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위선 (마태 23,23-26)

2018. 8. 28. 오전 7: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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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위선 (마태 23,23-26)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그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라고 당부한다.(2테살  2,1-3ㄱ.14-17)
1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우리가 그분께 모이게 될 일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2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3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14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이제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시며,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하라고 하신다.(마태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테살로니카에는 수많은 교회 건물들과 기념물들이 남아있다. 1세기에 사도 바오로가 이곳에 교회를 세웠으며 교회 건물들은  그리스 방식의 십자 형태나 바실리카 풍의 삼중 회랑으로 지어졌다. 남이있는 것은 대부분 4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세워진  건축물들이다.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제1독서(2테살 2,1~3ㄱ.14~17)


"누가 예언이나 설교를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누가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은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2)


테살로니카 2서 2장 2절과 3절ㄱ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성도들에게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는 헛소문에 속아 넘어가지 말 것을 당부한다. 당시 테살로니카 성도들은 주님의 날이 임박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큰 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혼란을 초래한 근원 크게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를 모두 부정어 '메테(mete; neither ~ nor)로 연결하고 있다.

또한 역시 세 번이나 쓰인 전치사 '디아'(dia; by) '~을 통하여'라는 의미로서 일어난  문제의 근원지를 밝혀준다.


즉 사도 바오로는 이런 표현을 사용하여 예언을 통해서든지, 설교를 통해서든지, 편지를 통해서든지 결코 두려워하거나 결코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을 잘 전달한다. 이것은 이런 것들로 인해 테살로니카 교인들이 큰 혼란에 빠졌음을 반증한다.


여기에서 '예언'으로  번역된 원어는 '프뉴마토스'(pneumatos)로 나와있다. 이 단어의 원형 '프뉴마'(pneuma)는 성령이든, 악령이든, 인간의 지,정,의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영적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요한1,33; 사도23,8; 2코린11,4).


이것은 본문에서 '예언'으로 번역되었지만, 구체적으로 이 '프뉴마'다가올 일을 예언하는 영으로 묘사되었다. '예언'가운데는 하느님께 속하지 않은 영으로 말미암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1요한4,1~3).

테살로니카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영'에 근거하여 '주님의 날'에 대하여 운운했을 것이다.


또 어떤 자들은 자신이 사도 바오로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하는 말에 근거하여 또는 교인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에 근거하여 '주님의 날'에 대해 임의적인 말을 퍼뜨렸을 것이다.


'설교'로 번역된 '로구'(logu)의 원형은 '로고스'로서 말(word), 보고(report), 설교(homily, preaching)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자들은 좀 더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는 편지(letter)근거로 하여 그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본절에서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로 번역된 '에피플로레스 호스 디 헤몬' (epiploles hos di hemon)'마치 우리를 통해 받은 듯한 편지' (a letter as if from us)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들이 사도 바오로에게서 받은 편지라는 것인지, 아니면 누가 썼는지 모르는 편지를 마치 사도 바오로에게서 받은 편지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도용한 자들이 사도 바오로의 이름으로 보낸 편지라는 것인지 분명치 않은 표현이다.


만일에 ①의 추정이 맞다면, 그들은 아마도 테살로니카 1서 5장1~11절의 사도 바오로의

진의를 오해하여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②와 ③의 추정도 결코 틀리지 않는다.

이를 따르면, 테살로니카 교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편지(테살로니카 1서는 아님)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면밀히 확인해 보지도 않고, 사도 바오로가 보낸 것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다.

 

특히 ③의 경우는, 사도 바오로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던 자들이 사도 바오로가 모르는 사이에 사도 바오로의 이름을 가장하여 테살로니카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고, 교인들은 그들의 의도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의미가 된다.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테살로니카 교인들로 하여금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핵심 내용이다. 여기서 '왔다'로 번역된 '에네스테켄'(enesteken)은 현재 존재해 있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에니스테미'(enistemi)의 완료형이다. 말하자면, '임박해 있다'(is at hand)가 아니고, '이미 와 있다'(has already come)라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 38절과 코린토 전서 3장 22절에서 '에니스테미'(enistemi)의 완료형이 현재 이미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로 분명히 하였다. 거기서 '에니스테미'의 완료 부사 '에네스토타'(enestota)'장래 일'(things to come)이라는 의미를 지닌 '멜로타'(mellota)대조적으로 '현재 일'(things present)이라는 의미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테살로니카 교인들이 잘못된 정보와 지식을 통해 주님 재림의 날, 심판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오해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들이 받고 있는 박해(핍박)와 혼난이 너무 심해서 최후 종말의 산고(the eschatoligical birth pangs)가 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이 세상에 임하시는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하였다고 믿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미 이르렀으나, 너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고 말하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이야 어떻든, 그들 중 적지 않은 자들이 주님의 날이 이미 도래했다고 믿어 요동하며 불안해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노오스'(noos)의 원형 '누스'(nous)마음 중에서도 지각하고 이해하는 기능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이성, 정신을 의미한다.

