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맹세(마태 23,13-22)

2018. 8. 27. 오전 6: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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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맹세(마태 23,13-22)


 바오로 사도는 실바누스와 티모테오와 함께,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한다.(2테살 1,1-5.11ㄴ-12)
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5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1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12 그리하여 우리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위선자요 눈먼 인도자라고 하시며 불행하다고 선언하신다.(마태 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제1독서(1테살1,1~5.11ㄴ~12)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3)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4)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5)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3)


테살로니카 1서 1장 1, 2절에서 송,수신자 표기 및 축복의 기도를 한 사도 바오로는 1장 3, 4절에서 테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의 신앙으로 인하여 자신의 감사와 자랑을 기록하고 있다. 

원문에서 이러한 감사와 자랑의 내용의 서두에 나오는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하느님께 늘 감사해야만 한다.' (We ought always to give thanks to the God)이다.


이렇게 강한 당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우리가 ~해야만 한다'로 번역된 동사 '오페일로멘'(opheilomen)의 원형 '오페일로'(opheilo)가 본래 지불해야만 하는 돈을 빚지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마태18,23; 루카7,41). 즉 이 단어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닌다(로마15,27).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2장 13절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자기가 테살로니카 성도들을 위해 하느님께 항상 감사해야만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에게 있어 감사를 하나의 의미로 여겼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그들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것은 그들에게 대한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의무이며,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신앙이 계속하여  아름답게 성장해 가는 것과 환난 가운데에서도 믿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인해 그 교회의 개척자인 자신이 하느님을 향해 감사하는 것을 하나의 당연한 의무로 여겼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견고하게 성장하게 된 원동력이 하느님께 있음을 알았기에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향한 감사를 강조했던 것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티'(hoti)로 시작하는 본문은 테살로니카 교회로 인하여 늘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본절 상반절의 이유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는 감사의 근거로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들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나타내는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요소이다(1테살3,6).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를 나타내는 수직적 신앙의 태도요, 사랑은 하느님께 대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믿음이 성도 및 타인에 대해 나타나는 수평적 신앙의 표현이다.


한편, '크게 자라나고'라는 의미로 번역된 '휘페라욱사네이'(hyperauxeanei)원형 '휘페라욱사노'(hyperauxano)'~을 초과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전치사 '휘페르'(hyper)'자라다', '번성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욱사노'(auxano)의  합성어로서 '지나치게 증가하다', '엄청나게 자라다'(grow exceedingly)라는 강한 의미를 지닌다.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쓰인 이 단어는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믿음을 바라보는 사도 바오로의 벅찬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들은 사도 바오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급속도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동사는 현재 직설법 시제로 쓰였는데, 이것은 그러한 성장이 멈추지 않고 계속 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정체함이 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믿음, 그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하느님 말씀의 봉사자로 하여금 감사를 자라나게 하는 요인이다.


또한, '더욱더 커지고 있기'로 번역된 '플레오나제이'(pleonazei)의 원형 '플레오나조'(pleonazo)남아돌 정도로 풍성한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1서에서 바로 이 단어를 사용하여 테살로니카 성도들의 사랑의 풍요를 위해서 중재 기도를 했었는데(1테살3,12), 이 기도가 응답되었음이 본절에 나타나고 있다.

더군다나 이 동사 역시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 직설법 사제로 쓰여서 성도 서로에 대한 사랑의 풍성함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4)


테살로니카 1서 1장 3절에서 테살로니카 교인들의 신앙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였던 사도 바오로가 1장 4절에서는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모든 교회에 자랑하고 있음을 밝힌다.

특히 본문은 당시 테살로니카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이 어떠한 지를 잘 말해준다. 테살로니카 1서 1장 6절에서도 이와 유사한 진술이 있는데, 약 2, 3개월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첫번째 서신을 썼던 때와 다름없이 그들이 환난 가운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박해'에 해당하는 '디오그모이스'(diogmois)의 원형 '디오그모스' (diogmos)는 원래 사냥개가 사냥감을 뒤쫓는 모습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사냥개가 표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쫓아가는 것처럼, 적대자들은 테살로니카 교회를 집요하게 박해하였던 것이다.

또한 '환난'으로 번역된 '틀립세신'(thlipsesin)의 원형 '틀립시스'(thlipsis)외적 고통과 더불어 내적 압박감까지 포함하는 고난을 말하는 단어이다.

 

본문에서 '디오그모스''틀립시스'는 의미상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동의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어를 반복하는 것은 그들이 당한 곤경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이 테살로니카 교인들에게 지속되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겪으면서도 보여준'에 해당하는 '하이스 아네케스테'(hais anechesthe)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이스'(hais; that)는 관계대명사로서 앞의 명사를 수식하며, '아네케스테''아네코'(anecho)현재 직설법으로 계속해서 참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 '아네코'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용납함으로써 참는 것의미하는데(에페4,2) 이것은 테살로니카 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박해(핍박)와 환난하느님의 허락하에 벌어지는 일들로 해석하고 묵묵히 참았음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 압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면 참기 힘든 법이어서 폭력으로 맞서거나 분노와 적개심을 품는 것이 반적이다.

