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수요일] 포도밭 주인 (마태 20,1-16)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게 하신다. (에제 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3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는 마음씨 후한 밭 임자와 같다는 비유를 드신다. (마태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제1독서 (에제34,1-11)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3)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4)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3)
앞선 에제키엘서 34장 2절에서는 이스라엘 목자들로 비유된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자신이 먹여야 할 양인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일면 소극적인 측면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어지는 본절(3절)에서는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돌보아야 할 양인 백성들을
먹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잡아먹기까지 한 악행이 고발된다.
본문은 이스라엘 목자들이 살진 양을 잡아 가장 좋은 부분인
기름을 먹고 양털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고 지적한다.
양을 치는 목자가 양에게서 고기나 기름을 취하여 양식으로 삼고,
양털을 취하여 옷감을 삼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양으로부터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은 양을 성실하게
돌보는 목자에게만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목자들은 양들을 성실하게 먹이고 돌보지 않으면서,
양들로부터 자기들의 유익만을 취한 것이다.
이미 2절에 양떼를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고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3절 후반부에서 그 내용을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양들을 제대로 돌보아야 하는 목자의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양들로부터 기름과 털을 취하는 목자의 권리만 행사하는 것이 문제이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불의인 것이다.
이런 악한 목자에 대한 비유는, 남부 유다의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고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연약한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일을 행한 죄를
지적한 것이다(아모5,10~12; 6,4~6참조).
한편, 악한 목자들이 양으로부터 취한 '기름'에 해당하는 '헬레브'(helleb)를
희랍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70인역(LXX)과 라틴어 번역본(Vulgata)은
'젖'이라는 뜻의 '할라브'(hallab)로 읽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가톨릭의 새 성경은 '젖을 짜먹고'라고 번역하였다.
목자들이 양떼로부터 취하는 것이 주로 양털과 젖이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성경은 '기름'이나 '우유'(milk)로 번역한 것들이 많다.
어떤 학자는 원문에서 '기름'을 취했다는 내용이
살진 양을 잡았다는 내용보다 더 앞에 나와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 가톨릭 새 성경처럼, 이것을 '젖'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는 양을 잡아야 기름이나 고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먼저 취한 뒤에
양을 잡았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름'으로 번역된 '헬레브'를 '젖'이라는 뜻의 '할라브'로 읽든지
여부와 상관없이, 본문에서 잡은 양이 살진 양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제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살진 양에게서는 털과 젖을 취할 뿐만 아니라
기름이나 고기까지 취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본문을 가톨릭이 '젖'으로 번역하든, 개신교가 '기름'으로 번역하든,
이스라엘 임금들 또는 고관들이 백성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서
그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세금으로 호의호식을 하였고, 많은 재산과
부를 가진 자들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악행을 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4)
이스라엘 거짓 목자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에제키엘서 34장 3~4절의 내용 중에서
34장 3절은 해서는 안 될 일을 범한 죄에 대한 지적이었다면,
34장 4절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죄에 대한 지적이 주로 제시된다.
본절에 의하면, 목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여러 양들의 처지와 상황에 따라
양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고대 근동의 양치기들은 막대기와 같은 원시적인 무기를 가지거나 양치기
개를 데리고 도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창세31,39; 1사무17,34.35; 예레33,13).
율법에서도 목동이 돌보는 중에 양을 다치게 하거나 잃거나 한다면,
그것을 주인에게 그대로 배상을 해야 한다고 규정한다(탈출22,12.13).
위의 구약 성경의 대부분의 용례를 보면, 양을 직접 치는 사람은
그 양의 주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양치기들은 자신의 아버지의 양이나
주인의 양을 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본절에 기록된 것처럼, 이스라엘 목자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양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자기 재산을 보전하는 일에 태만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함부로 다루고 피해를 입힌 악행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에제키엘서 34장 6절과 8절에서 하느님께서 이 양들을
내 양 떼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잘 드러난다.
남부 유다 백성들은 남부 유다 임금이나 지도자들의 백성이 아니고,
하느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부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인
백성을 함부로 대하고멸망하게 한 악행을 행한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악행이 양들의 본래 소유자되신 하느님의 진노를
자극하여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가장 먼저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로 제시된다.
그 다음으로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란 지적이 나온다.
여기서 '약한 양'에 해당하는 '한나홀로트'(hannaholloth)와
'아픈 양'에 해당하는 '하홀라'(haholla)는 수동형과 능동형이란 점만
다를 뿐, 모두 동일한 원형 '할라'(halla)의 분사형이다.
'할라'(halla)에는 '약하다'라는 의미도 있고, '병이 들다'(아프다) 라는 의미도 있다.
수동형으로 사용된 '한나홀로트'(약한 자)는 선천적으로 병이 들어서
쇠약하게 된 양을 의미한다.
이 양에 대한 처방은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능동형으로 사용된 '하홀라'(아픈 자)는 현재 병이 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양에 대한 치료는 지금 걸려 있는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치료해 주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시되는 '부러진 양'에 해당하는 '니쉬뻬레트'
(nishibereth)의 원형 '샤바르'(shabar)는 '부서지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가 부러져 탈골되거나
없어진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이 양에 대한 처방은 싸매여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음에 '흩어진 양'에 해당하는 '한닛다하트'(hannidahath)의
원형 '나다흐'(nadah)에는 '흩어지다'라는 이미가 있다.
