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성전 세 (마태 17,22-27)

2018. 8. 13. 오전 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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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성전 세 (마태 17,22-27)


에제키엘 사제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리자, 그는 주님 영광의 형상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다. (에제 1,2-5.24-28ㄷ)
제삼십년 넷째 달 2 초닷샛날, 곧 여호야킨 임금의 유배 제오년에,
3 주님의 말씀이 칼데아인들의 땅 크바르 강 가에 있는, 부즈의 아들 에제키엘 사제에게 내리고, 주님의 손이 그곳에서 그에게 내리셨다.
4 그때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면서, 광채로 둘러싸인 큰 구름과 번쩍거리는 불이 밀려드는데, 그 광채 한가운데에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 같은 것이 보였다.
5 또 그 한가운데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24 그들이 나아갈 때에는 날갯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같았으며, 군중의 고함 소리, 진영의 고함 소리 같았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5 그들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멈출 때에는 날개를 접었다.
26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27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8 사방으로 뻗은 광채의 모습은, 비 오는 날 구름에 나타나는 무지개처럼 보였다. 그것은 주님 영광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은 세금을 면제받지만 비위를 건드릴 필요가 없으니 성전 세를 내라고 하신다. (마태 17,22-27)
제자들이 22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카파르나움으로 갔을 때, 성전 세를 거두는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 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25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는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 먼저, “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서 관세나 세금을 거두느냐? 자기 자녀들에게서냐, 아니면 남들에게서냐?” 하고 물으셨다.
26 베드로가 “남들에게서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에제1,2-5.24-28ㄷ)

 

"그들의 머리 위 궁창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어좌 형상이 있고,

 그 어좌 형상 위에는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아래쪽은 불처럼 보였는데,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26-27)

 

본문은 궁창 위의 한 아름다운 어좌의 형상에 대한 묘사이다.

어좌가 궁창 위에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나타낸다.

즉 궁창이 모든 피조 세계를 하느님의 영광의 어좌 아래에 위치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존재의 초월성과 위엄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궁창 위의 세계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후서 12장 1-4절에 기록한,

그가 환시중에 다녀온 셋째 하늘이며, 사도 요한이 묵시록 4-6장에서 기록한,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가는 천국과 동일하다.

 

에제키엘은 그 궁창 위에 어좌의 '형상'이 있다고 기록한다.

이 형상은 그것이 이 땅에 있는 왕들이 앉는 궁전의 어좌(throne)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지,

정확히 그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그 어좌 형상의 모양이 마치 청옥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청옥'에 해당하는 '에벤 쌉피르'(eben saphir)라는 단어는 대부분 영역본에서는

푸르스름하며 투명할 뿐 아니라 광채를 발하는 보석인 '사파이어'(sapphire stone)

번역하였다. 하느님의 어좌를 이 보석에 빗댄 것은 그 어좌의 거룩함과 순결성

부각시켜 표현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한편 어좌 위의 한 형상이 있으며, 사람처럼 보이는 형상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정확하게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에제키엘이 목격한 존재가

이 지상의 사람의 모양을 닮았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이 형상은 강생(육화;incarnatio)하기 전, 천상에서 신적 신분으로 존재하셨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아담'(adam)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자신의 형상과

모습대로 만든 '사람' 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창세1,26).

이 동일한 단어가 어좌 위에 계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가 장차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강생(육화)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필리2,8).

