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0주간 토요일]섬기는 사람(마태23,1-12)

2018. 8. 25. 오전 7: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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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0주간 토요일]섬기는 사람(마태23,1-12)

 

에제키엘 예언자는 천사에게 이끌려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에제 43,1-7ㄷ)
천사가 1 나를 대문으로,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2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3 그 모습은 내가 본 환시, 곧 그분께서 이 도성을 파멸시키러 오실 때에 내가 본 환시와 같았고, 또 그 모습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본 환시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4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5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그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는데, 주님의 집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7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스승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며,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제1독서(에제43,1~7ㄷ)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4)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5)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7)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4)


성전 동쪽에 임하였던 주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에 관한 묘사이다. 주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한 문은 예루살렘 동쪽으로 난 문이었다.

에제키엘서 9장 3절에서 성전 문지방에 머물던 하느님의 영광이 10장 18절과 19절에서 성전 문지방을 떠나 커룹들 위에 머물고 있던 곳도 동쪽으로 난 문이었다.


또한 11장 1절 보면,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영으로 에제키엘을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심판과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하신 장소동쪽 대문이었고, 이어지는 11장 22절~24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성전을 완전히 떠나는 장소동쪽 대문이었다.


또한 새 성전에 대한 환시의 보도인 40장 6절 보면, 이 동쪽 대문은 천사의 인도를 받은 에제키엘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되었고, 주님의 영광이 성전 안으로 들어간 곳동쪽 대문이었다.


에제키엘은 성전 멸망에 관한 보도에서 주님의 영광이 떠나시는 장소였던 동쪽 대문을 통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강조함으로써, 새 성전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의 성격지닌 것으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장면 묘사를 통해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심판을 선언하시고 시행하신 이후에, 다시 찾아오셔서 은혜의 회복을 선포하실 것임을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특별히 에제키엘 44장 2절에서는 성전 밖, 동쪽으로 난 대문을 영원히 닫을 것을 명령하신다. 이러한 동쪽 대문 폐쇄 명령은 이 성전에서 주 하느님께서 가장 높으신 분이심을 부각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이 성전에 주 하느님께서 영원 무궁히 임재하실 것임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5)


하느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엎드려 있는 에제키엘을 하느님의 영이 데리고 안뜰로 들어가게 하셨다.

에제키엘서 40~42장에서는 천사가 에제키엘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의 각 건물들을 측량하고 설명하는 일을 하였고, 40장 1절 보면 주님의 영광이 임재하실 성전 밖, 동쪽 대문 앞으로 인도한 것도 천사, 40장 3절의 표현에 의하면 빛나는 구리와 같은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이 임재한 성전 안으로 에제키엘을 들어가게 하신 것더 이상 천사가 아니고 하느님의 영이었다.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은 것은 에제키엘서 3장 12절,14절 등에도 나온다. 거기에보면, 크바르 강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을 때에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영의 강한 감동과 인도하심을 받은 적이 있다. 

에제키엘서 43장 5절 본문에서 '나를 들어'에 해당하는 '왓팃솨에니'(wathisaeni)는 (일반)능동형이고, '데리고 가셨는데'에 해당하는 '왓테비에니'(wathebieni)는 사역형이다.

