와 불결 때문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성전이라도 하느님께서는 빼앗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아름다운 헤롯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셨다(루카21,5~6).

우리에게는 하느님보다 더 귀한 존재가 없어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상이며 죄이다 (마태10,37~39; 루카14,26~27.33참조). 우리는 하느님만을 만유위에 절대적으로 사랑하며 오로지 그의 계명을 순종해야만 한다.


세째로, 우리는 하느님을 미리 알아야 한다.

본문은 하느님의 징벌과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유다 백성이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두번이나 말씀하셨다(24.27절). 하느님을 참으로 아는 자만이 죄를 버리고 의로움을 행할 것이다(1코린 15,34).

우리는 그의 징벌을 통해서가 아니고, 평소에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호세6,3.6; 요한17,3).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복음(마태19,16~22)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1)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10장 21절루카 복음 18장 22절에는 여기 마태오 복음 19장 21절'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대신에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말씀을 다 하셨지만, 복음사가들은 각기 그 가운데 하나씩 선별하여 기록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라는 말씀을 먼저 하시고, 이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도 하셨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부족하다''완전하다'대조되는 개념이 된다. '완전' 혹은 '온전'이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완전'으로 번역된 '텔레이오스'(teleios; perfect)는 일차적으로 결여된 것이 전혀 없는 완벽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그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여기서 '텔레이오스'(teleios)는 '성숙' 혹은 '목표에 도달할 만한 수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히브5,14).

 

예수님께서 21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요지는 '영생'(구원)이라는 지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예수님을 추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부자 청년이 20절에서 눈에 보이는 제4~8계명을 행위로는 지켰을지 모르지만, 계명들의 근본 원리요 정신을 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


만약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켰다면, 21절에 나오는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는 예수님의 요구에 대해 근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부자 청년은 자구적인 율법 이면에 있는 율법의 근본 정신을 바로 깨닫지 못해서 적극적으로 선행을 하지 못하는 분명한 한계를 가진 율법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을 추종하라는 명령으로서, 구원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고 본다.

 

한편, 21절에 나오는 '가서'에 해당하는 '휘파게'(hypage; go), '팔아'에 해당하는 '폴레손'(polleson; sell), '주어라'에 해당하는 '도스'(dos; give)라는 세 동사는 모두 부정(不定) 과거 능동태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부정(不定) 과거 명령형은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명령하는 현재 명령형과는 다르게, 일회적인 동작을 명령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이것은 지금 당장 가서 단번에 모든 것을 팔아, 다 나누어 주라는 매우 강력하고도 신속을 요하는 명령이다. 

재물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단번에 끊어버리고,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보물'에 해당하는 '테사우로스'(tehsauros; treasure)는 영생을 가리킨다.


'보물' 혹은 '보화'가 상징적으로 쓰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것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쉽게 사라져 버리고 죽을 때 가지고 갈 수도 없는, 이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고귀한 가치를 지닌 영생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네가 ~하게 될 것이다'에 해당하는 동사 '헥세이스'(hekseis; you shall have)미래형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는 영광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에서 '와서'에 해당하는 '듀로'(deuro; come)부정(不定) 과거 명령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단회적인 행동으로 '오라'는 뜻이다.

 

반면에 '따라라'에 해당하는 '아콜루테이'(akoluthei; follow)현재 명령형이므로 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말한다.

말하자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순간적인 결단으로 단회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예수님을 추종하는 것은 단절됨이 없는 계속적인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구원에 있어서, 예수님께 나아오도록 내적 소명을 받고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는 단회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예수님의 제자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성화(聖化)와 성령 충만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16-22).”