 

 

'내가 또 바라보니,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부분의 위쪽은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사방이 불로 둘러싸인 것 같았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사람 모양 같은 형상, 즉 강생(육화)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니엘이 티그리스 강가에서 보았던 그 형상과 외관이 유사하며(다니엘10,5.6),

에제키엘서 8장 2절에 기록된 주님의 권능의 현현을 묘사한 것도 유사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은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하느님의 모습(1티모6,16)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여기서 '불'에 해다하는 '에쉬'(esh)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위엄과 두려움, 심판 등을 상징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사방이' 란 표현은 그 사람 모양의 형상이

온통 불 같은 것으로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

 

또한 '빛나는 금붙이와 같고' 에 해당하는 어구 '케엔 하쉬말'(keen hashimal)

에제키엘서 1장 4절에서도 사용된 어구로서, 문자적으로는 '번쩍거리는 호박 같은 것'

(like gleaming amber) 또는 '이글거리는 금속같은 것'(like gleaming metal)이란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이것은 사람의 육안으로 감히 쳐다볼 수 조차 없는 하느님의 영광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를 그대로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방이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적 존재 자체가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서 본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태양이 힘있게 비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서 엎드렸다(목시1,16.17).
사람의 모양같은 형상에서 이처럼 눈부신 광채가 비추는 것은 그가 빛 되신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기 때문이다(히브1,3).

 

그 자신 역시 그 빛을 반영하는 빛과 동일한 존재이신 강생 이전의

성자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요한1,9-12).

이러한 하느님의 영광의 현현은 그분의 찬란한 영광뿐 아니라 그분의 빛으로만

이 세상의 어두움이 소멸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요한8,12).




  연중 제19주간 월요일복음 (마태17,22-27)


"그렇다면 자녀들은 면제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26ㄷ~27)

 

'그렇다면'에 해당하는 '아라 게'(ara ge)'그러므로', '따라서'라는 뜻을 가진

'아라'(ara; then)의 강조형이다.

왜냐하면 '게'(ge)는 어떤 낱말에 뒤따라와 그 낱말을 강조하는 접미어이기 때문이다.

또한 뒤에 오는 '엘류테로이'(eleutheroi)원형 '엘류테로스'(eleutheros)

'자유가 있다'(1코린7,39)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직역하면, '그렇다면! 아들들은 자유이다'(therefore the sons are free;

then the sons are exempt)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므로 당연히

성전 세가 면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성전이 아버지의 집이고(요한2,16),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고려해 볼 때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아들들' 혹은 '자녀들'에 해당하는 '호이 휘오이'(hoi hyoi; the children)

복수형으로 나오는 것은 앞의 25절에서 복수형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성전 세가 면제되는 대상은 성전의 주인되시는 예수님 뿐이시다.

 

따라서 '자녀들'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면세의 대상자가 다수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임금의 자녀들의 실례가 예수님께도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이 부분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자유와도 관련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므로, 그들도 스승으로 말미암아

'자녀들'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서 그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우리가 ~비위를 건드릴 것'에 해당하는 '스칸달리소멘'(skandalisomen;

we should offend)원형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원래 길 가운데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 또는 방해물을 놓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죄짓게 하다'(루카17,2; 마르9,43)로도 번역되고 있다.

이것은 상대로 하여금 죄짓도록 유혹하는 악한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단어의 용례를 적용하면,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아드님되시는 예수님의 신분으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사람들이 이용하여 그들 또한 성전 세를 내지 않는 행동으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이 단어는 '버리다', '떨어져 나가다'(마태26,31), '배척하다',

'못마땅하게 여기다'(마르6,31)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믿고 순종해야 할 대상을 불신하기 시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런 내용을 고려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에 대한 태도를

사람들이 오해하여 예수님을 배척하고 불신하게 되는 것을

미리 막고자 하시는 의도도 가지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스칸달리조'(skandalizo)'귀에 거슬리다',

'투덜거리다'(요한6,61)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계셨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에게 이것이 성전에 대한 모독으로

불쾌하게 여기고 분개할 수 있는 사건으로 부각될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앞으로 반드시 수행해야 할 하느님 아버지의

중요한 사명이 남아 있었기에, 더 큰 목표를 위해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양보하셨던 것이다.

 

'낚시를 던져 ~스타테르 한 닢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주어라.'

 

이 구절은 성전 세를 지불하기 위한 예수님의 기적으로

오직 마태오만이 기록하고 있다.

