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 (마태 19,13-15)

2018. 8. 18. 오전 6:51:33

글자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어린이들  (마태 19,13-15)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이스라엘 집안이 주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살 것이라며 회개하라고 하신다. (에제 18,1-10ㄱ.13ㄴ.30-3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자식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을 말해 대느냐?
3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다시는 이 속담을 이스라엘에서 말하지 않을 것이다.
4 보아라, 모든 목숨은 나의 것이다.아버지의 목숨도 자식의 목숨도 나의 것이다. 죄지은 자만 죽는다.
5 어떤 사람이 의로워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6 곧 산 위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이스라엘 집안의 우상들에게 눈을 들어 올리지 않으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않고 달거리하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7 사람을 학대하지 않고 빚 담보로 받은 것을 돌려주며, 강도 짓을 하지 않고 굶주린 이에게 빵을 주며, 헐벗은 이에게 옷을 입혀 주고, 8 변리를 받으려고 돈을 내놓지 않으며, 이자를 받지 않고 불의에서 손을 떼며, 사람들 사이에서 진실한 판결을 내리면서,
9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진실하게 지키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10 이 사람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남의 피를 흘리게 하면,
13 아들이 살 것 같으냐? 그는 살지 못한다. 이 모든 역겨운 짓을 저질렀으니,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가 죽은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30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
31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
32 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러니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19,13-15)
13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연중 제 19주간 토요일(에제 18,1-10ㄱ.13ㄴ.30-32)

 

 '너희는 어찌하여 이스라엘 땅에서,'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자식들의 이가 시다'  속담을 말해 대느냐?(2) 


본절과 3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책임 연계를 뜻하는 속담이, 사용하지 않게 될 그릇된 속담임을 천명한다. 

그 가운데 본문은 이 속담이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 특히 바빌론 유배 포로 공동체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중심으로 회자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에서 '땅'에 해당하는 '아드마트'(admath)의 원형 '아다마'(adama)는 영토라는 의미보다는 흙 성분 자체로서의 땅이라는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문자적 의미보다 예루살렘 및 그 예루살렘이 대표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내는 비유적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에 대하여'라는 의미의 전치사 '알'(al)과 함께 쓰여 이후에 제시되는 속담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되어 언급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 성경은 잘못 번역 한 것 같은데, 원문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함마샬 핫제 알 아드마트 이스라엘"; hammashal hazeh al admath israel; this proverb about the land of Israel)이다.

 

원문에서 '속담' 해당하는 단어는 '함마샬 핫제'(hammashal hazeh)로서, 문자적으로는 '바로 이 속담'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시 회자되던 그 속담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속담이라는 사실 나타내고 있다. 

'속담'에 해당하는 '함마샬'의 원형 '마샬'(mashal)은 어떤 두 개의 대상을 나란히 놓고 서로 비교 대조하는 것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교훈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자연 현상이나 생활 속의 일을 빗대,간결하고도 명확하게 말하는 표현을 의미한다.


단순히 어떤 사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빗대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풍부하고 깊은 의미를 전달하면서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오래 동안 잊혀지지 않고 잘 기억되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자식의 이가 시다'란 속담의 의미는 아버지(조상)가 지은 죄 때문에 자식(후손)이 고난(형벌)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뿐 아니라, 고대 근동의 여러 문화권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컨대 B.C.14세기에 힛타이트 왕 무실리스 2세는 자기 왕국을 휩쓸어버린 대재앙을 목도하면서 힛타이트의 폭풍의 신에게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신에게 큰 죄를 저질러 그 신이 그 죄의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물어 이런 형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항변하였다.


본절의 속담에서 '시다' 해당하는 '티크헤나'(thiqhenah)는 구약 성경에서 본문을 포함해 오직 네 구절에서만 사용된 단어이다.

코헬렛 10장 10절("쇠가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않으면 힘을 더 들여야 한다.")에서는 칼이나 연장의 날이 날카롭지 못하고 무딘 상태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고,

본문의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속담을 진술하는 예레미야 31장 29절,30절에서는 본문과 마찬가지로 신 포도를 너무 많이 먹어 이빨 신경이 무뎌져 얼얼한 상태를 나타낸다.


상식적으로 아버지가 아무리 신 포도를 많이 먹을지라도, 그 당사자의 이빨의 감각이 무디어질 뿐이지, 그 자녀의 이빨이 그렇게 될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런 속담을 만들어 회자시킨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 특히 바빌론 포로로 끌려와 타향 생활을 하며 고난을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던 그 고난이 죄를 너무나 많이 지은 그 조상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 많이 나는 포도와 관련한 이 속담을 말했던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들의 삶을 깊이 통찰하여 그러한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그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기는 커녕,오히려 조상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불평만을 일삼았으며, 무고한 자신들에게 내리시는 주님이 공평한 신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주님을 원망하는 삶을 살 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러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내려진 그런 고난의 삶을 결코 벗어 버릴 수 없다는 일종의 숙명론적인 굴레에 얽매어, 미래에 대해 그 어떠한 소망도 품지 못한 채 절망속에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상의 죄악으로 인한 희생자가 결코 아니었다. 바로 그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철저히 회개하여 자신들의 악한 삶을 떠나 의로운 삶을 살 경우, 자신들은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도 있었다.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복음(마태19,13~15)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14~15)


마태오 복음 19장 13절어린이를 랍비와 같이 존경받는 사람에게 데리고 나와서 안수 기도를 받는 당시의 풍습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결혼을 통해 얻어지는 하느님의 귀한 선물인 어린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축복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앞선 단락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같은 겸손함과 순종을 본받고, 어린이 하나라도 업신여겨서는 안된다는 교훈(마태18,1-4)을 제자들에게 주셨는데, 제자들은 이것을 잊어버리고 어린이를 경시하는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 어린이의 접근을 막는 실수를 저질렀다.