양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양은 목자의 보호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곧바로 맹수의 위협에 노출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 양을 다시 양 무리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무관심하였다.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양'에 해당하는 '하오베데트'(haobedeth)의
원형 '아바르'(abar)에는 '멸망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들은 양 무리에서 떠나 있을 뿐 아니라, 거의 죽음 직전에
가 있는 상태의 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돌보아야 할 양들의 상태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병이 들거나 쇠약해진 양들이다.
둘째는, 큰 상처가 나(크게 다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양들이다.
세째는, 양 무리를 떠나 있는 상태로 5절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위험에 노출되어 생명이 위협받는 지경에 직면해 있는 양들이다.
에제키엘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양들이 처한 위험의 정도를 점층적으로
강화시켜 묘사하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양들을
제시하며, 이들을 돌보기는 커녕 포악으로 일관한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의
행위를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에제키엘서를 대하는 청중이나 독자들은, 본절에서 양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묘사가 점점 심화되면서,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정도를 더해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극한 어려움에 처한 양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오히려 가중시키는 악을 행하는 목자들의 악한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를 통해서 그들에게 마땅히 심판이 내려져야 함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20,1~16)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5)
한글 새 성경은 '나에게 합당하지'에 해당하는 '엑세스틴 모이'(eksestin moi; It is lawful
for me)의 번역을 생략했는데, 포도밭 임자의 행동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뜻이 있으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내게 합당하지 않느냐?"(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라는 뜻이 된다.
원문대로 하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행위였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신다
하여도 그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절대 공의로우며 인간에게도 유익이 되는 선(善)한 것이기에, 인간이 왈가왈부할 성질이
못된다는 것이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에 해당하는 '호티 에고 아가토스 에이미'(hoti ego agathos eimi;
because I am generous; because I am good)에서 '에고'(ego; I)란 일인칭 대명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에이미'(eimi; am)란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에고'(ego)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후하고 관대하며 선한 자가 바로 포도밭 임자(주인)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가토스'(agathos)는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방에 대하여 너그럽다'는 의미도 지닌다.
말하자면, 놀고 있는 자를 고용하여 넉넉한 품삯을 준 포도밭 임자 자신의 행동을 가리킨다.
한편, '후하다고'를 의미하는 '아가토스'(agathos)와 대응되는 단어로서 '시기하는'으로
번역된 '포네로스'(poneros; envious; evil)는 '비열한', '무가치한'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의인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푼 것을 도덕적으로 비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비록 늦게 포도밭에 왔지만 동료가 후한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한데, 이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우월감을 타인과 비교하여 드러내기를 좋아할 뿐,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크나큰 사랑을 볼 줄 모르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본성적 요소가 만드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기준은
항상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얻어
입어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며,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은 바로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감히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해 판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1-7).”
이
이야기에서 ‘일꾼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신앙인들을 상징하고, ‘품삯’은
신앙인들이 얻게 되는 ‘구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일꾼들이 하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밭도
남의 밭이 아니라 사실상 자신들의 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는 신앙인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는
처음부터 회개하는 사람도 있고, 뒤늦게 회개하는 사람도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을 언제 시작했든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했든지 간에, 또 회개를 언제 했든지 간에, 마지막 종착점은 모두 똑같고, 받게 되는 구원도 모두 똑같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심판 때의 현재 상태를 보는 심판입니다.
여기서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맨 마지막 사람들의 말을, “아무도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아서 ‘구원의 길’을 모르고 있습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 주었는데도 안 믿고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의 책임은 그 자신들에게 있지만, 구원받기를
희망하는데도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믿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의 책임은 복음을
전해 주지 않은 신앙인들 쪽에(교회 쪽에)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맨 마지막 사람들은 일하기 싫어서 그 시간까지 놀았던 것이 아니라, 일을 하려고 해도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맨 나중에 가서 한 시간만 일한 것은 그들 탓이 아닙니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마태 20,8-12).”
만일에
이 이야기가 실제 상황이라면, 맨
먼저 온 사람들의 불평은 타당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신앙생활’은
노동이 아니라 ‘은총’입니다. 남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시간 동안을 은총 속에서 생활한 사람입니다.
(남들보다 늦게 회개한 사람은, 보속해야 할 기간이 남들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출발점이 다른데 왜 종착점은 같은가?” 라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3-16).”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맨 먼저 온 이들이 뭔가 많이 잘못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성실하게 일한 사람들이고, 일한
만큼 품삯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사람들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고, 자기들은
더 많이 일했으니 더 많은 품삯을 받기를 기대한 것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맨 먼저 온 이들이 첫째에서 꼴찌로 전락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맨
나중에 와서 꼴찌로 출발한 이들이 마지막에 똑같은 첫째가 된 이야기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 일생 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와 말년에
세례를 받고 잠깐 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입니다. 일생
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더 좋은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말년에
잠깐 신앙생활을 했다고 해서 덜 좋은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시기 질투가 없는 나라입니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나중에 들어간 사람들을 환영하고,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는 나라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이곳에 들어왔지?” 라고 비난하고 항의하는 사람은 없고, “당신이 못 들어올 줄 알고 걱정했는데 들어와서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라고 말하면서 기뻐하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순교자 스테파노는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온 것을 크게 기뻐하면서 환영하고 축하했을 것입니다.)
비유
속에서 밭 임자는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품삯을 내주는 시간도 밭
임자가 마음대로 정한다는 점입니다. 심판의
날은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개인이
인생을 마치는 날도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품삯을 내준 뒤에는 일하려고 해도 일할 기회가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심판의 날을 맞이하게 되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이 회개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반영억라파엘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 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 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을 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사가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 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 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 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던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