또한 '흔들리거나'로 번역된 '살류테나이'(saleuthenai)의 원형 '살류오'(saleuo)심하게 흔들어 대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이며, 본문에서는 수동태로 사용되었다.


'쉽사리'로 번역된 '타케오스'(tacheos)'속히', '빨리', '경솔하게'라는 의미를 지닌 부사이다.

따라서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다'라는 원어적 표현은 밖에서 일어나거나 유포되고 있는 어떠한 사실을 여과없이 쉽게 받아들여, 이성(理性)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재림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당시 테살로니카 교인들의 모습을 매우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복음(마태23,23~26)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3)


마태오 복음 23장 23절과 24절네번째 저주 선언이다.

이것은 세번째 저주 선언(마태23,16-22)과 더불어 가치 전도의 어리석음을 책망하면서 특히 사소한 것은 취하면서도 참으로 취해야 할 율법의 근본 정신은 헌신짝처럼 버리는 영적인 사악함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의 대상으로 삼은 것들 중에서 '박하'로 번역된 '헤뒤오스몬'(hedyosmon; mint)'향기롭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며, 조그맣고 향내나는 일종의 향료 식물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 식물의 가루나 즙을 집이나 회당의 바닥에 뿌려 향기를 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라'로 번역된 '아네톤'(anethon; anise, dill)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서 양념의 향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소회향'으로 번역된 '퀴미논'(kyminon; cummin)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는 향기가 짙은 식물로서 양념이나 약용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십일조로 낸 것으로 나오는 이같은 식물들은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신명14,22.23)의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이다.

즉 율법은 밭에서 나는 소출 중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분의 일을 규정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것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지도 않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십분의 일을 엄격하게 떼어 하느님께 드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종교적 열심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는 열심을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간과해버리는 그들의 영적 무지와 남에게 보이는 데만 치중하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들'에 해당하는 '바뤼테라'(barytera; more important matters)'무게가 무거운'을 의미하는 형용사 '바뤼스'(barys)의 비교급 목적격 복수이다.


여기에 나오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준수해야 할 모든 율법 조항과 비교해서도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서, 개개의 모든 율법 조항들이 추구하고 담고 있어야 할 근본 정신인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인들은 정말 지키고 간직해야 할 율법의 근본 정신은 버리고, 그것을 포장하는 겉껍데기만을 열심히 보존한 사람들이었다.


먼저, '의로움'으로 번역된 '크리신'(krisin; justice)의 원형 '크리시스'(krisis)법정적 용어로서 '나눔', '분리', '논쟁'등의 의미와 더불어 '판결', '심판', '의', '공의'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문맥을 고려할 때, 여기서는 '심판'(judgment)보다는 '공의'(justice)라는 의미가 더 적합하다. 그리고 '자비'로 번역된 '엘레오스'(eleos; mercy)'불쌍한 자와 고통받는 자를 보고서 그들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호의'를 의미하는 명사이다.


'엘레오스'(eleos)는 구약 성경 칠십인역(LXX)에서 히브리어 '헤쎄드'(hesed)의 역어로서 사용되었는데, 계약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실한 사랑의 행동으로서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베푸는 은혜와 자비를 포함한다.

여기서는 죄에 빠져서 하느님의 길을 떠나버린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하심도 담겨 있다.


끝으로 '신의'로 번역된 '피스틴'(pistin; faith)의 원형 '피스티스'(pistis)'믿음', '신앙'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명사로서,  특히 인간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확신이나 믿음을 가리킨다.


위의 세 가지 덕목인간의 사회 생활과 신앙 생활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미카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밝히신 적이 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6,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경건한 신앙심 없이 형식적이고 위선적으로 바치는 종교적, 제의적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시고, 정의와 공의, 자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기뻐하신다고 하셨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셨다(마태5,17). 사도 바오로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효가 되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자는 것입니다.'(로마3,31) 라고 단언한 적이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외적 준수 뿐만 아니라 그 정신의 이행까지도 강조하셨다. 여기서 '~해야만 했다'로 번역된 '에데이'(edei)'당연히~해야 한다', '마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데이'(dei)의 미완료 과거로서, 위와 같은 것들을 '당연히'(ought to) 그리고 '지속적으로'(continually)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8월 23일 (녹)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위선>

 


눈에 보이는 겉모습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속은 그렇지 않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예수님께서는 의로움, 자비, 신의를 실천하는 일은 ‘더 중요한’ 일이고,

십일조를 내는 일은 ‘덜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선자들은 ‘덜 중요한’ 일만 잘하고, ‘더 중요한’ 일은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모르거나, 착각하거나, 오해해서 그럴 수도 있고,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은 하기 싫어하고,

사람들에게 생색내기 쉬운 일만 하려고 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일처럼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일은 눈에 잘 보입니다.