 

그러나 테살로니카 교인들은 전혀 이와같이 대응하지 않고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오직 인내와 믿음으로 대처하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여기서 '인내'에 해당하는 '휘포모네스'의 원형 '휘포모네'(hypomone)'~아래에'라는 의미의 '휘포'(hypo) '머물러 있다'라는 의미의 '메노'(me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문자적으로 무겁게 내리 누르는 무거운 짐이나 고통 아래에서 굳건하게 머물러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마지못해 견디는 수동적인 뉘앙스가 아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견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테살로니카 1서 1장 3절에서는 이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 때문에 견딜수 있는 인내라고 표현했다. 

또한 '믿음'에 해당하는 '피스테오스'(pisteos)의 원형 '피스티스'(pistis)하느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들의 '믿음'은 평화로울 때 뿐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믿음'이었음이 본절에서 이 단어가 '인내'란 단어와 함께 사용되었다는 데서 잘 드러난다.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원문에는 '여러'에 해당하는 표현이 없어서 직역하면 '하느님의 그 교회들 안에서' ('엔 타이스 엑클레시아 투 테우'; en tais ekklesiais tu theu)이다.




여기서 '그 교회들'(tais ekklesiais)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지칭한다. 지금의 그리스의 북쪽(마케도니아)와 남쪽(아카이아)을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의'로 번역된 '투 테우'(tu theu)란 소유격의 표현은 교회에 대한 소유권이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6장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는 표현도 썼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교회의 소유권을 지닌 분으로 지칭하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으며,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소유권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교인들에 대한 좋은 소문이 각처에 퍼져나갔던 사실을 충분히 알면서도(1테살1,8) 다른 교회의 발전과 성숙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친히 그들에 대해 자랑하며 다녔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5)


테살로니카 2서에서 1장 1~4절의 도입부에 이어 이제 본절인 1장 5절부터 3장 15절까지가 본 서신의 본론 부분이다. 본론의 첫 단락은 1장 5~12절로서 환난받은 테살로니카 성도들을 위한 격려와 중재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1장 5~10절에서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서의 성도의 환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당시 박해(핍박)와 환난에 처해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있는테살로니카 성도들에게 적지않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를 영어로 번역하면 'All this is evidence that God's judgement is right'이다. '이 모든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옳다는 증거이다'라는 뜻이다.  테살로니카 교인들이 하느님과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인내와 믿음을 보여준 것에 대해서 먼훗날 하느님께서 심판 때에 그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실 거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그 다음 구절인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에 더 잘 나와있다.


본문에서 '합당한 사람이 되게'에 해당하는 '카탁시오테나이'(kataxiothenai)원형 '카탁시오오'(kataxioo)는 법적 용어로서 '적합하다고 간주하다', '합당하다고 여기다'라는 의미이다. 

본문에서 수동태로 사용되었는데, 합당히 여기는 주체바로 하느님이심을 암시한다. 그리고 본절에 표현된 '하느님의 나라'(tes basileias tu theu)하느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며, 예수 재림시 완성될 나라이다. 

따라서 본문은 고난을 이긴 성도들이 최후 심판 이후 하느님 나라의 완성사에 하느님의 영광의 나라로 들어가기에 적합한 자로 간주되어진다는 의미이다.


'사실 여러분은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라고 번역된 '휘페르 헤스 카이 파스케테' (hyper hes kai paschete ; for which you are suffering)에서 본동사 '파스케테(paschete)현재 직설법 동사로서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변치않는 진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관계 대명사 '헤스'(hes; which)'하느님 나라'를 지칭한다. 성도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을 받는 존재인데, 이것은 고난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의무라는 소극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더 나아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능동적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의미까지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여러분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에 해당하는 '파스케테'(paschete)능동태로 쓰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성도의 고난이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더욱 빛낸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사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무슨 큰 뜻을 위해 지금 고난을 받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희망의 인내와 믿음의 역사(役事)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받는 고난이 우리를 구원하실 하느님과 그 나라를 위해, 또한 하느님을 믿는 독특한 신앙 때문에 일어나는 것임을 알때, 우리는 장차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인내하고 극복할 수 있으며, 고난 가운데서도 낙담하지 않는 믿음의 역사(役事)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복음(마태23,13~22)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3~14)


마태오 복음 23장 1~12절예수님께서 군중들과 제자들을 향하여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 대표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신 내용이 실려 있다.

이제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23장 13~36절에는 예수님께서 보다 직접적으로 이들이 범한 죄악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시며 저주를 선언하시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저주의 선언은 7가지나 되며, 점차 그 강도를 더해 점층법적 구조로 발전하고 있다.

