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마르 6,17-29)

2018. 8. 29. 오전 6: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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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8. 29. 수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마르 6,17-29)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라며, 그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예레 1,17-19)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7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생일에 아내 헤로디아의 딸이 청한 대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게 하여 선물로 준다.(마르 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예레미야 예언자(미켈란젤로 작품: 바티칸 시스틴 성당 벽화)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예레1,17~19)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17)


앞의 1장 11~16절에서 하느님께서 예레미야가 예언자 소명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두 가지 환시를 주셨음을 밝혔다. 이제 17절 이하 19절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도록 촉구하시고, 약속을 통해 그를 격려하시는 내용이 소개된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라 명하신다.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의복으로, 저녁에는 이불로 사용되었다. 저녁에는 펼쳐서 이불로 사용하고, 아침이 되면 다시 그것을 몸에 두르고 허리를 묶어 일상복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어나 허리를 동여맨다는 표현은 일상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준비를 마친다는 의미 갖고 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허리를 동여맨다는 표현은 상징적으로 전쟁에 나갈 준비가 마쳐졌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라는 명령은 영적인 의미로 볼때, 예레미야가 전쟁에서 지휘관으로 소집되어 지휘권을 위임받는 것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을 향해 반역을 일으킨 남부 유다 백성을 진압하기 위해, 어떤 다른 무기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통해 그들과 싸우도록 명령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17~19절의 내용은 예레미야에게 주님께서 강력한 주권을 가지고 예언자의 소명을 주시는 8절 내용을 확대시켜, 보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여 명령하는 형태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8절의 '그들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권고는 본절에서 그대로 나타나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주리라' 약속은 19절에서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맥으로 볼 때, 8절과 17절이 조금 다른 면이 있다. 8절에서는 예레미야가 하느님의 소명 앞에 주춤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자 사명을 사양하는 태도에 대해 하느님 편에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한 의미로 이러한 명령이 주어졌다.


반면에 본절에서는,사명을 받고 그 임무의 막중함을 알고도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전능하신 하느님보다 눈에 보이는 권력자들이 더 크게 느껴져서 사명을 그르치거나 뒤로 물러서는 행위를 한다면, 이는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적인 태도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주어진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18)


본문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붙잡아 주시므로, 그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견고한 성(城)의 비유를 통해 묘사하신다.

먼저 '요새 성읍'에 해당하는 '레이르 미브차르'(leyir mibtsar)는 '둘러싸다'라는 의미의 동사'빠차르'(batsar)에서 유래한 명사 '미브차르'(mibtsaar)와 '성읍'이나 '도성'을 가리키는 명사 '이르'(yir)를 연결시킨 복합어로서, 산이나 평지를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화된 도시를 가리킨다.    


'요새 성읍' 높이 둘러싸인 성 전체를 의미한다면, '청동 벽'은 그 성의 벽면이 견고한 금속성 물질인 '청동'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키며, '쇠기둥' 그 성의 기둥도 견고한 금속성 물질인 '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본문에서는 예레미야를 철로 만든 기둥들과 청동으로 만든 벽면을 갖춘 하나의 견고한 성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를 이처럼 견고한 요새 성읍에 비유하므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가 얼마나 강한 자, 당당한 자로 설 수 있는지, 그야말로 그가 어떠한 성보다도 견고하여 아무도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아무리 막강한 지도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성일지라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면, 그 성은 곧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전달한다.


비록 예레미야가 혈혈단신이며 극히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였지만, 이처럼 그를 견고케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었기에 그는 40 여년 동안 자신의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예레15,20.21).

한편,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강하게 하시되, 이처럼 요새 성읍, 청동 벽, 쇠기둥이 되게 하셨다고 언급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남부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그만큼 완고하고 못됐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19)


8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고와 함께 계시된 구원의 약속이 19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고 있다. 특히 본절에서 제시된, 하느님께서 에레미야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과 그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은 예레미야가 고난을 당할지라도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의 근거로 제시된다.

이러한 약속은 예언자 에레미야의 생애에 만만치 않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가 겪은 여러 고난을 오히려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으며,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한탄하는 예레미야의 한숨과 눈물도 자기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심정을 토로하는 도구로 바꾸셨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고난과 슬픔 중에도 주님께서 항상 함께 하셨음을 보여 준다.

그가 겪은 온갖 수치와 모욕의 현장,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도  약속에 신실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를 강하게 하셨고, 그를 구원하셨으며, 예언자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으로 역사하셨던 것이다.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복음 (마르6,17-29)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28~29)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살로메는 드디어 참수당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가져다가 어머니 헤로디아에게 준다.

여기서 '그것을'로 번역된 '아우텐'(auten; it)3인칭 단수 대명사 여성 목적격이다. 이 대명사의 성(姓)이 여성인 것은 잘려나간 '머리'를 가리키는 명사 '케팔레'(kephale)여성 명사이기 때문이다.