여기서 ‘어떤 사람’은 젊은 사람이고, 재물이 많은 부자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율법을 잘 지키는 착하고 성실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라는 그의 질문은, “특별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그는 십계명은 평소에 당연히 실천해야 할 기본적인 계명일 뿐이고, 즉 십계명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십계명보다 더 특별한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에는, “너는 나를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나에게 와서 묻느냐?”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는 말은,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른 특별한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씀은, “지금 네가 바라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신앙생활이 완성된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사람이고,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사람입니다.)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라는 말씀은, 그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사랑 실천’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착하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그리고 십계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더라도, 사랑 실천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대단히 많이 부족한 것입니다.

(아예 사랑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율법에 정해져 있는 자선 행위는 잘하고 있었겠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닌 의무감으로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산상설교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말씀하신 뒤에 ‘완전한 사람’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6-48).”

따라서 지금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만 사랑 실천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에는 “나를 믿어라.” 라는 뜻과 “모든 것을 버리고 나의 뒤를 따라 걸어라.”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8월 19일의 복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3-54).”

예수님께서는 앞의 17절에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는 말씀과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는 말씀을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지 않으면서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겉으로만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들을 실천하면서,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과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젊은이가 슬퍼하며 떠나간 것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고, 그래서 지금 상태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을 “그의 마음속에서 재물이 하느님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긴 한데, 그러나 많은 재물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강론을 하는 이들 중에는 “부유하게 사는 것 자체를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는 “부유하면서도 선한 사람도 있다.” 라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마태 19,24), ‘선한 부유함’이라는 말은, ‘둥근 네모’처럼 그 자체로 모순되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모두 다 ‘악’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걸림돌’도 ‘디딤돌’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사람이 할 일은 걸림돌을 버리는 일뿐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과 완전한 사랑 실천은 양립되지 않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7년 8월 21일 가해 연중 제20주일 월요일(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구원을 얻고자 선한 일을 지향하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며, 또 당신을 따르기 위해 젊은 부자에게 양자택일이 아닌 연속적인 과정 두 가지, 곧 계명과 자발적인 가난을 제시하십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나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두 번째 제안에 좌절하며 자신의 노력을 포기합니다.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 보였습니다. 계명을 잘 실천했던 이 청년은 자기 재물에 집착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합니다. 재물의 완전한 포기는 개인적이고 특별한 조건입니다.
예수님의 가난은 산상 설교의 유명한 대조와 조화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성문법을 뛰어넘는 완전함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교의 완전함은 계명을 지키는 이들과 자발적인 가난을 수행하는 이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보다 뛰어난 “완전한 이들”의 부류를 따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방식, 곧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둘째는, 돈과 재물에 너무 의지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돈을 쌓지 않으며, 자기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포도밭 주인 (마태 20,1-16)18.08.22조회 43[연중 제20주간 화요일]낙타와 바늘구멍 (마태 19,23-30)18.08.21조회 109[연중 제20주간 월요일]완전한 사람 (마태19,16-22)18.08.20조회 101[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 (마태 19,13-15)18.08.18조회 61[연중 제19주간 금요일] 간음 (마태 19,3-12)18.08.17조회 58[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용서 (마태 18,21─19,1)18.08.16조회 68[성모 승천 대축일] 복 福 (루카1,39-56)18.08.15조회 89[연중 제19주간 화요일]어린이처럼 (마태 18,1-5. 10. 12-14)18.08.14조회 59[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성전 세 (마태 17,22-27)18.08.13조회 64[연중 제18주간 토요일]간질병 (마태 17,14ㄴ-20)18.08.11조회 86[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밀알 하나(요한12,24-26)18.08.10조회 69[연중 제18주간 목요일]하늘 나라의 열쇠 (마태 16,13-23)18.08.09조회 607[연중 제18주간 수요일]믿음 (마태오 15,21-28)18.08.08조회 259[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나다 (마태14,22-36)18.08.07조회 1,025[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모세와 엘리야 (마르 9,2-10)18.08.06조회 64[연중 제17주간 토요일]세례자 요한의 죽음 (마태 14,1-12)18.08.04조회 53[연중 제17주간 금요일]고향 (마태 13,54-58)18.08.03조회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