따라서 엎드려 있는 에제키엘이 일어나게 된 것하느님의 영의 직접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고, 에제키엘이 동쪽 대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간 것성령의 인도나 강력한 역사하심에 의해 따라 들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의 영은 군대의 웅성거림과 같은 웅장한 소리와 온 땅을 밝히고도 남을 만한 강한 빛으로 압도되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현현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정신을 잃다시피 하였을 에제키엘에게 일어설 수 있는 강한 힘을 주셨고, 그 힘으로 인해 성전 안뜰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성전 안으로 들어간 에제키엘은 그곳에 가득 찬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가득 차 있었다'로 번역된 '말레'(malle)탈출기 40장 34절, 3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지시한 대로 만남의 천막(성막)을 다 지은 후에 주님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한 사실을 묘사함에도 사용되었고, 열왕기 상권 8장 10절,11절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완성된 성전으로 주님의 계약궤를 옮겼을 때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구름을 통해 가득 참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용례에서 '말레'(malle)는 두 번씩 반복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에제키엘은 탈출기와 열왕기 상권 저자가 사용한 '말레'(malle)라는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새 성전에 충만한 주님의 영광이 탈출기에서 성막에 임했던 주님의 영광이었으며, 솔로몬의 성전에 가득하였던 주님의 영광이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또한 탈출기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의 경우에도 주님의 영광이 가득찼던 것은 성막과 성전 건축이 모두 완결된 이후였다. 이것은 새 성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새 성전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천사에 의한 성전의 각 부분에 대한 측량이 마쳐진 뒤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찼다.

 


성막이나 성전은 모두, 그 건축물 자체로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주님의 영광이 임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이것을 감안할 때, 새 성전에 주님의 영광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은 과거에 성전을 떠났던 주님의 영광의 회복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함께 새 성전의 완전한 완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도 이해된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7)


성소로부터 들려온 하느님의 말씀이 본절인 43장 7절 이하 12절에 다시금 소개된다. 그 가운데 43장 7~9절의 내용은 주님께서 영원히 임재하신다는 약속과 더불어, 그 조건으로 성전이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처소이므로 거룩함을 훼손하는 죄악을 버리고 거룩함에 관한 성전의 법도를 지켜야 함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43장 7절은 성전이 거룩한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성전이 거룩한 이유는 먼저 성전에 하느님의 어좌(옥좌, 보좌)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전은 먼저 '내 어좌의 자리(처소)'로 소개된다. 여기서 '내 어좌'에 해당하는 '키쓰이'(kissyi)의 원형 '카싸'(kassa)권력의 자리를 의미한다.




'카싸'창세기 40장 40절에서는 왕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사무엘 상권 1장 9절에서는 사제가 앉는 자리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시편 94장 20절에서는 재판관이 판결을 위해 앉는 자리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런 용례를 보면, '카싸'(kassa)는 왕이나 재판관이나 사제가 갖는 정치,사법, 종교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에제키엘에서는 '카싸'(kassa)가 총 5회 사용되었는데, 세상 왕의 왕좌를 묘사한 26장 16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환시 중에 본 하늘의 보좌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편, '내 어좌의 자리'와 병행되어 제시되는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표현은 역대기 상권 28장 2절, 시편 99장 5절, 이사야 60장 15절에서 모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때 성전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장소로 언급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발'은 어떤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 딛고 살아가는 자신의 거주지와 땅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것하느님의 발만이 아니고, 발이 상징하는 바 거주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새 성전을 가리켜 '내 어좌의 자리'라고 한 것이나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고 한 것은 모두 하느님의 임재(현존)가 새 성전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 두 표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댓구를 이루는 반복이다.

'내 어좌의 자리'라는 표현에서 어좌는 모든 권력의 근원인 하늘의 어좌를 의미하므로 하늘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라는 표현에서 발은 거주하는 장소로서의 땅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또한 '내 어좌'라는 표현은 이 세상의 모든 정치, 종교, 사법적 권력을 아우르는 온 우주적 권력을 상징하고, '내 발(바닥)'이라는 표현은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결국 본문은 성전을 하늘과 땅, 즉 온 우주, 혹은 우주에 대한 통치의 축소판으로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성전은 모든 이들이 와서 경배해야 할 만유의 절대 주권자이며 통치자요, 심판자가 계신 거룩한 장소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표현은 주님께서 새 성전에 영원히 현존(임재)하실 것이란 약속이다.