살로메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갖다 줌으로써 그렇게도 세례자 요한에게 분노하며 죽이고자 했던 헤로디아의 소원은 마침내 성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쟁반에 담겨져 있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보자마자 헤로디아는 그녀의 긴 머리핀(바늘)을 뽑아 세례자 요한의 혀를 수없이 찔러서 뽑아 버렸다고 한다. 사악한 여인은 자신의 비행을 고발하는 진리와 정의의 혀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의(義)를 말하다가 비록 참수당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그 정신은 복음에 그대로 기록되어 대대로 칭송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에 모셨지만, 제자들은 사랑하는 스승의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목이 잘려나가고 없는 몸뚱아리만 장사지내야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선구자이며 최후의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루카7,28)은 30여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공적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세례자 요한을 박해한 자들은, 요한이라는 한 예언자만 박해한 것이 아니라,

요한을 통해서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박해했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그가 예수님의 선구자라는 점에서도

예수님 죽음의 예고가 되기도 하지만, 말씀을 전하다가 죽었다는 점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요한 1,14)이신 예수님 죽음의 예고가 되기도 합니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17-20).”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의 혼인 문제를 비판한 것은 그의 ‘회개 선포’의 일부입니다.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시비를 건 일이 아니라,

회개하라고 꾸짖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회개 선포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한 일입니다.

따라서 헤로데가 요한의 비판이 듣기 싫어서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박해한 일과 같습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을 보면, 헤로디아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하려고 한 것처럼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요한을 감옥에 가둘 때부터 이미 헤로데는 그를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여론이 두려워서 미루고 있었을 뿐입니다.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막은 것도, 그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라는

말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하느님의 예언자로) 알고 있는 군중의

여론을 헤로데가 두려워하며”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은, 서두르지 말고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헤로디아를 말렸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요한의 말을 듣기 싫어하면서도, 호기심이나 또는 특이한 자극을 즐기려는

속셈으로 그의 말을 자주 들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헤로데는 요한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마르 6,21-23).”


헤로데의 맹세에서 예수님 재판 때의 일이 연상됩니다.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마태 27,24-26).”

여기서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은 자기들과 자기들의 자손들이 지겠다는 백성의

말은 사실상 맹세인데, 사실 지킬 수도 없고, 지킬 마음도 없는 거짓 맹세입니다.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헤로데의 맹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제국 식민지의 영주일 뿐인 그가 지킬 수 있는 맹세도 아니고,

그것을 그대로 지킬 마음도 없었던 거짓 맹세입니다.


그렇지만 거짓 맹세라도 아무도 자기가 한 맹세에서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헤로데는 나중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자신의 왕국 전체를 잃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유대인들의 맹세도

나중에 예루살렘 멸망으로 현실이 됩니다.)

헤로데의 헛된 맹세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죽음을 초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씀 자체가 죽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예언자를 죽여도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마르 6,24-29).”


여기서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이라는 말은,

헤로데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는 것을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 자존심, 체면 등이 손상되는 것을 괴로워했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헤로데의 모습에서 빌라도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직접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면서도

모든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고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처럼 말했던 비겁한 사람입니다.

헤로데도 세례자 요한을 죽이면서도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고,

소녀와 헤로디아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식으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긴다고 해도

자신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인 살인자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오늘날에도 '실정법 때문에, 상관의 명령 때문에,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에' 같은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책임 회피를 해도 살인죄는 살인죄일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현명한 바보

반영억라파엘신부


똑똑하고 잘난 사람이 많으면 힘들어 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주장을 굽힐 줄 모르고 계산을 잘합니다. 그래서 자기를 우선적으로 챙깁니다. 그리고 상대를 의식하다가 얼굴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바보와 함께하면 살기가 수월합니다. 그들은 계산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봐도 손해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챙길 줄도 모르고 웃으며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이 진짜 똑똑한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성 요한 세례자는 바보였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더라면 헤로데 왕에게 잘 보여 자기의 권세를 누릴 수도 있었는데 해야 할 말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했습니다. 요한은 헤로데 임금이 임금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한 결혼을 하였다는 잘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이 베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목숨보다도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있는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눈에 바보가 될지언정 하느님을 놓치지 않길 희망했습니다. 그리고 빛이 되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모든 권력을 가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지녔지만 지혜도 없었고 헛 똑똑이입니다. 경솔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헛된 맹세 때문에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몹시 괴로웠지만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위신과 체면을 선택하는 계산을 하고 말았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는 그야말로 멍청한 바보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함부로 맹세를 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올 것인지를 안다면 쉽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공을 기대하지 말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는 현명한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26장에 보면 우물을 파는 이사악의 얘기가 나옵니다. 중동지방에서 우물은 한 부족의 운명이 달린 것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물을 판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길을 잡는 것도 그렇고 또 모래땅에서 우물을 파기란 어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은 일곱 개나 팠습니다. 열심히 파 놓으면 주위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자리를 옮겨 또 파고 그러다 보니 일곱 개나 파게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은 우물을 파지 않고 파 놓은 우물을 차지하려 머리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사악은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고 바보가 되어 우물파기에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종 아브라함을 보아서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의 수를 불어나게 하겠다”(창세26,24).하시며 이사악과 함께 하셨습니다.이사악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그의 종들은 그곳에서도 우물을 팠습니다. 결국 바보 이사악이 승리하였습니다. 우물을 빼앗았던 사람들은 똑똑한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바보처럼 우물을 빼앗기고 또 빼앗겼던 이사악은 이미 주 하느님을 차지했습니다.

 

복음에 보면 죽은 이는 요한 세례자이고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나 이사악이 바보처럼 보였지만 현명한 바보, 진짜 똑똑이입니다. 그러나 똑똑하고 잘 난 것처럼 보인 사람들은 헛 똑똑이였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현명한 바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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