잘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잘하는 사람을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지만,

자기 자신도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는 일은 잘 보이지 않는 일입니다.

잘 보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남들도 그렇지만 자기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착각해서 그렇게 하든지, 어리석어서 그렇게 하든지 간에,

어떻든 보이는 일만 잘하고 안 보이는 일은 소홀히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만 잘하고 안 보이는 일은 무시하는 것은,

사람들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무시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미 그런 위선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 6,1).”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3-4).”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면 기분은 좋겠지만,

칭찬에 도취되는 것은 위선자로 전락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내는 일을 ‘덜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것이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 중요한 일들을 실행한다고 해서,

보이는 일들, 덜 중요한 일들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더 중요한 일이나 덜 중요한 일이나 모두 똑같이 실행해야 합니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마태 23,24).”

 

이 말씀에서 ‘작은 벌레들’은 ‘덜 중요한’ 일을,

‘낙타’는 ‘더 중요한’ 일을 뜻합니다.

그래서 앞의 23절의 말씀과 같은 뜻인데, 조금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서,

‘작은 벌레들’을 ‘일반적이고 작은 죄’(소죄)로,

‘낙타’를 ‘정말로 큰 죄’(대죄)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고해성사 볼 때에 소죄는 성실하게 고백하고 보속하면서,

정말로 큰 죄, 대죄는 감추고 고백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모고해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죄만 고백하고 소죄는 그냥 지나쳐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죄도 습관적으로 반복하면 대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죄든 소죄든 간에 성실하게 회개하고 고백하고 보속해야 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이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한데 속은 그렇지 않은

위선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겉은 정말로 깨끗할까?

여기서 ‘깨끗함’을 ‘거룩함’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속이 거룩하지 않으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거룩하게 보여도

그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고, 거룩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거룩한 척 하며 연기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깨끗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그릇 속에 쓰레기가 가득 들어 있다면,

그릇의 겉이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고, 그것은 그냥 더러운 그릇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위선’인데, 겉은 진짜고 속은 가짜라는 뜻이 아닙니다.

‘위선’은, 속은 감추어서 보이지 않게 하고, 겉은 가짜 모습으로 속이는 일입니다.)

 

속이 깨끗하다면 겉은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어도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이 중요하다면서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속으로나 겉으로나 경건하고 거룩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위선’과 ‘위악’은 모두 다 나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사랑 실천’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말로만)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고, 위선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사랑해야 진짜 사랑입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사랑한다면서 겉으로는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것은?

인간 세상의 연애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척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신앙생활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마음으로도 해야 하고, 겉으로도(행동으로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믿음, 사랑, 희망은 마음속에서도 굳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행동으로도 충실하게 실천해야 하는 덕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4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마음은 신용장

 반영억라파엘신부


매일 같이 이를 닦고 얼굴을 씻고 옷매무새를 고칩니다. 외출을 하려면 거울을 보고 다시 한 번 몸단장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외모를 가꾸려 많은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에 비하면 마음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표정이 맑고, 얼굴이 빛납니다. 그‘아름다운 마음은 신용장’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럼에도 마음을 가꾸는 것에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12,2). 라고 권고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정결 예식에 대한 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데 신중을 기했습니다. 그럼에도‘위선자’소리를 듣는 것은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컵을 닦고 그릇을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겉을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닦아야 할 속을 버려두고 겉만 닦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잔이 아무리 좋은 잔이고 화려해도 속이 더러우면 쓸 수가 없습니다. 속이 깨끗하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형식적 의로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적이고 참된 의로움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15,11).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15,19-20).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외적 행동 또한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혹여 내가 누구를 속였어도 그것은 내가 빠져 나간 것처럼 여길 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마음이 즐거우면 얼굴이 밝아지고 마음이 괴로우면 기가 꺾인다”(잠언 15,13).“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잠언 4,23). 그러니 기도합니다.“주님, 당신께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언제 저에게 오시렵니까? 저의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걷고 불의한 일을 저의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그릇된 마음 제게서 멀리 떨어지고 악한 것을 제가 알지 않으리이다”(시편101,2. 4). 삶의 여정 안에서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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