마태오 복음 18장 3절에 나오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에서 '어린이'해당하는 '타 파이디아'(ta paidia; little children)의 특징은 부모에게 절대 의존적이고, 부모의 말에 절대 순종하며, 가르침을 단순하게 잘 받아들이는 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하느님에 대하여 절대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만이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오 복음 19장 14절병행 구절마르코 복음 10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린이의 접근을 막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셨던 것이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의 심정으로 영혼 구원 사업에 열중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고, 실로 소중한 어린 생명들이 다가오는 것을 가로막는 제자들의 행동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의분을 금할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냥 놓아두어라'에 해당하는 '아페테'(aphete; let; suffer)일시적 동작을 명령하는 부정(不定) 과거 명령형으로서, 지금 당장 그 어린이들의 접근을 용납하라는 촉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막지 마라'에 해당하는 '메 콜뤼에테'(me kolyete; do not forbid; do not hinder)계속 반복되는 동작을 명령하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서 앞으로 계속하여 금해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어린이들을 자신에게 보낼 것을 촉구하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강력히 경고하신 것이다.

 


한편,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에서 '사실'로 번역된 접속사 '가르'(gar; for)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며, '왜냐하면'으로 번역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이 당신께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이유천국이 바로 이런 어린이들과 같이 겸손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 주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하늘 나라'에 해당하는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he basileia ton uranon; the kingdom of heaven)이나 병행 구절인 마르코 복음 10장 14절'하느님의 나라'에 해당하는 '헤 바실레이아 투 테우' (he basileia tu theu; the kingdom of God)동일한 의미를 보여 준다.


즉 이것은 모두 하느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역을 가리킨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의 통치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끝으로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에 해당하는 '에피테이스 타스 케이라스 아우토이스'(epitheis tas cheiras autois; he laid his hands on them; he placed his hands on them)에서 동사 '에피테이스'(epitheis)'~위에'라는 뜻이 있는 전치사 '에피'(epi)'놓다', '두다'는 뜻이 있는 '티테미'(tithemi)의 합성어로서, '~위에 두다'는 뜻을 가진 '에피타테미'(epitathemi)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안수(按手)는 손을 머리 위에 올리는 것임을 보여 준다.


『음성강론』?2012년 8월18일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마태오 19,13-15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그때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주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마태 19,13-15)."


사람들이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안수기도를 해 달라고 청합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중이니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거나, 아니면 그런 사소한 일로 예수님을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라고 하십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어린이'는 힘없고, 가난하고, 못났고, 보잘것없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어리고 순수하고 단순한, 글자 그대로의 어린이가 아니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세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회는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모이는 곳이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힘없고 보잘것없고 못난 사람도 주눅 드는 일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곳, 그곳이 교회입니다.

(반대로 힘 있고 잘 살고 잘난 사람들이 역차별 받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차별이 없어야 하는데, 아예 구별 자체가 없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만으로 모이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출신, 직업, 성별, 나이, 인종, 학력... 다 예수님 앞에서는 무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는(예수님의 제자들은)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야 하고,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휠체어를 타야만 하는 이들을 위해서 조금 더 예산을 들여서 휠체어를 탄 채 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설치하는 등의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대우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바로 공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자기를 낮추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라고 하셨고,

또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라고도 하셨습니다.


'사랑이란 같아지는 것'입니다. 같아지려면 먼저 자기를 낮춰야 합니다.

자기는 낮추지 않고 상대방에게만 올라오라고 요구하는 것은 교만이고 위선이고 거짓 사랑입니다.

이제 막 입교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신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데도 만일에 예비신자 교리를 마치 신학 수업처럼 진행하면서 알아듣지 못한다고 답답해한다면 그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자기의 믿음을 증언하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면서도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기만 하고, 자기가 유식하다는 것을 과시합니다.

그것은 자기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무식하다고 비웃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경우엔 읽은 책이 많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걸림돌이 됩니다.

(어떤 이는 읽은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인용하기만 합니다.)

'하느님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14) 라는 육화강생의 교리는 사람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처럼 당신을 낮추지 않고 하늘 높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나를 믿고 따라라.' 라고만 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선거 기간에 대통령 후보자가 시장에서 국밥 한 그릇 먹는 정도로는, 또 교구장이 조그만 공소에서 성탄절 미사 한 번 드리는 정도로는 자신을 낮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같아지지 않고 잠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은 낮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낮춤'은 잠깐 내려와서 휙 둘러보고 다시 올라가신 일이 아닙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복음]연중 제19주간 토요일(8/16)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모습은 당신의 상냥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당신 성격의 매우 인간적인 면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여정에서 메시아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달라.”고 청하자 어린이들을 만나시려고 멈추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이는 어린이에게 관심을 가졌던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의 유일한 본문입니다. 손을 얹고 기도하는 행위는 어머니들이 데려온 어린이들에게 당시 라삐들이 행하던 축복의 예식입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사실 하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이는 보잘것없음, 하찮음, 나약함, 의존함, 보호를 받지 못함의 상징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멸시와 경멸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맞이하시면서 아무도, 곧 평범한 이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이들도 하느님의 사랑과 하늘 나라에서 배척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높은 곳에서 오는 구원은 나이와 신분과 계층과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베풀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이들과 같이 단순하고 겸손한 이들에게 하늘 나라를 마련하시고 그 나라의 비밀과 지혜를 그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어린이를 위하여 축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볼까요?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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