즉 이것은 앞으로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단절없는 완전한 하느님의 통치와 백성들의 경배가 계속되는 곳이 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에제키엘서 43장 7절의 의미를 종합하면, 43장 7절의 표현은 단순히 하느님의 임재가 그분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온 세상을 통치하시며 모든 나라와 백성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뿐 아니라, 인간의 사언행위(思言行爲)의 심사와 그 의로움과 불의함에 따라 심판을 단행하실 권력을 갖고 계심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의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복음(마태23,1~12)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5)


마태오 복음 23장 5~7절까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적인 경건 과시(5절),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끝없는 명예욕(6절),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얻고자 하는 마음(7절)에 대한 대표적 예이다.


'성구갑'으로 번역된 '퓔라크테리아'(phylakteria; phylacteries)의 원형 '퓔라크테리온'(phylakterion)은 모세 율법 중에서 탈출기 13장 1~10절, 11~16절, 신명기 6장 4~9절, 11장 13~21절 등의 네 부분을 작고 긴 양피지 조각에 기록하여 그것을 작은 상자 속에 봉해 넣은 것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네 손에 감은 표징과 네 이마에 붙인 표지로 여겨라'말씀(탈출13,16; 신명6,8)에 근거하여, 위의 네 부분의 율법의 구절을 기록경문을 넣은 성구갑을 이마와 왼팔에 가죽끈으로 고정하여 틈나는 대로 보면서 경건에 힘썼던 것이다.


마태오 복음 23장 5절에서 '넓게 만들고'해당하는'플라튀누신'(platynusin; they make wide; they make broad) 다른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도록 성구갑의 크기를 크게 한다는 뜻이다.


시행 초기인 바빌론 유배 포로기 직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성구갑을 달고 다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달고 다녔다.


과시욕이 지나치다 못해 어떻게 하면 더 크게 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한편, '옷자락 술'로 번역된 '크라스페다'(kraspeda; the tassels of their garments)의  원형 '크라스페돈'(kraspedon)'망토 또는 외투의 가장자리에 털실을 꼬아 매달리게 장식한 작은 부속물'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민수기 15장 37~40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흰색과 청색 실로 짠, 이와 같은 부속물을 겉옷의 가장자리에 매달았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실천하게 하는 기능을 하며, 마음과 눈이 쏠리는 데로 욕심을 따라 방종하게 살아 배신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해 주었다(민수15,39).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러한 율법의 정신을 따르려는 마음보다는, 단지 사람들에게 자신을 거룩하게 보이려는 열망으로 '옷자락 술'을 더 크게 만들어 그것을 즐겨 입고 다녔던 것이다.



연중 제20주간 토요일(8/26)

말에 앞서 바른 행실을 해야 한다

 반영억신부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수도자와의 만남에서 “청빈서원을 하지만 부자로 살아가는 봉헌된 사람들의 위선이 신자들의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교회를 해칩니다. 또한 순전히 실용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은 것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어왔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자신이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을 하면서도 정작 대접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면 큰일입니다. 사람의 주목을 받는 일에는 기를 쓰고 일을 하려고 들고 알아주지 않는 일, 하지만 충실히 채워야 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그리스도인은 행실이 표양이 되어야 하고 버릇없는 이들과도 함께해서 좋은 것으로 이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듯 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묵상/ 2014-08-23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히브리 백성의 종교 지도자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종교적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복음의 전반부에서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공격과 고발은 매우 중대한 두 가지 비난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첫째는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그들의 이중생활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면서도 자신들은 행동으로 보여 주지 않습니다. 넓은 부위는 자기 자신에게, 좁은 부위는 다른 이들에게 들이대는 그들은 깔때기와 같은 위선을 보입니다.
둘째는,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칭찬받기 위한 그들의 과시와 허영입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행실과 태도는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전시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백성 앞에서 그들의 권위를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후반부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행실과 대조적으로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의 행실에 관한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우리 모두 형제이고 같은 아버지의 자녀들이므로 스승이나 아버지라고 불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은 오직 한 분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역설적인 두 문장으로 끝맺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믿음과 행실에서 일관된 생활을 하고 있는가요?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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