 

'낚시를'에 해당하는 '앙귀스트론'(angistron; an hook)

'구부러진 것'을 뜻하는 '앙코스'(angk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서 한 번 사용되었다.

 

'스타테르 한 닢'에 해당하는 '스타테라'(statera; a piece of money;

a four-drachma coin)'돈 한 세겔'로서 신약 시대에 통용되었던

'은전'(銀錢)의 명칭이다.

 

1스타테르는 4드라크마이며, 성전 세겔로는 한 세겔에 해당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당연히 율법의 요구에서 면제되신다.

 

그렇지만, 당신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시어 겸손하게 율법에 순종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성전 세를 마련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의 참 아드님되신 분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연중 제19주간 월요일(2013-08-12)

적절한 순서와 아량

반영억라파엘신부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행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서로 상종할 수 없으니 이쪽에서 삼가서 피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으면 때로는 기다려야 하는 아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전세를 거두는 이가 베드로에게 다가와 여러분의 스승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로마 총독이 로마제국을 위해 거둬들이던 세금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체적으로 징수하던 인두세였습니다. 스무 살 이상 성인 유다인 남자라면 누구나 해마다 영혼의 속죄를 위해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임금들은 관세나 인두세를 남에게서 받아내지 자기 가족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성전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큰 분(마태12,6)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속죄받을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세도 바치셨습니다(마태17,27). 성전의 참 주인이신 분께서 성전세를 내신 까닭이 어디 있을까요? 그야말로 요즘 표현으로 스캔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세금을 바치십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았던 돈으로 성전 세를 내십니다. 호수의 고기를 잡아 그 입안에 있던 돈으로 베드로의 몫과 주님의 몫으로 주도록 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다.’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모습에는 손상을 입지 않으시면서, 하느님께는 영광이 드려지며 인간의 비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 모습에 참 지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꼬인 사람에게는 우선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좋습니다. 원리(原理)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며 살아가는 데는 적절한 순서와 아량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많은 일들을 접하면서 그때 마다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 않은지 신중히 고려해야 할 상황들이 있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거나 일관되게 행동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릇이 되지 않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더욱 비굴하게 물러서는 것 같이 보이는 때 정말 참 지혜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때로는 비유를 들고, 때로는 비유를 해설해 주시던 예수님,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을 닦아주시고, 귀 구멍을 열어주시던 예수님, 일어서라고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던 예수님,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라 하시던 사랑의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을 앞세우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넉넉한 마음으로 지혜를 갈망하는 날 될 수 있길 희망하며 눈높이를 맞춰가는 가운데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세금과 연결하여 당신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은, 예루살렘이 더 이상 새로운 종교의 중심이 아님을 알려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실 때 새 계약의 성전이 되실 것입니다. 또 당신 죽음과 부활로 생겨난 새로운 파스카 공동체는 주님의 영적 성전이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성전이라는 거룩한 장소의 공간에 제한되지 않고 당신 삶 전체로 확대됩니다.
신자들을 하나로 묶는 진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형제시고 그분의 아버지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성전 자체보다 더 중요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성전 세를 내실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시려고 권리를 포기하시고 성전 세를 내십니다. 성전 세를 내는 방식은 매우 흥미로운 기적의 기원을 알려 줍니다. “호수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올라오는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 그것을 가져다가 나와 네 몫으로 그들에게 주어라.”
이는 종교세에 대한 초기 교회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곧 예루살렘 성전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던 그들의 태도를 반영해 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가 유다교에서 점점 멀어지자, 예배의 해방을 부르짖는 이들 수가 늘어났습니다. 마태오 공동체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얼마간 성전 세를 계속 냈다면, 그것은 납세를 의무로가 아니라 통치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세금은 사랑입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바치는 우리의 예물은 사랑으로 충만한 세금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자녀가 내는 세금은 사랑이 없는 돈일뿐입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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