먼저 '불행하여라'로 번역된 '우아이'(uai; woe)슬픔과 분노, 절망을 나타내는 의성적 감탄사이다(잠언23,29; 1사무4,7; 1열왕13,30; 이사1,4; 예레10,19).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 심한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계셨으며, 혹독한 심판과 저주의 메시지를 던지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우아이'(uai)라는 감탄사에는 분노와 저주감정만이 담긴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애통의 감정도 역시 담겨져 있다.


한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저주받은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위선에 있다.

'위선자'에 해당하는 '휘포크리타이'(hypokritai; hypocrites)의 원형 '휘포크리테스'(hypokrites)고대 희랍 극장에서 자주 쓰이던 단어로서 '배우', '연기자'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그런데 이러한 원래적인 의미에서부터 이 단어가 '가장(假裝)하는 자', '위선적인 자'등의 부정적인 의미로 발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3장 13~36절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여섯 번이나 '휘포크리테스'(hypokrites)로 지칭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하는 거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경건한 체하는 위선과 다른 사람들의 눈에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인위적으로 행하는 것들임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말이다.


마태오 복음 23장 13절 후반부와 14절은 위선적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일곱 가지 저주 선언의 구체적인 이유 가운데 첫번째 죄목이다. 이들의 위선과 가장이라는 것겉과 속이 다른 모습 뿐만 아니라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그들이 율법의 본질을 왜곡하고 조상들의 전통을 율법보다 더 권위있는 것으로 가르침으로써 본말을 전도시켰기 때문이다.


'너희가 ~잠가'로 번역된 '클레이에테'(kleiete; you shut)'문을 닫다'의미를 지닌 원형 동사 '클레이오'(kleio)의 현재 시제이다.시제가 현재라는 사실은 그들의 그러한 행동이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또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천국문을 닫는 일에 '항상 매달려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그릇되이 해석하고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율법의 정신에서 떠난 삶을 살도록 만들었으며, 또한 자신들도 천국의 입구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2017년 8월 28일 가해 연중 제21주간 월요일(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눈먼 인도자들>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우리 가운데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옛날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이 말씀을, “위선자들은 자기들도 ‘하느님의 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지키려는 이들마저 지키게 놓아두지 않는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 법규를 지키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소에 자주 음주 운전을 하는 사람이, 교통 법규를 지키려고 하는 이들에게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하면서 술을 권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도 법을 어길 뿐만 아니라, 남도 법을 어기게 만드는 일입니다.)

성경이나 교리를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면서 함부로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 제대로 가르치면 다행인데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해서 잘못 가르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건 그렇게 안 해도 괜찮아.” 라는 말이나, “너무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 같은 말......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려는 이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도 있고.


‘하느님의 법’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법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위선자들은 자기들도 사랑 실천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다른 이의 사랑 실천을 방해합니다. ‘사랑 실천’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 같은 일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따라서 사랑 실천을 방해하는 일은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태 23,15).”


위선자들의 선교활동은 새로운 위선자를 만들어내는 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원래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잃은 자녀를 찾는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꾼을 모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마태 9,37-38). 그런데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으면서, 또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지도 않으면서 선교활동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 활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할 텐데, 혹시라도 활동의 결과로 새로운 입교자가 생기더라도 그 새 입교자는 자신을 인도한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러니 위선자들의 선교활동은 새로운 위선자를 만드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11,1).”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필리 3,17-19).”

바오로 사도가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사실상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것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면서도, 선교활동을 열성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교활동은 사람들을 구원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일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자기 혼자서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으로 데리고 가는 죄는 대단히 큰 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활동을 하러 나서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부터 반성해야 하고, 부족하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본받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본받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마태 23,16-22).” 이 말씀은, 이상한 궤변으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앞에 나온,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교리를 왜곡해서 가르침으로써 신앙생활을 무거운 멍에로 만들거나 아니면 반대로 너무 무질서하게 만드는 일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3,1).” 잘못 가르치는 사람과 그런 가르침에 넘어가는 사람 모두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두고 세 가지를 비난하시는데, 그 공통분모는 위선입니다.

그들에 대한 불행 선언은 깊은 아픔, 유감, 분노, 단죄의 외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회개를 권하지 않으시고 위선적인 그들을 메시아 심판으로 단죄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나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요 길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늘 나라를 멀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렸다고 그들을 비난하십니다.

참을 수 없는 그들의 율법주의는 하늘 나라를 미리 알려 주시고 그 나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군중을 불안하게 합니다.

그다음 개종자를 두고 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태도를 비난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 여행을 할 때 유다교에서 개종한 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만연되어 일반적으로 모세 법 준수를 통하여 의롭게 되거나 구원받는 것에 열광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서 교육받은 그들은 법적 순수함을 이유로 자기 아내들과 이혼까지도 하였습니다. 바리사이들에 따르면, 히브리인과 개종자가 이교도의 같은 지붕 아래 같이 산다는 것은 금지되며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성전과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과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는 것을 비난하십니다.

이런 인도자들은 “어리석고 눈먼 자들”입니다. 성전과 제단이 금과 예물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고 드러내는 성전과 제단에서 그 가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신앙인이라는 비난을 듣지는 않는가요?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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